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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게시판 ‘좋아요’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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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만 증폭되는 ‘댓글’ 소통엔 약점… 진지함 대신 장난과 놀이로 전락 우려

국회가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킨 9월 11일 청와대 국민소통광장 청원게시판에는 자유한국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을 청구하는 청원이 올라왔다. 이 청원은 단번에 1만명 넘는 동의를 받았다. 서명에 참여한 박모씨(32)는 “너네 짜증난다. 엿 먹어 봐라’는 심정으로 서명했다”고 말했다. ‘조롱’으로서의 서명이었다. ‘클릭’ 한 방에는 시민의 의사표현과 정치참여, 가볍고 즐거운 놀이라는 요소가 뒤섞여 있었다. 소년법 폐지, 여성 징병제 실시,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 반대, 보육료 인상,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 교체 등의 청원들은 이 같은 클릭으로 만든 것이다.

‘클릭’ 한 번으로 의사표현과 정치참여

문재인 정부가 취임 100일을 맞아 청와대 사이트를 개편하면서 마련한 청원게시판이 한국 사회의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 공간으로 거듭날 조짐을 보인다. 청와대가 온라인 공간을 여론수렴의 장으로 활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미국의 백악관이나 영국 의회에도 청원게시판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온라인 게시판이 있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국민참여마당’이 있었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청원사이트는 외국의 사이트는 물론 과거 참여정부 시절의 사이트와 비교해도 색다르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댓글’이다. 서명에 동참하면 댓글을 작성할 수 있다. 국민참여광장이나 백악관 청원사이트에는 ‘댓글’이 없다. 네이버, 다음, 페이스북 등의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할 수 있다. 서명인 숫자가 많은 ‘베스트 청원’을 따로 모아 볼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청원게시판과 별도로 토론광장이 있다. 청와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추천을 받고 국정 현안으로 분류된 청원에 대해 가장 책임 있는 정부 및 청와대 당국자(장관, 대통령 수석비서관 등)의 답변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다음 아고라 청원게시판 형식에 네이버 웹툰의 ‘베스트 도전 리그 게시판’, 오늘의 유머 등 커뮤니티 사이트의 ‘추천’ 기능을 모두 모아놓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포털의 형태를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청와대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은 네이버 부사장이었고, 국민소통수석실 소속 정혜승 뉴미디어비서관은 다음카카오 부사장이었다.

청와대 국민소토광장 청원게시판 화면 갈무리.

청와대 국민소토광장 청원게시판 화면 갈무리.

형식의 차이는 철학의 차이를 반영한다. 현 정부의 청와대 사이트는 ‘국민소통 플랫폼’을 표방한다. ‘소통’과 ‘참여’가 게시판의 형식을 갈랐다. ‘국민참여마당’ 설계와 운영에 참여한 민경배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참여정부 시절에도 시민들의 일상사에서의 불만이나 정책적 제안사항을 수렴하겠다는 취지에서 사이트를 운영했지만, 요구사항을 무조건 가장 높은 곳(청와대)에 가서 이야기하겠다는 발상과 이를 통해 해결되는 것이 법치주의 국가에서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라는 고민이 있었다”고 말했다. 민 교수는 “참여정부에서는 내용을 분류해 정책적 이슈와 상관 없는 내용들이다 싶으면 청와대 실무단에서 작성자에게 피드백(반응)을 해주고, 정책적으로 유의미한 내용들은 어느 부서 소관이며, 어떤 절차를 따라 해당 부처로 넘어가서 처리할지에 대한 지침을 분명히 갖고 사이트 운영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즉, ‘참여’의 경우 시민과 정부 사이에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공간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댓글’이 필요 없으며, 정부의 어떤 부서가 일처리를 하는지가 중요했다. 반면 ‘소통’은 정부와 시민 간의 소통뿐 아니라 시민과 시민 사이의 소통도 포함한다. 현재의 청와대 게시판에 청원 공간과 별도로 토론 공간이 있고 댓글도 있어야 하는 이유다. 즉, ‘시민 간의 수평적 소통’을 ‘청와대’라는 공간에서 벌인다는 점이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 김낙호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언론학과 교수는 이를 두고 “정치 효능감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설명했다. ‘청원만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란 냉소와 허무감을 극복하고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할 유인동기를 만든 것이다.

아무리 정부가 탈권위주의를 표방하더라도 청와대는 권력의 공간이다. 시민들이 청와대에서 수평적 의사소통을 하는 것에 문제는 없을까. 의사소통은 원활하게 이뤄질까. 15일 정오 기준 청와대 베스트청원 1위 게시물은 ‘청소년 보호법 폐지’(26만9986명)이다. 유해환경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자는 취지의 ‘청소년보호법’과 미성년자의 민·형사상 책임을 규정한 ‘소년법’을 혼동해 잘못 올린 청원이다. 3위는 청소년보호법을 ‘소년법’으로 정정한 같은 내용의 청원으로 12만77명이 청원한 상태다. 문재인 대통령은 11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소년법 폐지라는 말로 시작이 됐지만 사실 바라는 것은 학교폭력을 근절하는 방안을 마련해달라는 것이어서 소년법 개정 말고도 학교폭력 대책들을 함께 폭넓게 논의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혀 논쟁은 일단락됐다. 법안의 이름을 혼동하는 등 비합리적 형태로 청원이 올라왔지만 밑바닥에 깔린 심리를 대통령이 읽어낸 것이다. 박상기 법무장관이 앞서 6일 소년법 개정을 검토하겠지만 폐지는 불가하다고 밝힌 뒤에도 논쟁은 계속됐었다.

게시판에는 온통 찬성댓글 일색

‘댓글’ 시스템은 현 정부 청와대 사이트 운용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인 동시에 가장 불안한 요소로도 꼽힌다. 온라인 게시판의 특성상 온갖 정제되지 않은 의견들이 나름의 절박함을 담아 올라온다. 지난해 7월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에는 미국 흑인 인권운동 단체인 ‘블랙 라이브스 매터’(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를 테러 단체로 지정하라는 청원이 2주 만에 14만명의 서명을 받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불가하다’고 답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백악관 홈페이지에는 댓글이 없다. 청와대 청원은 서명에 동의해야 댓글을 달 수 있도록 돼 있다. 즉, 청원에 관한 모든 댓글은 찬성 댓글이다.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 반대’ 이슈는 논쟁이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현직 교사와 임용고시 준비생들을 중심으로 ‘절대 불가’라는 의견이 조직화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비판도 있다. 임용시험을 거치지 않고 교원을 임용하도록 돼 있는 사립학교의 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청와대 청원게시판에서는 온통 찬성 댓글 일색이다. 이런 논쟁의 결이 드러나지 않고 권력의 정점으로 향한다.

김낙호 교수는 “청와대 게시판에 청원을 올리면 이견이 있을 수 없는 만장일치의 사안인 것처럼 포장이 된다. 토론방이 존재하지만 청원과 자동적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라면서 청원게시판은 “찬반토론의 디테일을 상실한 증폭된 자기 긍정의 판이 돼버린다”고 말했다. ‘소통’을 표방하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 점은 시민뿐 아니라 청와대에도 약점이다. 누가, 어떤 세력이 청원을 올렸으며, 어떤 찬반양론이 있는지 심도 있게 논의할 기회를 없애는 것이다. 김 교수는 “현재 청와대 청원은 직접적인 효능감은 높지만, 시민들에게 찬반 요인 검토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등의 세부적 토론과 합의를 건너뛰도록 쉽게 유도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입법부와 지역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 시민들이 청원에 열광하는 이유라고 보면서도 “청와대의 이미지 권력만 강화되고 실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도로 정치혐오가 꽃피울 수 있다”고 말했다. 복잡한 사회문제들이 ‘클릭 한 방’과 ‘대통령의 말씀’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오해를 유도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문 대통령이 11일 회의에서 “국방의 의무를 남녀가 함께하게 해달라는 청원도 재밌는 이슈 같다”고 말하자 참석자들이 웃음을 터뜨린 것으로 전해졌다. ‘여성징병제’ 청원의 경우 남성이 국방의 의무를 하는 만큼 여성들은 취업에서 공식 불이익을 받거나 징병제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서 문 대통령이 “요즘은 육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수석졸업자들이 거의 해마다 여성들”이라고 말하자, 주영훈 경호처장이 “경호처에서도 여성 채용 비율을 높이려 하고 있다. 이번에는 여성을 우선 선발하려 계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밌는 이슈’로 표현해 갈등을 최대한 억누르려는 모습이다. 친박단체에서는 이 청원이 문 대통령 지지자를 분열시킬 기회라며 조직적 성원을 독려하기도 했다.

갈등 부각시키는 보도 개선 필요

청원게시판이 청와대판 ‘파맛첵스 사건’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있다. ‘파맛첵스 사건’이란 2004년 식품회사 켈로그에서 홍보를 위해 자사의 시리얼 차기 신제품으로 ‘초콜릿 맛’과 ‘파맛’ 간의 온라인 투표를 실시했는데, 네티즌의 장난으로 ‘파맛’이 승리한 일이다. 민경배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지금 청와대 청원게시판의 가장 큰 특징은 포털의 정서를 반영한 난장의 형태라는 것인데, 이 난장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장난과 놀이들은 청와대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특정 연예인에 대한 공격과 비방이 게시판에 오르고 높은 추천 수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청와대 게시판은 어떻게 운영해야 할까. 박상훈 정치발전소학교장은 “참고는 할 수 있지만 청원게시판에 올라오는 의견들에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온라인 청원을 통한 의견 표출을 ‘직접민주주의’라고 독려하는 것이 대표적으로 ‘잘못된 권위’를 부여하는 일이다. 직접민주주의란 시민이 공직을 맡는 것이지, 시민이 정부와 직접 소통하는 일이 아니라고 그는 설명했다. 개개인들의 의견이 찬반을 토론하고, 근거들을 검토하는 과정을 통하지 않고 날것으로 권력기관에 전달되면 소통의 장은 ‘열정 있는 소수’만이 장악하게 된다. 인터넷 커뮤니티가 인기를 잃는 과정도 대부분 이 경로를 밟는다.

민경배 교수는 “청원게시판에 올라오는 의견들을 유형별로 분류해 ‘법·제도 개선과 관련한 것’, ‘이해관계의 충돌 문제’, ‘예산 부족으로 생기는 문제’ 등으로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식에 따라 나누고 해결하는 과정에 대한 로드맵을 작성하면 게시판에 올라오는 내용들을 정책 측면에서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개별 부처나 지방정부 등이 해결할 문제가 있으면 해당 기관으로 넘겨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낙호 교수는 청원게시판의 플랫폼 개선을 주문했다. 댓글 기능을 없애고, 청원을 해당 주제의 토론게시판으로 연동시키며, 관련한 데이터 등 근거자료까지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청원 내용을 보도하는 언론의 방식에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지금의 보도양식은 ‘이런 청원이 화제’라고 던져놓는 방식으로 갈등만 최대한 부각시킨다”며 “청원으로 부각된 이슈에 대한 차분한 근거들을 내놓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금 더 재미없는 플랫폼이 되라는 주문이다. 대신 잃는 것은 재미요 얻는 것은 책임이다. 더 나아가면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를 대통령에게 읍소하는 형태에 맡기지 않겠다는 시민 개개인의 책임감이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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