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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중공업 가족’은 지금 해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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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황 속 뿌리내린 ‘우리 식구’ 문화가 조선업 위기 속 동질감 사라져

한국을 제조업 강국으로 만들었던 경남 산업도시들이 흔들리고 있다. 2012~2017년 대우조선해양에서 근무한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가족'과 '노동'의 위기가 지역사회 위기의 뿌리였다고 진단한다. 그가 겪은 위기의 과정을 싣는다

거제도에 도착해 처음 본 것은 작업복의 물결이었다.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 두 회사의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작업복을 입고 어디든 다녔다. 술집에 가고, 상갓집에 가고, 결혼식에 가고, 돌잔치에 갔다. 소개팅 자리에도 작업복을 입고 나갔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교복과 군복을 벗고 나서 늘 ‘사복’을 입고 다녔던 내게는 충격이었다.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구로공단 부근을 지날 때 아빠는 “공부 못하면 작업복 입고 평생 저렇게 살게 된다”고 말했다. 무지막지한 경쟁을 뚫고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작업복이라니 “이 동네는 옷으로 사람을 강등시키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있었을 때 한 무리의 ‘작업복 부대’가 몰려왔다. 조문객들은 한참을 쳐다보곤 했지만, 회사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작업복은 ‘중공업 가족’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언젠가 상사에게 물었다. “왜 퇴근하고도 작업복을 입나요? 현대(중공업) 다니는 친구는 퇴근하면 다들 사복 입는다던데?” 그 상사는 “야, 나가면 다 우리 식구고 얼마나 좋냐?” 하고 답했다. 나도 곧 작업복이 더 편해졌다. 작업복을 입고 소개팅에 나갔고, 데이트도 어색하지 않게 됐다. 잦은 회식과 직원들을 ‘우리 식구’라고 부르는 문화에 저항했었지만, 곧 ‘식구됨’에 뿌듯함을 느끼게 됐다.

2016년 7월 7일 오후 삼성중공업 노동자협의회가 경남 거제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4시간 전면파업 집회를 하고 있다. 삼성중공업 노협 전면파업은 국내 조선 ‘빅3’ 가운데 처음이다. / 연합뉴스

2016년 7월 7일 오후 삼성중공업 노동자협의회가 경남 거제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4시간 전면파업 집회를 하고 있다. 삼성중공업 노협 전면파업은 국내 조선 ‘빅3’ 가운데 처음이다. / 연합뉴스

중공업 가족의 자부심 드러내던 작업복

중공업 가족은 회사 기업문화 활동의 목표이기도 했지만, 직원들 경험의 산물이기도 했다. 산업도시 거제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선박 건조를 시작했고, 10만 내외의 인구는 30년이 지나 25만을 헤아리게 됐다. 조용한 섬엔 외지인들이 가득찼다. 전국 각지에서 중학교 정도를 마치고 ‘직업훈련소’를 통해 입사한 생산직들은 30여년 회사를 다니면서 노동계급 중산층이 됐다. 공고 나온 사람들 중 설계업무를 하다가 사무직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으레 정년과 고소득을 함께 누리기 어렵지만, 그들은 모두 누릴 수 있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형성된 노동조합이 정규직들의 고용안정과 복지를 보장했고, 조선업의 성장가도는 ‘IMF’도 없이 고소득을 만들어줬다. 중공업 가족은 “거제도에서는 개도 1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시절을 보냈다. 회사만 착실히 다녀도 ‘아파트’를 장만하고, 두셋씩은 낳은 아이들을 대학 공부시키고 시집·장가를 보내며, 해외여행도 종종 다니는 중산층이 됐다. 직원들은 모든 것을 갖게 해준 회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중공업 가족이 됐다.

중공업 아빠들은 아이를 많이 걱정하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면 ‘팍팍 밀어’주기는 했다. 자녀가 좋은 대학 가고 출세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 한국 부모는 없었을 테니까. 아주 공부가 탁월하지 않은 남자아이들에겐 적당히 지역의 4년제 공대를 나와 아빠 회사에 들어오길 권했다. ‘아빠 생산직-아들 사무직’, ‘아빠 사무직-아들 사무직’인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전문대나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생산직으로 입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후엔 교사나 간호사 등과 결혼시키는 게 좋다고 아빠들은 말했다. 딸들에겐 다른 경로가 주어졌다. 공부를 잘못하면 “상고 정도 나와 회사의 사무보조(서무)로 일하다가 아빠가 정해주는 후배 직원과 결혼을 하면 된다”고들 생각했다. 자녀가 결혼하면 아빠는 보통 근처에 사둔 집 한 채를 해주는 게 기본이었다.

하지만 중공업 가족은 조선업 위기상황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는 모순으로 인해 해체되는 중이다. 우선 수도권 출신 젊은 사무직들이 균열을 만들었다. 그들은 산업도시의 가족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나를 포함해 많은 수도권 출신들이 주말마다 회사의 셔틀버스를 타고 서울을 다녔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와 자기계발을 원하는 젊은 직원들은 매일 똑같은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을 힘들어 했다. 연애와 결혼은 더 큰 어려움이었다. 수도권에서 자란 젊은 ‘여자친구’와 ‘아내’들은 산업도시로 내려오기를 점차 더 꺼렸다. 산업도시에서는 여자가 할 만한 일자리라고는 교사, 의사, 약사, 간호사 등밖에 없는 셈이었다. 조선소 정규직 공채에서 여성 비율도 20~30%를 넘지 않았다. 생산직은 남자의 자리였다. 맞벌이를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수도권 출신 젊은 사원-대리들은 ‘주말커플’, ‘주말부부’를 선택했다. 선배들은 얼른 결혼해 거제도에 정착하는 게 좋다고 설득했지만, 잘 통하지 않았다. 구조조정이 본격화되고 연봉이 줄어들자, 젊은 수도권 출신들은 재빠르게 이직을 준비하고 짐을 쌌다. 고소득, 정년보장이 해체되었을 때 ‘지방근무’를 지탱해줄 힘이 없었다. 동년배 중공업 아빠의 아들이나 ‘부울경’ 출신들과도 감정적인 간극이 생겼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믿는 이들과 “여기가 내 평생 일터”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괴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영광의 지난 30년 다시 오기는 힘들 듯

하청과 여성노동자 문제도 가족이라는 동질감을 해체한다. 하청은 원청과 벌이와 고용안정성·복지에서 차이가 있었고, 은연중에 지역사회에서도 차별을 느꼈다. 작업복의 명찰로 ‘직영’과 ‘외주’가 갈렸다. 직영은 명찰에 부서 이름을 달고 다녔고, 외주는 업체 이름을 달고 다녔다. 소개팅에 나가면 은연중에 “직영이세요?” 하는 질문을 들었다. 외주일 경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는 이야기가 지역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왔다. 하청업체 대표나 간부가 아닌 노동자들은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호황기에는 차별이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불황이 시작되자 하청업체들의 계약해지와 해고가 잇따랐다. 정규직 노조는 하청을 지키겠다고 공언했지만, 공적자금이 들어오는 위기에서 하청직원이 우선적으로 정리됐다. 어렵고 위험한 공정을 맡는 하루 벌어 하루 먹던 일자리들도 다수 사라졌다. 사무보조 업무를 하던 연차 높은 여성노동자들도 적지 않게 일자리를 잃었다. 여성노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정서가 강했기에 고용안정의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이다.

거제도의 중공업 가족에게 지난 30년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맛볼 수 없는 영광의 세월이었다. 이제 그 가족은 재건이 어려워 보인다. 호황이 다시 오더라도 ‘직영 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을 다시 구축하긴 어려울 것이다. 여성이 일할 수 있는 정규직 직장이 없는 산업도시로 딸들과 아내들은 잘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탁월한 젊은 엔지니어들도 근무를 기피할 것이다. 하청에 대한 차별이 줄고 정규직 전환의 기회가 늘지 않는 이상 성실한 젊은 생산직 기술자들도 찾지 않을 것이다. 영광만을 기억하고 현재가 불만스러운 늙은 남성 노동자들의 도시, 러스트 벨트가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성실히 일했던 사람들의 긍지를 살리면서도, 여성과 젊은 세대에게도 동등한 기회가 열리는 산업도시. 지자체와 기업이 할 일이 간단치 않아 보인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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