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그녀들의 꿈’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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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이모! 숙자 이모! 왜 가만히 있어요? 이 노래는 전주가 나오면 바로, 들썩들썩 엉덩이부터 털어줘야 해!”

음악감독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나란히 앉은 다섯 명의 할머니들이 조금씩 몸을 흔들기 시작하다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8월 24일 오전, 경기도 평택 안정리에 위치한 팽성예술창작공간 연습실. 주한 미 육군 캠프리험프리스 수비대(K-6) 주둔으로 과거 ‘미군기지촌’으로 불렸던 이 작은 동네의 연습실에서 70~80대 할머니들이 공연 준비에 한창이었다. ‘엉덩이를 털며’ 연습한 노래는 1979년에 나온 새샘트리오의 노래 ‘나성에 가면’이다.

곡이 막바지에 이르자 유성숙 음악감독의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자, 정말 너랑은 안녕이다! 진짜 가라고 손 흔들면서!” 할머니들의 노래가 이어진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함께 못가서 정말 미안해요/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안녕 안녕 내 사랑.”

지난해 초연한 미군 기지촌 할머니들의 뮤지컬 「그대 있는 곳까지」 공연 모습. / 햇살사회복지회 제공

지난해 초연한 미군 기지촌 할머니들의 뮤지컬 「그대 있는 곳까지」 공연 모습. / 햇살사회복지회 제공

‘치유’로 시작된 기지촌 여성들의 뮤지컬

‘내 사랑’이 떠나버린 곳은 정말 나성(미국 LA)이었을까. 앞줄에서 노래 연습에 한창이던 김숙자 할머니(72)에게 공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고 물었다. 금세 수줍어진 표정으로 김 할머니가 말했다. “내 얘기야. 내 첫사랑 이야기. 우리 영철이.”

‘우리 영철이’는 충북 진천의 기지촌 클럽에서 만난 쿠바 출신 미군이었다. 이름이 너무 길어서 김 할머니가 그냥 ‘영철이’라고 이름 붙여줬다고 한다. 공연은 김숙자 할머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2년 동안 함께 살았던 영철이는 이미 수십여 년 전 미국으로 떠났고, 그를 기다렸던 스물일곱의 숙자는 어느새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돼 그와 함께 불렀던 노래들을 무대 위에서 부른다.

무더위 속 막바지 연습은 9월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그대 있는 곳까지>(연출·구성 이양구, 음악 유성숙) 준비를 위해서다. 공연의 주인공들은 1960~80년대 평택 미군기지촌에 살았던 미군 ‘위안부’ 여성들. 극심한 가난 속 생계를 위해, 직업소개소에 속거나 또는 인신매매로 미군 대상 성매매로 내몰리며 ‘양공주’라는 사회적 멸시에 숨죽여 살았던 할머니들이 자신의 삶을 무대 위에서 이야기한다.

할머니들에게 이번 공연이 첫 데뷔 무대는 아니다. 시작은 ‘치유’였다. 2002년 안정리에 터를 잡은 기지촌 여성들의 쉼터 ‘햇살사회복지회’는 미술치료, 노래치료 등 이들을 위한 심리치유 프로그램들을 진행해 왔고, 그렇게 시작된 연극도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해 어느새 무대에 오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2012년부터 할머니들이 겪은 일을 소재로 연극 <일곱집매>(2012), <숙자이야기>(2012), <그대 있는 곳까지>(2016)가 무대에 올랐다. 이번 공연은 지난해 평택의 한 교회에서 초연했던 뮤지컬의 재공연이다.

‘민간외교관’ 호칭… 국가는 포주였다 

기지촌 여성들의 합창단 지휘부터 시작해 뮤지컬 음악감독으로 이들과 연을 맺고 있는 유성숙 감독은 “사회적 멸시로 가족이나 이웃과 연을 끊고 홀로 지내던 할머니들이 노래와 공연을 통해 점점 집밖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세상과 조금씩 관계맺기를 해나가는 과정이 있었다”면서 “그동안 어디서 말하지 못하고 가슴속에만 묵혀 왔던 본인 인생의 이야기를 공연을 통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전했다.

뮤지컬 「그대 있는 곳까지」 포스터.  / 햇살사회복지회 제공

뮤지컬 「그대 있는 곳까지」 포스터. / 햇살사회복지회 제공

뮤지컬에는 정해진 대본이 따로 없다. 오로지 할머니들의 증언과 경험을 토대로 했다. 그래서 그때그때 조금씩 대사가 바뀌기도 한다. 노래 연습이 끝나자 연기 연습이 이어졌다. 전문배우들과 함께 진행한 이날 연습의 첫 장면은 1970년대 정부 주도로 이뤄졌던 ‘기지촌 정화사업’과 수용소 ‘몽키하우스’를 다뤘다.

“토벌 나왔다!” 성매매 업소 주인의 외침으로 시작하는 이 장면은 보건소 및 시청 공무원이 등장해 업소 여성들의 성병 검진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고, 검진이 불확실하다며 어디론가 끌고 간다. 1960년대 세워진 성병 낙검자 수용소, 일명 ‘몽키하우스’다.

극중 ‘신참’이 묻는다. “몽키하우스가 뭔데?” “감옥이랑 똑같아!”

한국에서 공창제는 단 한 번도 ‘합법’인 적이 없었지만, 권위주의 정권 시절 국가는 한·미동맹이라는 이름 하에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을 직접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사실상 ‘포주’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것이 기지촌 정화사업이었다.

1969년 닉슨 독트린 이후 박정희 정권은 주한미군 철수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1971년 대통령 직속 ‘기지촌정화위원회’를 설립했다. 당시 문헌과 증언에 따르면 정부는 기지촌 미군 ‘위안부’들의 성병 관리를 위해 등록제를 실시하고 오로지 ‘미군의 위생’과 ‘양질의 서비스’ 제공을 위해 이를 직접적으로 관리했다. 기지촌 여성들은 정부로부터 ‘민간외교관’ ‘달러벌이의 산업역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면서도 동시에 ‘양공주’ ‘양색시’라는 사회적 비난도 함께 받아야 했다. ‘위안부’라는 명칭 역시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문서에서 사용한 용어로, 201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담긴 ‘기지촌 여성 정화대책’ 문건이 공개되기도 했다. 윤락행위방지법에 의해 엄격히 금지했던 성매매를 국가에서 용인하고 관리했다는 직접 증거다.

우순덕 햇살사회복지회 원장은 “1970년대 정권은 한·미관계를 우호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기지촌 정화위원회를 만들었고, 기지촌 여성들의 몸은 국가의 이해를 둘러싸고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희생양이 됐다”면서 “기지촌 여성들은 안보의 도구이자 경제적으로 달러벌이의 도구였지만, 기지촌 여성 개인의 안보는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최근 법원도 이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일부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2부(재판장 전지원 부장판사)는 지난 1월 미군 ‘위안부’ 여성 120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성병 낙검자 수용소에 법적 근거 없이 감금됐던 57명에 대해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수용된 ‘위안부’들은 완치 판정을 받을 때까지 수용소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임의로 수용소를 탈출하려고 시도하다가 부상을 입은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치료과정에서) 페니실린 쇼크로 인한 부작용에 시달리거나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직접 미군기지촌을 조성·운영했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원고 일부 승소를 판결했지만, 이는 법원이 미군 ‘위안부’의 존재와 국가의 인권침해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첫 사례다. 원고들은 1심 판결에 “수많은 입증자료 중 많은 부분이 판결에서 인정됐음에도 불구, 원고 일부승소 판결은 아쉽다”며 항소해 현재 서울고법에서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지난 8월 24일 평택 안정리에 위치한 팽성예술창작공간 연습실에서 뮤지컬 출연 할머니들이 유성숙 음악감독(앞줄 왼쪽) 지휘에 맞춰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  / 선명수 기자

지난 8월 24일 평택 안정리에 위치한 팽성예술창작공간 연습실에서 뮤지컬 출연 할머니들이 유성숙 음악감독(앞줄 왼쪽) 지휘에 맞춰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 / 선명수 기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할머니들의 공연

이날 연습한 뮤지컬의 다음 신은 업소 포주가 배식을 하며 여성들에게 수십 알씩 알약을 나눠주는 장면이었다. 할머니 다섯 명이 그때의 ‘아가씨’로 돌아가 연습실 한가운데 섰다. 다시 ‘신참’의 질문. “언니들, 이게 뭐예요?” 할머니들의 답변이 이어진다. “또라이 약이야” “먹으면 헬렐레 기분 좋아져” “춤 잘추게 돼”.

지난 공연에서도 ‘주연급 배우’로 무대 위에 올랐던 오영자 할머니(가명·69)가 ‘애드리브’를 했다. “아, 또라이 하나 더 늘었네!”

“넌 내게 행복을 줘”라는 포주의 대사와 함께 이어지는 노래는 해바라기의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유성숙 감독은 “당시 포주들은 미군들을 더 받게 하려는 목적으로 향정신성 약물인 ‘옥타리돈’을 여성들에게 먹였고, 이 약값은 고스란히 기지촌 여성들의 빚으로 쌓였다”면서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노래는 반어적인 관점에서 삽입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다음 연습 장면에서 오영자 할머니는 꿈 속에서 네 살 때 입양 보낸 아들의 생일에 자신을 찾아온 아들과 만나게 된다. 이 역시 무대 위 연기지만, 연기만은 아니다. “꿈이라고 해도 하룻밤만 자고 가”라며 아들을 붙잡고, 나를 왜 입양 보냈냐는 아들의 질문에 “여기서 살면 ‘튀기(혼혈인을 비하하는 속어)’라고 무시받고, 너 잘 살라고 보냈어”라며 울먹인다. 연습 시작 전 오 할머니는 기자에게 “작년에 아들을 찾았다”면서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에 사는 아들에게 연락이 왔는데, 결혼하고 아이 낳고 잘 살고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숙자 할머니는 지금도 미군 병사 ‘영철이’가 준 선물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남긴 오래된 녹음테이프 속에는 40여년 전 함께 부르곤 했던 노래 ‘꽃반지 끼고’를 흥얼거리는 영철의 목소리가 담겼다. “생각난다 그 오솔길/그대가 만들어준 꽃반지 끼고/다정히 손잡고 거닐던 오솔길이/이제는 가버린 아름다운 추억.”

이미 수십 번씩 진행한 연습이지만, 아직도 그 노래를 연습할 때면 할머니의 눈가가 빨개진다. 뮤지컬 제작비 모금을 위해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스토리펀딩을 진행하고 있는 우순덕 원장과 이양구 감독에 따르면 “숙자 할머니에게 ‘영철’에 대한 추억 말고는 아름다운 기억에 대해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한다.

우 원장은 “할머니들이 한 해 한 해 몸이 약해지셔서 아마도 이번 뮤지컬 공연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 노령이 된 기지촌 여성들이 대부분 가족과 연을 끊고 홀로 어렵게 생활하는 현실에서, 공연 제작비 마련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우 원장은 “미군기지 이전공사가 본격화되면서 안정리 일대 땅값이 많이 올랐고, 전·월세 시세도 상승해 할머니들의 주거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라며 “다행히 지난 7월 유승희 국회의원이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진실규명과 생활안정 지원을 담은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는데, 이 법이 빨리 통과돼 지원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할머니들에게는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기지촌 할머니들의 뮤지컬 공연은 오는 9월 12일 저녁 7시30분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에서 단 한 차례 열린다. 스무 살 ‘영철’과 70대 ‘숙자’의 노래와 목소리도 이 공연에서 만날 수 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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