시민단체가 꼽은 나쁜 예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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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 있다는 원자력에 웬 국민세금 투입?… 펑펑 새는 기술개발 예산

바야흐로 국회 예산철이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지난 11월 14일 조정소위원회를 가동해 오는 30일까지 429조원의 내년도 예산안에 대해 본격 심사에 나선다. 문재인 정부 첫 예산인 2018년 예산안에 대해 과반수에 이르는 야당은 단단히 벼르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2018년 예산안을 ‘나쁜 예산안’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삭감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공무원 증원과 복지 관련 예산은 칼질이 예상된다.

하지만 시민사회단체가 주목하는 예산은 야당과 다르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 예산안에도 불필요한 개발시대의 예산이 많다고 지적한다. 반대로 저소득층과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예산은 부족하다는 평가다. 나라살림연구소,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등으로 구성된 나라예산네트워크가 꼽은 문제예산을 분석해봤다.

내년도 예산안에 보면 도드라지는 원자력 관련 예산들이 많다.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서 원자력 관련 기업과 대학, 출연연구소에 내놓는 출연금이 무려 621억원이나 된다. 전력산업기반기금이란 전기요금에서 3.7%를 떼서 적립하는 기금이다. 내가 내는 전기요금에서 조성한 이 돈 중 상당액이 원자력발전을 위해 우회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의미다.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을 때 원자력계는 “원자력발전의 기술수준은 세계 최고이며 여러 발전 중 가장 경제력 있다”고 주장했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연구위원은 “경제성 있는 발전이라면 창출되는 부가가치를 통해 기술개발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냐”며 “자체적으로 가격경쟁력과 기술경쟁력을 보유한 산업에 국가가 공적부담을 계속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출연금 621억원 전액 삭감이 요구된다.

429조원 규모의 2018년도 예산안 심사를 앞두고 국회 예산결산심사위원회 수석전문위원실 관계자가 예산안 검토 자료를 읽고 있다. / 김기남 기자

429조원 규모의 2018년도 예산안 심사를 앞두고 국회 예산결산심사위원회 수석전문위원실 관계자가 예산안 검토 자료를 읽고 있다. / 김기남 기자

밑빠진 독에 물붓는 공공기관 지원

내년도 전력산업기반기금 세입 예상치가 너무 낮게 잡혔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내년도 예상치는 3조7809억원으로 올해(4조1043억원)보다 3000억원 이상 적다. 내년도 전기사용량이 크게 줄어들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세입규모가 적게 잡힌 것은 기금이 과도하게 남으니 3.7%인 전기요금 적립금 비중을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을 피하기 위한 꼼수가 아니냐는 것이다.

정부는 내년 예산안에 석유공사에 대한 자본금 확충을 위해 164억원을 편성했다. ‘유전 개발사업 출자’ 명목이다. 석유공사가 어려움에 빠진 것은 이명박 정부 시절 이뤄진 대규모 투자사업들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석유공사의 부채비율은 2014년 221.3%에서 2016년 528.9%로 뛰었다. 석유공사가 100% 지분을 가지고 있는 영국 다나 사업의 경우 4조원이 넘는 돈을 들여 인수했지만 현재 손실액이 4조2000억원에 달한다. 해외 자원개발 사업의 청산 없이는 매년 혈세가 나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김용원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간사는 “문제 사업들에 대한 정밀감사와 조사를 통해 사업 진행과정의 문제점 등을 명확하게 밝혀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한석탄공사에 대한 출자 266억원도 문제예산에 포함됐다. 266억원은 석탄공사의 차입금(1조5000억원)에 대한 이자비용이다. 석탄공사가 자체적으로 돈을 벌지 못하다보니 정부가 이자비용을 예산으로 대납하고 있다. 석탄공사는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이후 진행된 지속적인 구조조정과 무연탄 최고판매가격 제도에 따른 원가보전 부족 등으로 만성적자에 빠져 있다. 나라예산네트워크 측은 “공사 해체를 포함한 전향적인 개선방안을 빨리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은 기술개발(R&D) 예산의 비중이 경쟁국가에 비해 매우 높다. 기술보국(技術報國)만이 국가 성장을 이끈다는 믿음이 40년간 계속됐다. R&D 예산에 토 달기 어려웠고 그러다보니 ‘묻지마 예산’이 많이 양산됐다. 2018년 예산안에 있는 ‘첨단융복합 콘텐츠기술 개발(R&D)’ 예산도 그런 성격이 짙다. 267억원이 편성된 첨단융복합 콘텐츠기술 개발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등의 기술을 게임·방송·교육산업에 결합하는 기술 개발이다. 하지만 이 사업과 유사한 사업이 이미 있다. ‘디지털콘텐츠 원천기술 개발사업’으로 올해 169억원이 편성돼 집행 중이다. ‘융복합 콘텐츠기술’과 ‘디지털콘텐츠 원천기술’이라는 용어가 달라 보이지만 실제로 두 사업 간 차별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두 사업은 정보통신기술진흥센터(IITP)가 수행하며 지원대상은 정부출연연구소, 대학, 기업, 정보통신 협회로 똑같다.

조만간 폐기될 공인인증서 사업에 10억원을 편성한 것도 논란이다. 전자서명 인증 예산은 ‘공인인증서비스 안정성 제고 및 신뢰성 있는 공인인증서 이용환경 조성’을 위해 편성되는 예산이다. 공인인증서를 폐지한다고 해놓고 이 같은 예산을 편성하면 ‘악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는 격이 된다.

시민단체가 꼽은 나쁜 예산안

긴급복지지원 등 복지는 목마르다

‘보건의료 빅데이터 플랫폼 구축사업’ 115억원도 전액 삭감해야 한다고 시민사회단체는 주장하고 있다. 이 사업은 보건의료 관련 정보를 국가 차원에서 연계해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국정감사에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민간 보험사와 민간 보험연구기관 등에 6420만명분의 성별·연령·진료행위·처방 의약품·원외처방 내역 등이 포함된 진료데이터를 돈을 받고 팔았다고 주장했다. 나라예산네트워크는 “개인정보 유출이 심각하지만 정부는 관련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며 “사업의 투명성과 신뢰성이 확보될 때까지 사업을 추진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정부가 재정건전성을 이유로 주저하면서 삭감된 일부 복지예산은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대표적인 예산이 긴급복지지원이다. 갑작스런 위기상황이 발생해 생계유지가 곤란한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이 사업은 예산이 1113억원으로 지난해(추경 기준 1213억원)보다 예산이 되레 줄었다. 예산이 적다보니 ‘위기상황’에 대한 기준이 깐깐하고 지원도 1개월에 그치고 있다. 긴급복지지원제도는 사회적 논란이 있을 때 잠시 늘었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때는 이듬해 예산이 260% 이상 증액되기도 했다. 나라예산네트워크는 “지난해 집행률이 100%인 상황에서 2018년 예산이 삭감 편성된 이유를 모르겠다”며 “예산심의과정에서 반드시 증액돼야 한다”고 말했다.

제자리 걸음 중인 노인학대 관련 예산도 증액이 필요하다. 내년도 노인보호 전문기관 관련 예산은 74억원으로 지난해(73억원)와 별 차이가 없다. 정부 예산지원이 부족하다보니 노인보호 전문기관들은 민간 후원금으로 버티고 있다.

임신하거나 출산한 청소년 한부모를 돕는 ‘청소년 한부모 아동양육 및 자립지원’ 사업 예산도 증액 요구가 크다. 당초 여성가족부는 32억원을 요구했지만 25억원만 잡혔다. 청소년 한부모가 아이를 낙태하거나 유기, 입양하기보다 직접 키울 수 있도록 지원이 확대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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