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의 길, 서경덕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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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조광조의 길, 서경덕의 길

‘클레오파트라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이라는 말이 있다.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말이다. 역사에서 ‘∼라면’은 늘 흥미롭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서양사에서 ‘‘라면’이 있는 것처럼 한국사에서는 ‘조광조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이라는 ‘라면’이 있다. 서양사에서 로마제국의 실력자들을 주무른 클레오파트라의 삶이 드라마틱했다면 한국사에서 조광조의 삶 역시 드라마틱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소설이나 역사드라마가 많았다.

조광조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다보니, 한 인터넷 카페에 이런 흥미로운 글이 올라와 있다.
“투표해 주세요. 중종시대 최고의 성리학자는? 조광조 vs 서경덕” 답은 공개돼 있지 않지만 몇 개의 댓글을 보면 대강 조광조에게 점수가 후한 편이다. 이유로는 조광조의 개혁정신이 거론되고 있다.

조광조와 서경덕, 이 두 인물만큼 역사 서사에서 매력적인 소재도 드물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따로 따로 등장하다보니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인터넷 카페의 질문은 새삼 두 사람의 출생연도를 뒤져보게 했다. 서경덕은 1489년(성종 20년)에 태어났고, 조광조는 1482년(성종 13년)에 태어났다. 조광조가 일곱 살 더 나이가 많았던 것이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 일찍이 사림에서 걸출한 인물로 부각됐다. 1510년(중종 5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1519년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을 때까지 사림파의 상징적인 인물로 훈구파에 맞서 개혁을 주도했다.

조광조의 개혁적 업적 중 하나가 현량과 실시다. 이를 통해 조광조는 신진 사류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켰다. 서경덕은 1519년에 현량과에 천거됐다. 여기에서 두 역사적 인물이 연결된다. 서경덕은 벼슬을 마다했다. 기묘사화가 발생한 해의 일이다. 어떤 역사소설에서는 벼슬을 권유하는 조광조와 벼슬을 마다하는 서경덕의 대화를 사실적으로 그려놓았다. 개혁에 실패한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죽은 이후에도 서경덕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한 사람은 고향인 개풍에서 평생 학문에 전념했고, 한 사람은 학문을 실천하기 위해 개혁정책을 펼치다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았다. 500년 전의 일이다. 조광조는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이후 사림에서는 개혁의 상징이 됐다. 두 사람은 후대에도 훌륭한 성리학자로 평가된다. 그 뒤 선비들은 ‘서경덕의 길’을 선택하거나 ‘조광조의 길’을 선택했다.

참여정부가 개혁을 추진하다 문을 닫은 지 9년 만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주간경향>의 취재 결과, 시민사회 인사들이 대거 새 정부와 새 청와대에 입성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장하성 정책실장, 조국 민정수석, 하승창 사회혁신수석 등이 한때 시민단체에서 활약하던 모습이 그려진다. 참여정부에서의 시민사회 협치보다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다.

어쩌면 시민사회나 학계에서 지금 ‘조광조의 길’을 갈지, ‘서경덕의 길’을 갈지 고민하는 분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조광조의 길’을 선택한다면 이 분들이 더 이상 ‘조광조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과 같은 역사적 가정이 없도록 했으면 좋겠다. 촛불 이후 우리 사회는 수많은 ‘조광조’를 기다렸다. 촛불의 꿈이 이들 ‘조광조’에 의해 성공적으로 이뤄지길 바란다.

<윤호우 편집장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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