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로지 문학’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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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꼭 혼자서 써야 하는가? 아니다. 지난 8월 15일에 출간된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를 보라. 듀나·김보영·배명훈·장강명 등 작가 4명이 우주 행성을 배경으로 함께 중편소설을 썼다.

떼거리로 하는 문학. 문학의 새로운 장르가 생겼다. 바로 ‘앤솔로지(Anthorogy) 문학’이다. 앤솔로지는 고대 그리스어의 안솔로기아(anthologia·꽃을 모아놓은 것)에서 유래한 용어로, 시나 소설 등 문학작품을 하나의 작품집으로 모으는 것을 뜻한다. 기존에 앤솔로지 문학은 ‘선집(選集)’으로 분류됐다. 출판사들이 신춘문예, 문학상 수상집 등 상을 받은 작품들을 모아 책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테마 앤솔로지, 즉 주제나 배경을 정해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출판하는 게 추세다. 지난 8월 15일에 출간된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한겨레 출판)도 듀나·김보영·배명훈·장강명 등 작가 4명이 우주 행성을 배경으로 중편소설을 썼다. 이밖에 서울 명동과 제주에 있는 프린스 호텔을 배경으로 8명의 작가가 각각 소설을 쓴 <호텔 프린스>(은행나무), 슈퍼히어로를 주제로 9명의 작가가 쓴 단편을 모은 <이웃집 슈퍼히어로>(황금가지) 등이 있다.

김보영 작가, 배명훈 작가, 듀나 작가, 장강명 작가 / 경향신문 제공

김보영 작가, 배명훈 작가, 듀나 작가, 장강명 작가 / 경향신문 제공

<호텔 프린스>와 <이웃집 슈퍼히어로>도

해외에서도 15명의 작가가 페미니즘을 주제로 쓴 SF소설 <혁명하는 여자들(원제 SISTERS REVOULTION)>(아작), 뉴욕을 배경으로 17명의 작가가 쓴 추리소설 <뉴욕 미스터리(원제 New York Mysteries)>(북로드) 등이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SF 장인’이라 불리는 미국 소설가 스티븐 킹도 공동으로 작품을 썼다. 동료 작가 스튜어트 오넌과 야구 논픽션 <군중 속의 얼굴(원제 A face in the crowd)>을 썼고, 아들 조 힐과 호러소설인 <스로틀(원제 Throttle)>을 집필했다. 앤솔로지 문학작가들은 집필 기간 동안 다른 작가의 작품에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그저 같은 주제와 배경으로 작품을 써서 마감한다.

앤솔로지 문학은 자체적으로 문예지를 생산하지 않거나 문학팀이 없는 신진 문학 출판사에서 주로 기획한다. 창비가 지난해 학교를 주제로 9명의 소설가가 쓴 <다행히 졸업>을 출판했지만, 문학팀에서 기획한 것이 아니었다. 앤솔로지 문학을 출간해본 ‘황금가지’ ‘한겨레 출판’ ‘별숲’ 같은 출판사의 경우 자체적으로 문예지를 출판하지 않는다. 출판사 ‘은행나무’의 경우 〈Axt〉라는 문예지가 있지만, 출간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다.

신진 출판사가 앤솔로지 문학을 기획하면 작가에게는 지면이라는 하나의 기회의 창이 열리는 것이고, 신진 출판사는 원고 청탁으로 ‘작가의 풀’을 넓힐 수 있다. 자체적으로 문예지를 출간하는 출판사의 경우 작가에게 지속적으로 단편소설 연재를 부탁할 수 있다. 하지만 신진 문학 출판사들은 이런 환경을 조성할 수 없다. 대개 작가들은 문예지에 기고한 단편들을 모아 장편소설을 출간하기에 문단 내에서 명성을 쌓은 작가들은 ‘창비’, ‘문학동네’, ‘민음사’같은 대형 출판사를 선호한다. 이와 같은 출판사는 소수이기에, 작가들 입장에서는 기회의 문이 좁다. 문예지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할 수 있는 기회도 작품을 많이 출판한 작가에게 먼저 주어진다. 신예 작가는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표지. / 한겨레 출판 제공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표지. / 한겨레 출판 제공

하지만 앤솔로지 문학은 이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하나의 장이 되고 있다. 기획에 따라 다르지만 앤솔로지 문학은 여러 작가가 참여하기에 젊은 작가들에게도 지면이 주어진다. 팬층이 두꺼운 기성작가들도 앤솔로지 문학에 작가나 기획자로 참여하기에, 일정 독자들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젊은 작가에게도 독자들을 확보할 기회의 장이 되는 것이다. 장강명 소설가는 “잡지를 만들지 않는 출판사의 경우 앤솔로지 문학을 하나의 돌파구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젊은 작가에게도 앤솔로지 문학이 하나의 기회가 된다. 일종의 상생하는 구조가 생기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출판사와 젊은 작가, 일종의 상생 구조

대다수 문학가들은 ‘떼거리’로 문학을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김유동 강원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근대에 들어) 파트롱(작가의 후원자)으로부터 작가들의 후원이 끊기면서, 작가들이 독자적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작가 스스로 독자적인 정체성을 만들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는 문단과 교류하는 것이 소설 쓰는 데 방해가 된다며 도쿄를 떠나 나가노현에 있는 산골로 들어가기도 했다. 지난 8월 8일 국내의 한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겐지는 “문학은 인간의 본질을 묻고, 세계와 일대 일로 대결하는 예술이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해외나 국내 고전 작품집을 보더라도 문학은 혼자 하는 예술이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독일의 헤르만 헤세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 작가들은 대부분 혼자서 글을 썼다. 대다수의 작가들은 다른 작가와 협업해서 작품을 쓰지 않는다. 노벨 문학상, 퓰리처 상, 카프카 상 같은 해외 문학상이나 김수영 문학상, 이상 문학상 같은 국내 문학상 수상작 중에도 앤솔로지 문학은 없다. 앤솔로지 문학은 문학계에서 비주류 문학이다.

아직까지 앤솔로지 문학은 문단에서 호평을 받는 장르는 아니다. 그럼에도 앤솔로지가 가진 잠재력은 크다. 작가들 입장에서 앤솔로지 문학이 일종의 도전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 앤솔로지 문학은 모든 작가에게 하나의 주제나 배경이 주어진다. 규칙과 주제라는 제약이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무엇보다 지면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크다. 단편소설밖에 쓰지 못하는 작가들이 모여서 앤솔리지 문학을 기획하면, 책 출간이 원활해진다. 또한 독자에게는 앤솔로지라는 장르 자체가 흥미롭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장르이기에 독자에게는 신선하게 받아들여진다. 독자들 관심사도 넓힐 수 있다. 또한 작가들이 같은 주제를 받아도 서로 다른 글이 나오기에 독자 입장에서는 다채롭게 작품을 읽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엔솔로지 문학이 독자들의 저변을 넓혀줄 것이라고 분석한다. 김보영 소설가는 “책에 우열은 없다, 취향에 맞는 책이 있을 뿐이다. 앤솔로지 문학은 특정 취향의 독자가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특정 주제로 책 한 권을 묶는 게 효과적이다”라고 말했다. 이용희 강원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나리오 공동작업을 해서 작품의 질이 높아진 것처럼, 엔솔로지 문학도 이런 맥락에서 시작된 것으로 분석한다. 형식 그 자체로만 신선함을 부여하는 것은 좋은 시도”라고 분석했다.

<정상빈 인턴기자 literature09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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