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든 성배’ 받은 신태용, ‘비주류의 한’ 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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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감독은 “선수시절 월드컵을 못 나간 게 평생 한이었다. 감독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아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다.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을 위해 제 한 몸을 불사르겠다”고 말했다.

벼랑 끝에 몰린 한국축구가 ‘신(申)’에게 운명을 걸었다.

한국축구대표팀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에서 4승1무3패(승점13)로 이란(승점20)에 이어 2위다. 3위 우즈베키스탄과 불과 승점 1점 차. 한국은 8월 31일 이란과의 홈 9차전과 9월 5일 우즈베키스탄과의 원정 10차전, 단 2경기만 남겨뒀다. 조2위까지 주어지는 월드컵 본선 직행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6월 15일 울리 슈틸리케(독일)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하차한 가운데 대한축구협회는 4일 신임 A대표팀 사령탑에 신태용을 선임했다.

허정무 프로축구연맹 부총재, 정해성 축구대표팀 수석코치, 홍명보 전 항저우 뤼청 감독 등 쟁쟁한 후보들을 제쳤다. 신 감독은 지방대 출신에 월드컵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비주류’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이제 대표팀 사령탑으로 월드컵 무대에 도전한다.

신태용은 한국축구의 ‘비주류’였다. 대구공고 시절 전국대회 득점왕을 휩쓸었지만 지방대(영남대)에 진학했다. 신 감독은 사석에서 “수도권 대학교에서 입학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친구 2명과 함께 갈 수 있는 영남대를 선택했다. 이래봬도 고향 경북 영덕에서는 내가 특산물 대게만큼 유명했다”며 웃었다.

신태용 신임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이 7월 6일 축구회관에서 열린 취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이석우 기자

신태용 신임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이 7월 6일 축구회관에서 열린 취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이석우 기자

지방대 출신, 월드컵 한 번도 못 나가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비주류’에 대한 아픔이 남아있다. 신태용은 1992년부터 2004년까지 프로축구 성남에서 99골·68도움을 기록하며 6차례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1994년 미국 월드컵, 1998년 프랑스 월드컵, 2002년 한·일 월드컵 모두 출전하지 못했다. 당시 신태용은 축구계 주류인 연·고대 출신이 아니라 앞에서 끌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신태용은 도전자의 경쟁을 원천적으로 막는 유리천장을 깨뜨렸다. 신태용은 2009년 성남 감독으로 변신해 2010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와 2011년 FA(축구협회)컵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계속해서 “월드컵에도 못 나가본 사람이 무슨 대표팀 감독이냐”는 편견과 싸워야 했다.

신태용은 한국축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원등판해 ‘축구계의 선동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 2015년 1월 고(故) 이광종 당시 올림픽팀 감독이 병마로 물러나자 대신 지휘봉을 잡았다. 2016년 리우 올림픽 8강행을 이끌었다. 안익수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물러난 지난해 11월 20세 이하(U-20) 대표팀을 물려받았다. 지난 5월 U-20월드컵에서 16강행을 지휘했다. 당시 중국 슈퍼리그 팀들로부터 수십억 원 조건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국가의 부름에 응답했다.

신태용은 한국축구에서 가장 높은 A대표팀 감독 후보로 거론됐다. 지인들은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이 좌절되면 이민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며 만류했다. 하지만 신 감독은 ‘독이 든 성배’를 받아들였다. 그의 측근은 “신 감독은 언젠가 감독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아 한을 풀고 싶다고 했다. 비주류로 세상을 바꿔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고 전했다. 신 감독은 “선수시절 월드컵을 못 나간 게 평생 한이었다. 감독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아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다.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을 위해 제 한 몸을 불사르겠다”고 말했다.

‘독이 든 성배’ 받은 신태용, ‘비주류의 한’ 풀까

올림픽팀과 U-20팀 구원감독으로 등장

신 감독은 특유의 당당함을 지녔다. 신 감독은 2010년 일본 도쿄에서 성남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끈 뒤 “난 난 놈”이라고 외쳤다. 그해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 클럽월드컵 인터밀란(이탈리아)전을 앞두고 전혀 긴장하지 않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보며 깜짝 놀랐다.

2012년 12월 7일 그는 성적 부진으로 성남 감독에서 자진사퇴했다. 그날 밤 신 감독은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 얼마나 빨리, 누가 먼저 일어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 감독은 2013년 선진축구를 배우기 위해 스페인·독일로 축구연수를 떠났다. 스페인 2부리그까지 부지런히 관전했다. 당시 독일에서 뛰던 손흥민(25·토트넘), 지동원(26·아우크스부르크) 등 유럽파 선수들을 두루 만나 외국생활의 고충을 들었다. 당시 기자와 매주 한 차례씩 통화를 했다. 신 감독은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는 파울을 당해도 곧바로 일어섰다. 마치 경기를 즐기는 1분1초가 아깝다는 표정이었다”, “펩 과르디올라 감독은 미적 감각이 뛰어나고, 조세 무리뉴 감독은 현실감각을 지녔더라”고 말했다.

신태용은 2014년 9월 A대표팀 코치로 현장에 복귀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2015년 1월 호주 아시안컵 준우승을 거두며 신을 뜻하는 갓(God)을 합해 ‘갓틸리케’라 불렸지만, 당시 코치였던 신태용이 조별리그 3차전부터 전술 대부분에 기여한 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신 감독은 격식을 싫어한다. 성남 감독 시절 ‘형님 리더십’을 펼쳤다. 감독이 선수의 목을 장난삼아 조르고, 선수는 감독의 엉덩이를 툭 찼다. 화이트데이에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에게 “경기 후 여자친구와 달콤한 와인을 마실지, 씁쓸한 소주를 마실지는 경기 결과에 달렸다”고 독려했다. 성남은 그날 인천을 6-0으로 대파했다.

5월 22일 U-20 대표팀 감독이던 신태용 감독이 U-20 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경기 전 훈련에 앞서 선수들에게 당부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 이석우 기자

5월 22일 U-20 대표팀 감독이던 신태용 감독이 U-20 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경기 전 훈련에 앞서 선수들에게 당부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 이석우 기자

신 감독은 올림픽대표팀 감독 시절 목욕탕에서 선수들과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술래잡기를 했다.

선수 선발도 파격적이다. 간판보다는 실력을 중시한다. 올림픽팀 감독 시절 해당 연령대보다 3살 어린 공격수 황희찬(21·잘츠부르크)을 깜짝 발탁했다. 신 감독이 A대표팀에서 자신처럼 ‘비주류’를 발탁할지도 주목된다. 손흥민(25·토트넘)과 기성용(28·스완지시티)이 부상당한 가운데 신 감독이 K리그 득점 선두(12골) 양동현(31·포항), 이명주(27·서울) 등을 발탁할지 주목된다.

김환 JTBC 해설위원은 “신 감독은 그동안 2골 내줘도 3골 넣어서 이기는 공격축구를 구사했다. 하지만 그건 연령별 대표팀에서의 이야기다. 최종예선 2경기는 한국축구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경기다. 실점 없이 한 골을 넣어도 승리할 수 있는 경기를 펼칠 전망이다”라며 “슈틸리케 감독 밑에서 인정받지 못한 이명주를 비롯해 올림픽팀 제자 권창훈(23·디종), 이창민(23·제주) 등 창의적인 선수들이 중용될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국축구대표팀은 지난 2013년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 ‘거친 태권축구’ 논란 속에 0-2로 졌다. 당시 신태용은 기자에게 “우리 선수들은 경기 후 브라질과 유니폼 교환을 하지 않았다. 2006년 독일월드컵 스위스전 패배 후 서럽게 울던 이천수처럼 분한 표정이었다. 상대가 명품팀이라고 해서 중국처럼 0-8로 진 뒤 네이마르와 유니폼을 바꾸려고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가. 그보다는 터프하더라도 이기고 싶어 투지 넘치는 모습이 낫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신태용호가 다음달 이란전에 그런 모습을 보여줄까.

<박린 일간스포츠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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