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 위기 돌파 카드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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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으로 돌아가 수비에 대한 상황별 교과서적인 지도가 필요하다. 공격은 그 다음 문제다. 전술 및 피지컬 코치 뿐만 아니라 수비분야의 외국인 코치 영입도 필요하다”

‘근조(謹弔), 한국축구 사망했다’, ‘문체부는 축협비리 조사하라.’

10월 15일 인천공항 입국장. ‘축구를 사랑하는 국민’(축사국) 회원 5명이 현수막을 들고 나타났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집행부 총사퇴 및 거스 히딩크 감독 영입 ▲신태용 감독과 김호곤 기술위원장 퇴진 ▲문체부의 축구협회 감사를 요구했다.

2018 러시아 월드컵 베이스캠프를 돌아보고 이날 귀국한 신태용 감독과 김호곤 기술위원장은 안전문제를 우려해 다른 게이트로 빠져나갔다. 많은 팬들은 인터넷을 통해 축구대표팀을 향해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월드컵 본선행 티켓까지 거머쥔 상황에서 이 정도 분위기일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상황을 타개해야 할까.

신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지난 9월 2018 러시아월드컵 최종예선 9·10차전에서 무득점으로 비기고 힘겹게 본선에 올랐다. 그런데 경기 후 헹가래로 자축했다. 팬들은 이 소식에 분노했다. 대표팀은 최근 유럽 원정 평가전 2연전에선 완패를 당했다. 지난 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와 평가전에서 2-4로 졌고, 11일 스위스에서는 모로코 1.5군에 1-3으로 무릎을 꿇었다. 축구팬들은 “졌지만 잘 싸웠다가 아니라, 졌지만 질 만했다” “월드컵에서 탈락한 네덜란드나 칠레에 출전권을 양보하라”고 비난했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10월 19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한국 축구의 위기에 대해 사과하는 내용을 담은 입장문을 발표한 뒤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10월 19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한국 축구의 위기에 대해 사과하는 내용을 담은 입장문을 발표한 뒤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축구협회의 연이은 헛발질에 ‘분노’

그라운드 밖에서의 ‘외풍’도 거셌다. 한국축구는 지난 9월부터 ‘히딩크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을 4강에 올려놓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 지난달 14일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축구를 위해 기여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자, 많은 축구팬들이 히딩크를 한국 감독으로 다시 데려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축구협회는 지난 6일에야 프랑스 칸에서 히딩크를 만났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기간에 방송해설을 하기로 되어 있어 공식적인 역할을 맡을 수 없다고 했다. 문제는 축구협회가 안이하게 늑장 대처했다는 점이다. 문화체육관광부 감사에서 드러난 축구협회 일부 임직원의 비위까지 겹쳤다.

지난 16일에는 한국축구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에서 사상 처음으로 중국에 추월당했다. 10월 FIFA 랭킹에서 한국은 11계단 떨어진 62위에 그쳤다. 중국(52위)보다 아래였다. 한국이 올해 8차례의 A매치에서 1승3무4패에 그친 탓이다.

한국은 12월 1일 러시아월드컵 조추첨에서 FIFA 랭킹에 따라 4번 포트가 확정됐다. 최악의 경우 포트 1의 독일, 포트 2의 스페인, 포트 3의 아프리카 강호와 한 조에 속할 수도 있다.

한국축구의 연이은 ‘헛발질’로 팬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한 현실에 대해 전문가들은 축구협회가 한국축구의 위기를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건축으로 치면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준공을 못한 상황에서 신태용 감독으로 시공자가 바뀌었는데 철학이 달라 엉망이 된 격이다. 건축주인 축구협회는 이를 방치했다”고 쓴소리를 했다. 1994년 미국월드컵 당시 대표팀을 이끈 김호 용인축구센터 총감독은 “정몽규 축구협회 회장이 뭘 많이 모르시는 것 같다. 현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아닌가. 주위에 예스맨이 너무 많다”며 “축구협회는 몇십 년째 군림하고 있다. 축구인을 존중하고 그들을 지원하려는 자세로 몸을 낮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팬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지난 19일 정몽규 회장이 뒤늦게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 회장은 “대표팀의 부진한 경기와 더불어 축구협회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고 있는 것에 대해 회장으로서 송구스럽다”고 사과했다. 아울러 신 감독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를 내비쳤고, 외국인 코치 영입 등 대표팀 지원 강화와 제도 개선을 약속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히딩크 논란’에 대해 “초기 대응을 명확히 못한 데 대한 지적을 겸허히 수용한다”면서도 “그러나 그것이 이번 사태의 본질을 덮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본질은 마지막 2경기에서 팬들의 기대에 못미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했다.

팬들의 비난 원인을 축구협회가 아닌 대표팀 경기력에서 찾았다. 알맹이 빠진 기자회견은 성난 팬심에 기름을 부었다. 한국축구가 낭떠러지로 추락할 위기인데도 책임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경기를 뛰는 대표팀 선수들도 비난을 피할 순 없다. 김환 JTBC 해설위원은 “냉정하게 선수들을 살펴보면 정신력은 둘째 치고 기술이 부족하다. 모로코와의 평가전은 어느 한 명에게도 앞서지 못하니 진 거다. 개인 기량이 부족하면 팀으로 이겨야 되는데, 지금 한국축구는 팀은 없고 개인만 있다”고 평가했다.

박문성 SBS 해설위원은 “일대 일 돌파가 안된다. 체력이 뛰어난 박지성, 터프한 김남일과 달리 요즘 선수들은 개성 없이 밋밋해졌다. 유소년 시절부터 개인보다 팀 성적을 중시하고 평균적인 선수만 찍어내는 환경 탓”이라고 말했다.

포기하지 않는 축구를 바라는 팬들

한국축구는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김호 감독은 “월드컵을 8개월 남긴 지금 감독을 교체하는 건 위험부담이 따른다. 그보다는 공격과 수비 전술을 가다듬을 수 있는 전문가를 ‘기술고문’ 형식으로 영입해 조직력을 끌어올리는 게 합리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 “신태용 감독은 비판을 수용하되 비판받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 짧은 시간에 뭘 새로 만들려고 하지 말고 공수에서 꼭 필요한 경기 운영법을 공유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가나다라, ABCD가 안 되는 팀이 무슨 ‘변형 스리백’, ‘포어 리베로’를 논한단 말인가”라며 “기본으로 돌아가 수비에 대한 상황별 교과서적인 지도가 필요하다. 공격은 그 다음 문제다. 전술 및 피지컬 코치뿐만 아니라 수비분야의 외국인 코치 영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문선 교수는 “해외파 선수들의 컨디션이 올라오지 못하면 국내파 의존도를 높이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많은 팬들은 지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축구를 바라고 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벨기에전에서 이임생이 머리에 피가 나도 붕대를 묶고 뛰던 모습, 2006년 독일월드컵 스위스전에서 패배한 뒤 이천수가 눈물을 쏟았던 모습에 팬들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2015년 호주 아시안컵 결승에선 0-1로 패색이 짙던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이 동점골을 터트린 뒤 관중석으로 몸을 던지며 “이길게요, 이길게요”라고 말한 장면도 팬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당시 대표팀은 준우승에 그쳤지만 귀국길에 ‘엿’ 대신 ‘꽃’을 받았다.

안정환 MBC 해설위원은 “2002년 월드컵 당시 우리는 스스로 부족한 걸 알았다. 선수는 프로팀에서 자신을 위해 뛰어야 한다. 하지만 대표팀에서는 자신이 아닌 나라를 위해 뛰어야 한다”며 “2002년 월드컵 당시 나는 경기 후 탈진해서 밥도 못 먹고 토하기도 했다. 국민이 대표선수들에게 그런 모습을 원하는 건 아닐까”라고 말했다.

신태용 감독은 “팬들이 실망하는 걸 이해한다. 월드컵에서 우리보다 못한 팀은 없다고 생각한다. 선수들에게 좀 더 ‘헝그리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표팀은 11월 9일과 14일 러시아월드컵 본선진출국 세르비아, 콜롬비아와 각각 평가전을 치른다. 한국축구는 들끓는 팬심을 되돌릴 수 있을까.

<박린 일간스포츠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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