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검은 코끼리’의 동시다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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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기후변화는 ‘검은 코끼리(black elephant)’라고 말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충격적인 결과를 나타내는 ‘블랙 스완’(black swan)과 모두가 알고는 있으나 애써 무시하는 문제(elephant in the room)라는 의미의 ‘코끼리’를 합친 말이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동부에 위치한 소도시 시더 베이유에 닷새간 내린 폭우의 규모는 1318㎜. 휴스턴의 연평균 강수량(1270㎜)을 넘는 엄청난 빗줄기였다.

허리케인 ‘하비(Harvey)’가 8월 25일 밤(현지시간) 텍사스 연안에 상륙하면서 휴스턴 일대에 미 역사상 가장 많은 비가 쏟아졌다. 주택 4만채가 침수되거나 파손됐고 3만20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30여명은 목숨을 잃었다. 12년 만에 가장 강력했던 허리케인의 파괴력을 두고 인간이 부른 기후변화가 ‘기름’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허리케인과 기후변화 사이의 인과관계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연관성은 커졌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허리케인이 발생하는 횟수가 늘어나지는 않아도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로 그 위력이 커졌다는 것이다. 바다의 온도가 높아지면 물이 가진 에너지도 그만큼 상승해 폭풍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대기 중에 습기가 많을수록 비의 양과 강도도 커진다.

8월 25일 허리케인 ‘하비’가 강타한 휴스턴 시내가 물에 잠겨 있다. 휴스턴 일대엔 닷새간 1300㎜가 넘는 폭우가 내려 3만2000명이 이재민이 됐고 30여명은 목숨을 잃었다. /휴스턴 | AFP연합뉴스

8월 25일 허리케인 ‘하비’가 강타한 휴스턴 시내가 물에 잠겨 있다. 휴스턴 일대엔 닷새간 1300㎜가 넘는 폭우가 내려 3만2000명이 이재민이 됐고 30여명은 목숨을 잃었다. /휴스턴 | AFP연합뉴스

육지로 올수록 위력 커진 허리케인

실제로 하비는 육지에 닿을 때까지 위력이 점점 커졌다. 앞서 미 국립 허리케인센터는 하비가 2005년 10월 허리케인 ‘윌마’ 이후 12년 만에 본토로 곧장 상륙하는 ‘카테고리 3등급’의 허리케인이라고 예보한 바 있다. 문제는 하비가 발생한 멕시코만의 올해 해수면 온도가 예년보다 0.5도 이상 높아졌다는 점이다. 바다표면이 0.5도 더워질 때마다 대기의 습기량은 3%가 증가한다. 이에 따라 열대성 저기압이었던 하비는 텍사스 연안을 통과하며 48시간 만에 ‘카테고리 4등급’의 허리케인으로 변했다고 미 시사종합지 <애틀랜틱>이 보도했다. 지난 100년간 이미 해수면이 20cm 상승한 점도 허리케인이 더 많은 에너지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미 국립 대기연구소의 케빈 트렌버스는 “이것이 바로 폭풍의 주연료”라며 “폭풍은 자연적으로 발생하지만, 상승한 열에너지가 더 크고 강력하며, 더 오랫동안 (세력을) 지속하는 허리케인을 만든다. 또 더 많은 양의 폭우도 동반하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 허리케인이 보통 육지에 접근하면서 세력이 약화되는 것과 달리 하비는 상륙할 때까지 계속 세력이 커졌다. 텍사스 연안을 강타하기 몇 시간 전 4등급으로 격상됐다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지난 30년간 육지 상륙 전 12시간 동안 세력이 강화된 허리케인은 없었다. 일부 과학자들은 하비가 고기압 전선 사이에 껴 정체됐던 점 역시 북극해 해빙이 영향을 줬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허리케인 ‘하비’가 미국 텍사스주를 강타한 8월 27일 디킨슨의 라비타벨라 양로원 거실에 물이 차 노인들의 몸이 가슴팍까지 잠겨 있다. /팀 매킨토시 트위터

허리케인 ‘하비’가 미국 텍사스주를 강타한 8월 27일 디킨슨의 라비타벨라 양로원 거실에 물이 차 노인들의 몸이 가슴팍까지 잠겨 있다. /팀 매킨토시 트위터

인도·네팔·방글라데시 강타한 물폭탄

휴스턴 일간 <휴스턴크로니클> 편집장 버논 뢰브는 “휴스턴의 홍수가 기후변화와 맞서 싸우는 전환점이 돼야 한다”는 내용의 기고를 <워싱턴포스트>에 실었다. 800년 만의 대홍수라는 이번 재해가 “온난화로 인한 극단적 기후현상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확인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정치인들은 부인하지만 기온은 계속 오르고 빙하는 녹고 있다”며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자들의 주장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위스콘신대 매디슨캠퍼스의 우주과학공학연구소는 21세기 후반이면 허리케인 바람 세기의 증가 속도가 지금보다 10~20배 더 빨라질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뢰브의 주장은 “기후변화는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공화당을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지난 6월 전 세계 국가들의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약속한 파리 기후변화협정의 탈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극단적 날씨로 인한 재앙은 이미 세계적 현상이다. 하비가 미국을 강타하던 시각 남아시아에선 지난 8월부터 시작된 몬순이 홍수를 부르면서 1200명 이상이 사망하고 400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인도 서부 뭄바이에서는 8월 29일 하루에만 300㎜가 넘는 폭우가 쏟아져 주택이 무너지고 도로가 침수돼 열차·항공 운항이 중단됐다고 현지 NDTV 등이 보도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물이 1.5m 높이까지 차올랐으며 학교는 물론 병원도 문을 닫았다. 네팔에서는 이번 폭우로 800만명 이상이 집을 잃었고, 방글라데시는 전체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특히 히말라야 산맥이 지나가는 이들 국가에선 산사태가 도로와 전기를 끊어 피해를 키운 것으로 보인다. 적신월사연맹(IFRC)의 프랜시스 마커스 대변인은 “남아시아는 몇 년간 심각한 홍수를 겪고 있다”며 “미국의 상황 때문에 도움이 절실한 남아시아인들이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시에라리온 역시 예년에 비해 3배가 넘는 비가 내리면서 8월 13일 수도 프리타운 외곽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1000명 이상이 숨졌다. 이번 폭우도 사하라사막의 기온 상승이 원인이라는 시각이 많다. 스위스 알프스 마을인 그라우뷘덴주 본다스카 계곡에서는 8월 23일 해발 3300m가 넘는 봉우리에서 400만 톤에 달하는 바위와 토사가 쏟아져 내렸는데 이 역시 온난화가 ‘원흉’으로 지목된다. 1864년 공식 관측이 시작된 이후 스위스의 기온은 평균 2도가량 상승했다. 온난화는 빙하와 동토층 해빙을 가속화시킨다. 스위스연방 산림눈경관연구소의 마르시아 필립스는 “동토층은 영하 1.5도 이하에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지만 이보다 높은 온도에 노출되면 암석과 얼음 사이의 결합에 문제가 생긴다”며 “이번처럼 대규모는 아니라도 앞으로 작은 규모의 산사태는 더 자주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생트로페 해변의 휴양객들이 7월 건너편 숲에서 치솟아 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다. 남부 지중해 연안에서는 하루 동안 발생한 산불로 임야 1500㎡가 소실됐다./AFP연합뉴스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생트로페 해변의 휴양객들이 7월 건너편 숲에서 치솟아 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다. 남부 지중해 연안에서는 하루 동안 발생한 산불로 임야 1500㎡가 소실됐다./AFP연합뉴스

올 여름 유럽 폭염과 가뭄에 시달려

올 여름에는 유독 궂은 날씨로 몸살을 겪는 도시들이 많았다. 프랑스는 남쪽 니스 인근과 코르시카섬의 7월 낮 최고기온이 37~38도였고,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도 40도를 넘었다. 폭염에 시달린 유럽에선 포르투갈 레이히아주 등지에서 대규모 산불이 일어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냈다. 이탈리아는 로마의 6월 강수량이 전년 대비 74% 줄어든 데 이어 7월에도 비가 예년보다 72%나 적게 내렸다. 기록적인 가뭄으로 교황은 바티칸의 분수 100개를 모두 잠그기도 했다. 일본과 중국도 6월부터 폭우에 시달린 가운데 지구 반대편 칠레에는 눈폭탄이 내렸다. 수도 산티아고는 적설량이 40cm에 육박해 46년 만에 최대 폭설을 기록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신간 <늦어서 고마워>를 통해 기후변화는 ‘검은 코끼리(black elephant)’라고 말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충격적인 결과를 나타내는 ‘블랙 스완’(black swan)과 모두가 알고는 있으나 애써 무시하는 문제(elephant in the room)라는 의미의 ‘코끼리’를 합친 말이다. 트렌버스는 프리드먼의 말을 빌려 “(기후변화가 초래한) 허리케인 하비는 마주하길 원하든 원치 않든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아프리카와 중동, 남극과 마찬가지로 미국에도 ‘검은 코끼리’가 있다”며 기후변화와 싸울 것을 촉구했다.

<김보미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bomi8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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