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나가려면 이근호처럼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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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 대표팀 감독은 취임 후 “90분 동안 목숨을 바치듯 뛰는 선수를 원한다. 대표팀에 대한 사명감과 희생정신을 보여줄 선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근호 같은 선수다.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뛴 박지성도 대표팀에선 동료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런데 요즘 후배들은 대표팀에서 자기만 돋보이려 애쓰는 것 같다. 이근호처럼 최선을 다해서 뛰는 선수가 10명만 있으면 월드컵에 충분히 나갈 수 있다. 후배들이 태극마크의 무게를 알았으면 한다.”

프로축구 전북 현대의 베테랑 공격수 이동국(38)은 지난달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대표팀 선수들이 이근호(32·강원FC)처럼 목숨 걸고 뛰면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 나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A매치 103경기에서 33골을 터트린 이동국의 진심이 담긴 조언이었다.

축구대표팀은 한국축구의 운명이 걸린 두 경기를 앞두고 있다. 축구대표팀은 3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이란과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9차전을 치르고, 다음달 5일 우즈베키스탄과 원정 10차전을 갖는다. A조 2위 한국(4승1무3패·승점13)은 3위 우즈베키스탄에 승점 1점 차로 쫓기고 있다. 조 2위까지 주어지는 본선행 티켓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신태용 축구대표팀 감독은 지난 14일 26명의 명단을 발표하며 이동국과 함께 이근호를 뽑았다. 신 감독은 “노장선수라고 해서 실력이 없는데 뽑진 않았다. 그동안 이근호가 어느 후배들보다 열심히 뛰는 모습을 봐왔다. 정신적으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근호가 6월 14일 카타르 도하 자심 빈 하마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8차전 카타르와의 경기에서 상대 진영을 파고들고 있다. / 대한축구협회 제공

이근호가 6월 14일 카타르 도하 자심 빈 하마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8차전 카타르와의 경기에서 상대 진영을 파고들고 있다. / 대한축구협회 제공

이동국과 함께 후배들의 귀감 기대

이근호는 ‘2군 선수’였다. 부평고를 졸업하고 2004년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에 입단했지만 설 자리가 없었다. 2군을 전전하며 ‘눈물 젖은 빵’을 먹었다. 절치부심한 이근호는 2006년 K리그 2군리그 우승을 이끌며 MVP에 뽑혔다. 2007년 대구로 이적해 골 폭풍을 몰아쳤고, 여세를 몰아 대표팀까지 뽑히며 ‘2군 신화’를 썼다.

이근호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3골을 터트리며 본선행을 이끌었다. 허정무 당시 대표팀 감독의 ‘황태자’라 불렸다. 하지만 유럽 진출 실패와 컨디션 난조로 23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남아공 월드컵 최종 전지훈련지였던 오스트리아까지 동행했지만, 대회 개막을 불과 보름 앞두고 쓸쓸하게 귀국했다. 대표팀 트레이닝복을 입고 돌아오는 게 너무 창피해 면세점에서 사복을 급히 구입해 갈아입고 취재진을 피해 공항을 빠져나갔다.

이근호는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2012년 울산 현대 유니폼을 입고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AFC 올해의 선수상도 받았다. 2012년 말 입대한 상무에서는 레슬링·사이클 등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비인기 종목이라 각광받는 순간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밖에 없는데, 새벽에 체육관에 나가면 늘 그들이 먼저 훈련을 하고 있었다. 나태해지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근호는 2013년 K리그 챌린지(2부 리그)에서 득점왕(15골)을 차지하며 팀을 1부 리그로 올려놓았다.

이근호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왼쪽 무릎을 다쳤다. 수술을 피하며 가까스로 재활에 성공했지만, ‘이근호가 또 탈락하는 거 아니냐’는 루머가 돌았다. 홍명보 당시 대표팀 감독은 월드컵 최종 엔트리 발표 기자회견에서 23명 중 21번째로 이근호의 이름을 불렀다.

당시 이근호는 “월드컵 출전을 위해 노력했을 많은 선수들을 대신해 책임감을 갖고 임하겠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의 아픈 기억을 묻자 “지금은 추억이다. 지금은 추억이다”라고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이근호는 지인들에게 “월드컵 한 골이면 드라마가 완성된다”고 말했다.

이근호는 2014년 6월 18일 러시아와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후반 23분 골을 터트렸다. 기습적인 오른발슛이 러시아 골키퍼 아킨페예프의 손에 맞고 들어갔다. 당시 군팀 상주 상무 소속 ‘육군 병장’이었던 이근호가 한방을 터트렸다. 당시 이근호가 받은 병장 1호봉 월급(14만9000원)을 연봉으로 환산하면 178만8000원.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한 736명 중 무적(無籍) 선수를 제외하고 최저 연봉이었다.

2014년 9월 상주에서 군복무를 마친 이근호는 카타르 프로축구 엘 자이시로 이적했다. 3년 계약에 연봉 300만 달러(약 32억5000만원)를 받았다. 육군 병장 신분으로 월급 14만9000원을 받던 이근호는 몸값이 1700배 뛰었다. ‘축구 신데렐라’의 스토리였다. 이근호는 힘들었던 시절을 잊지 않고 꾸준히 기부에 앞장서고 있다. 지금까지 기부한 액수는 수억원이다.

월드컵 나가려면 이근호처럼 뛰어라

강한 근성과 헌신적인 움직임

‘아시아 호랑이’로 불렸던 한국축구는 요즘 ‘종이 호랑이’ 신세다. 축구대표팀은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약체 중국·카타르한테 졌다. 졸전을 거듭하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경질 타이밍을 놓쳐 벌어진 참사다.

선수들의 정신력도 문제다. 익명을 요청한 한 국가대표 선수의 에이전트는 “중국 프로팀 소속 선수가 대표팀 단체 카톡방에서 연봉을 자랑하고 다른 선수들은 부러워하는 게 현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슈틸리케 감독 시절 몇몇 선수들은 숙소에서 카드도 쳤다는 후문이다.

지난 12일 임명된 김남일 대표팀 코치는 “대표선수들에게 간절함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마음 같아서는 ‘빠따’라도 치고 싶은데,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 같다”고 에둘러 말하기도 했다.

많은 축구팬들은 대표팀이 비록 패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한국축구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1무2패에 그쳤다. 하지만 벨기에와 3차전(1-1무)에서 머리에 피가 나도 붕대를 묶고 뛴 이임생의 투혼에 팬들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축구대표팀은 지난 6월 14일 카타르와 월드컵 최종예선 8차전에서 2-3으로 졌는데, 당시 거의 유일하게 욕을 안 먹은 선수가 이근호였다. 팔부상을 당한 손흥민(25·토트넘)을 대신해 전반 33분 교체출전한 이근호는 정말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이근호의 발에 흰색 페인트를 바르면 그라운드가 온통 흰색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강한 승부근성과 헌신적인 움직임을 선보였다.

신태용 대표팀 감독은 취임 후 “90분 동안 목숨을 바치듯 뛰는 선수를 원한다. 대표팀에 대한 사명감과 희생정신을 보여줄 선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근호 같은 선수다. “이근호처럼 최선을 다해서 뛰는 선수가 10명만 있으면 월드컵에 충분히 나갈 수 있다”는 이동국의 말을 이근호에게 전했다.

이근호는 이렇게 답했다.

“이동국 선수가 그렇게 말해줘서 감사합니다. 제가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많이 뛰어서 수비수들을 괴롭히는 겁니다.”

이근호의 별명은 ‘태양의 아들’이다. 팬들이 2007년 대구FC 시절 대구 마스코트가 태양인 점에 착안해 붙여줬다. 이근호는 일본 J리그 주빌로 이와타에서 뛸 때도 ‘SON OF SUN’이라 불렸다. 태양처럼 뜨거운 남자 이근호는 한국축구를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겠다는 생각뿐이다.

<박린 일간스포츠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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