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정원철씨-대성리 북한강이 선물한 ‘반야심경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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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전히 힘겹고 예술은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지만 대성리의 북한강은 그의 설움을 씻어주었다. 그 곳 바람소리를 모아 11곡의 곡을 쓰기까지 꼬박 8년이 걸렸다. 그의 음악은 대성리 북한강변의 선물이었다.

작곡가 정원철씨는 독학으로 음악을 배웠다. 음악을 시작한 지 30년 만에 치유음악 음반을 냈다. ‘치유음악 반야심경’ 그리고 ‘사랑에게 말하다’라는 음반이다. 음반 제작에는 8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악보의 행간에는 우여곡절과 절박한 고난이 박혀 있다.

그는 10대 후반을 밤무대 밴드가수로 일했다. 고등학생으로 가발을 쓰고 대구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다. 낮에는 평범한 학생으로 학교를 가고 밤이면 무대에 섰다. 정씨는 “노래도 독학으로 배웠다. 밴드를 했는데 선배들 눈에 들어서 노래를 불렀다. 무대에 선다는 것이 우쭐했고 약간의 수입도 있어서 그 세계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록밴드였지만 나이트클럽에서 원하는 대로 팝송과 대중음악도 불러야 했다. 발성과 창법, 악보를 보는 법도 어깨 너머로 배우고 익혔다. 그래도 그는 꽤나 인기 있는 가수였다고 한다.

독학으로 작곡을 배워 게임, 드라마, 영화 음악감독을 맡았다.

독학으로 작곡을 배워 게임, 드라마, 영화 음악감독을 맡았다.

독학으로 음악 시작한 지 30년 만에

그는 군대를 가면서 밴드활동을 접었지만 평생 노래하며 살 줄 알았다. 제대를 하고서도 음악을 계속했다.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길이었다. 제법 인기를 얻고 있던 터라 따르던 팬과 눈이 맞았다. 그는 “결혼을 약속했는데 큰 장애가 나타났다. 처가에서 음악하는 사람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음악해서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자연히 음악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는 사랑을 좇아 음악을 배신했다.

생계를 위해 사업을 시작했는데 특유의 친화력으로 한동안 거침없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의 무대 경험이 사업상 사람을 대하는 일에 힘이 됐다고 한다. 그는 “전기공사 업체를 운영했다. 당시 건축 붐도 있었고 영업도 잘 됐다. 무대에 섰던 것을 알아보고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고 회상했다. 돈을 벌어 어느 사이 집도 사고 안정된 가정을 꾸리면서 적당히 자리 잡은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음악의 유혹은 소리 없이 다가와서 꼼짝할 수 없이 그를 사로잡았다. 큰 변화 없던 날들은 정씨에게 망상을 부추겼다. 그는 “우연히 어느 작곡가를 만나게 됐다. 대학가요제로 이름이 알려진 가수의 형이었다. 그로부터 곡을 주겠다는 제안을 들었다. 제대로 된 노래로 다시 세상에 나서고 싶은 꿈이 생겼다. 당시에는 거금인 2500만원을 선뜻 넘겨줬다”고 한다. 그 작곡가가 돈을 다 써버리는 데는 딱 일주일이 걸렸다. 돈은커녕 노래 한 곡도 받을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황당한 경험은 무모한 결정을 하게 만든다. 그는 한마디로 눈이 뒤집혔다. 돈을 받겠다고 사업도 팽개치고 서울로 왔다. 작곡가의 집 옆동네에 방을 얻고 매일 드나들며 채근했지만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다.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돈을 못 받으면 곡이라도 받으려 했는데 성과가 없었다. 그는 내가 그때까지 만났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매일 그 집을 찾아가 앉아 있었지만 작곡하는 시늉만 할 뿐 성과는 없었다.” 정씨는 안개 속으로 난 길로 하염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어쩌면 그때 돌아서 나왔다면 성공한 사업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씨는 자신이 몰랐던 재능을 지닌 스스로의 모습에 눈을 뜨게 된다. 돈 떼먹은 작곡가의 방 한편에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기타를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코드를 잡으면서 즉흥곡을 연주했다. 그때 놀러왔던 모 방송국 음악감독의 말이 그를 불태웠다. 정씨는 “당시 음악감독이 내 곡을 듣더니 ‘너의 곡이 훨씬 더 좋다’고 평가했다. 가만히 생각하니 작곡이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떠오르는 악상대로 악보에 옮기기만 하면 될 것처럼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악상이 떠오르면 허밍으로 곡을 만들어 악보에 기록한다.

악상이 떠오르면 허밍으로 곡을 만들어 악보에 기록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철없는 낭만주의자

그때부터 정씨는 작곡에 빠져들었다. 막히는 것이 있으면 책을 읽거나 주변의 작곡가들에게 물었다. 곡을 만드는 세계는 악보를 보고 노래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음표를 그리는 흉내라도 내게 됐을 때 주변 사람들도 그의 재능을 달리 평가하기 시작했다. 정씨는 “전기공사 일과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다시 음악인들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음악을 듣고 배웠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지만 음악이 없는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단란했던 가족과의 인연도 멀어져갔다. 음악의 유령들이 그를 이끌어 산 사람들의 세상과는 다른 곳에 내려놓았다.

정원철씨는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곡을 쓰고 자신의 음악세계를 만들었다. 작곡용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우고 미디로 연주곡을 들으며 곡을 써갔다. 음악이 필요한 분야가 있으면 그의 곡을 써달라고 제안했다. 게임과 웹드라마에 정씨의 음악이 실렸다. 소소한 수확이 있었다. 단편영화와 예술영화, 다큐멘터리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다. 정원철씨는 “정말 열심히 작업했다. 영상과 나의 음악이 만나 영화에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경험도 했다. 특히 고 구성주 감독과 함께 작업한 영화 <모크샤>(2012)는 영상만큼 음악의 힘이 크게 평가 받았다. 해외에서도 음악에 대한 평가가 높았다. 내가 가는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예술만으로 먹고살기엔 그의 경력도 배경도 음악도 힘이 없었다. 그의 음악은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작곡은 그에게 먹을거리를 주지 못했다. 가족에겐 능력 없는 가장이 돼버렸다. 옛 친구들에게 그는 철없는 낭만주의자로 알려졌다. 도시는 그를 밀어냈다. “서울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각종 고지서와 싸우며 살 수 있는 경제능력도 없고 열심히 일한다고 먹고 살 만한 음악작업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일은 해도 소득이 없었다. 혼자만의 벽 속에 갇혀 길을 잃고 말았다.” 정씨에게 한없이 가혹한 시절이 닥쳤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숙제였다. 그러다 경춘선을 타고 우연히 내린 대성리 북한강가에 자리를 잡은 것이 13년 전의 일이다.

강과 가까운 산자락에 깃들어 살자 친구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세상에 지친 사람들, 그와 같이 예술의 고갯길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정씨는 “서울에 살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1년에 닭만 100여 마리를 잡는다. 그러다보니 닭백숙의 달인이 됐다. 산에서 옻나무를 가져다가 황칠나무와 함께 끓이면 일품이다. 나를 만나기보다 닭을 먹기 위해 이곳을 찾는 이들이 더 많다”며 웃는다.

삶은 여전히 힘겹고 예술은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지만 대성리의 북한강은 그의 설움을 씻어주었다. “흘러가는 물을 보면서 마음속 울분이 많이 나았다. 내가 가족에게 못한 일이 떠올랐다. 세상이 내게 준 상처보다 내가 세상에 돌려줘야 할 음악을 더 생각하게 됐다. 친구들이 오지 않는 날이면 강변 길을 몇 시간이고 걸어다녔다.” 주머니 가득 땅콩을 채우고 소주 한 병을 들고 나가 강을 걷다가 한 잔을 마시고 또 걸었다고 한다. 길섶에 술병을 두고 다음날 지나쳐가다 또 한 잔을 마시며 걸었다. 그때 그를 사로잡았던 악상들이 있었다.

정씨는 “누구나 상처를 받는다. 또 남에게 상처를 준다. 겉은 멀쩡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상처를 입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흐르는 강물은 나를 위로했다. 강과 바람이 들려준 노래를 마음속에 담고 기억했다. 그 음악이 사람들을 위안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바람 소리를 노래하고 강의 출렁임을 기록했다. 한 소절을 콧노래로 흉내 내고 집에 오면 악보에 담았다. 그렇게 바람소리를 모아 11곡의 곡을 쓰기까지 꼬박 8년이 걸렸다. 그의 음악은 대성리 북한강변의 선물이었다.

8년의 작업기간이 걸린 치유음악 음반 반야심경.

8년의 작업기간이 걸린 치유음악 음반 반야심경.

청도 운문사 비구니들의 염불소리

정원철씨의 고향은 경북 청도. 운문사 자락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오가며 운문사 비구니들의 염불소리를 듣고 자랐다. 농사를 짓던 그의 아버지는 한가할 때면 염불을 흉내 내곤 했다. 정씨는 “아버지가 녹음기로 독경소리를 틀어놓고 따라하셨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중에서 반야심경이 가장 마음에 들어왔던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의식 한편에서 그런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가 낸 음반 속 11곡의 곡 중에 6곡이 불교경전 반야심경을 주제로 삼은 데는 그런 배경이 있다.

그는 자신의 곡에 대해 바이올린과 플루트로 지혜의 세계를 그려내고, 어린이들의 합창으로 화해와 평화를 노래한다고 했다. 월츠도 있고 가야금과 첼로 연주도 들어 있다. 음반의 제목은 반야심경이지만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은 갈등의 화합과 치유이다. 반야의 지혜란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 또한 영원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 종교의 경전을 넘어 집착 없이 자유로운 지혜의 세계를 그린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음악을 만들고 음반작업을 하면서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아물었다. 음반을 듣고 있으면 고요해지고 평안해진다. 특히 반야심경의 만트라 부분은 레 미 파 3개의 음계만을 썼다. 강물과 바람 소리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씻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세파 속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듣기를 권했다.

정씨는 “음반의 두 번째 파트 5곡은 ‘사랑에게 말하다’라는 주제이다. 지혜가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교만해지는 것이 인간이다. 지혜가 마음이라면 사랑은 몸이다. 머리로 지혜를 깨달으면 몸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은 헛될 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음반에 사랑과 지혜를 바탕으로 세상 모든 상처를 씻어내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고 했다.

그런 거창한 뜻을 담지 않아도, 이 음반은 그가 상처를 남긴 가족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북한강을 퍼올려 곡을 쓰고 대성리의 바람 소리를 담아서 노래를 만든 뜻은 음악이 자신의 고통을 위로하고 세상의 고난을 위안하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험한 세상에 음악을 만들면서 어떻게 먹고 사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그냥 산다”고 했다. 그냥 살 수 있다면 그대로 삶의 고수이다. 독학으로 들어선 작곡의 길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그의 음악이 그에게 명성과 돈을 주지 않더라도, 갈등의 세상에 치유의 노래를 들려주리라는 그의 바람은 분명하다. 귀 기울여 노래를 들을 누군가에게 그의 음악은 가장 귀한 선물이 될 것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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