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빙 피셔와 레너드 베이컨-‘반역의 시학’과 ‘학문적 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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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부 피셔와 조카 베이컨의 관계는 돈독했고, 시와 문학, 사회 전반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시는 고통받는 이들을 기리는 반역이다. “우리나라 꽃들은 대부분/ 3·1절과 4·19혁명기념일 사이에 피어난다.// 꽃샘 잎샘 까탈이 아무리 거칠어도 그 사이에 꼭 피어난다.” (<우리나라 꽃들은>, 윤효) 시는 여태껏 자연을 바라보던 눈을 배반한다.

미국의 시인 레너드 베이컨(1887∼1954)도 자기 세계에서 ‘반역의 시학’을 단단히 닦았다. 1900년대 초반 대부분의 미국 시는 소재와 표현 모두에서 청교도 윤리와 사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베이컨은 근엄한 청교도의 주제를 따를지라도, 더 강렬한 표현을 사용했고 특히 감정을 드러내는 데 충실했다.

“움직이는 검은 대리석 위 제비꼬리 나비/ 웅덩이로 쏜살같이 날아들고 튀는 소리/ 나비의 날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며, “비밀스런 키스소리를 내며 나비는 다시 뛰어든다/ 밝은 날개로 또다시 평평하게 누워/ 상쾌한 금빛 피로와 냇물이 흡족하”다고 적었다. “그 때 부활하여 새로워지는/ 공기, 위험함, 그리고 빛”이 정갈하다고 믿었다. 세상을 풍자하는 데도 관심을 두어 풍유시집 <선덜랜드 함락>을 냈다. 청교도 정신에 방점을 두었지만 자연의 아름다움과 개인의 느낌을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해, 기존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평을 받았다. 이런 평으로 1941년 시 부분의 퓰리쳐상을 받았다.

어빙 피셔 / 위키백과(왼쪽), 레너드 베이컨 / The Saturday Review(오른쪽)

어빙 피셔 / 위키백과(왼쪽), 레너드 베이컨 / The Saturday Review(오른쪽)

시인은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에서 자라 예일대학에서 공부했다. 아버지는 아주 지적인 사업가였다. 그런 아버지와 친한 데 다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곁에 있었다. 어머니 헬렌 하자드 베이컨을 통해 가족의 연을 맺은 시인의 이모부인데, 예일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어빙 피셔(1867∼1947)다.

1867년 뉴욕에서 태어난 피셔는 예일대학에 경제학과가 없던 시절에 공부했다. 본래 시와 문학, 수학에 관심이 많았다. 지도교수는 물리화학자인 깁스와 사회학자 섬너이다. 깁스는 볼츠만, 맥스웰과 함께 개개의 입자들이 가지는 관계에서 전체의 평형상태를 이해하는 통계역학을 창시했다. 깁스의 제자로 자연과학의 묘사방법을 체득한 피셔는 물리학과 수학의 언어로써 사회를 이해하고자 했다.

피셔는 사회과학의 한 분파인 경제학을 정밀과학으로 만들겠다는 ‘학문적 반역’을 감행한다. 숫자로 나타내기 비교적 쉬운 상품의 수요와 화폐를 물리학의 대상인 속도, 질량, 힘 같은 개념으로 묘사했다. 가속도와 힘, 질량의 관계를 묘파한 뉴턴처럼 화폐량이 물가수준을 결정한다는 법칙을 만들었다. 화폐수량설은 화폐공급과 가격수준이 정비례한다(사회에 돈이 늘어나면 물가가 상승한다)는 말이다.

이모부와 조카의 관계는 피셔가 베이컨의 아버지와 약 40여년간 교분을 쌓으며 나눈 편지를 통해 잘 드러난다. 피셔는 베이컨의 시를 읽고 칭찬하며, 계속 쓰기를 권했다. 둘의 관계는 돈독했고, 시와 문학, 사회 전반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시인의 열정이 마음 한 구석에 있는 피셔는 시인으로 커가는 베이컨을 대견해했다. 베이컨도 피셔와 같이 시와 문학을 이해하려는 갈증을 풀었다. ‘물음’과 ‘의심’이 기본인 학문의 반역에 비춰 시도 곧 반역임을 느꼈을 게다.

피셔는 그의 연구대상이었던 금융시장에 배반을 당한다. 1929년 검은 목요일의 증시 붕괴 이후, 피셔는 회복을 낙관하다 결국 엄청난 빚을 지게 됐다. 그를 다시 살려준 것은 처형이자 시인인 캐롤린 해저드였다. 피셔의 실패는 그가 자신의 고집에 매달려 젊은 날과 달리 물음과 의심을 게을리한 탓이다.

<김연(시인·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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