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 임용자씨-한 땀 한 땀 공들인 세상에 유일한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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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가 있고 순서가 있으며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잘할 수 없는 것이 뜨개질이다.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내면 그 과정에서 배움이 생기고, 흠을 찾아낼 수 있다. 다음 번엔 그 가시를 없애고 더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 뜨개질이다.

청계천 일대의 풍경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고가도로가 사라지고 물이 흘러내린다. 1970년대 이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 사람들은 지금의 한적함을 낯설어한다.

그래도 청계천 인근에는 고도성장시기의 흔적이 조용히 남아있다. 평화시장 봉제공장과 동대문 원단가게, 광장시장 포목상가와 방산시장 포장재료 상가들이 얽혀 어제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벽시장을 찾는 상인들과 일용직 봉제노동자들이 노동을 팔기 위해 모였던 새벽다리 근처에 편물 수예재료상들이 몰려 있다. 100여곳이 넘던 가게들은 줄고 줄어 지금은 대략 서른 곳 남짓한 실가게들이 영업을 한다.

“경기는 바닥에 바닥이다. 2∼3년 전에는 망고모자 뜨개질이 반짝 유행을 탔다. 지금은 유행하는 물건도 없고 더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청계천변 동신상가에서 25년째 뜨개질 재료상을 하는 영광모사 임용자 대표의 말이다. 경기가 나빠졌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3∼4년 전부터. 지금은 현상유지도 어렵다는 것이 청계천 일대 상인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청계천 입성 25년차인 임용자씨, 실을 팔고 실로 옷짜는 법을 가르친다. / 김천

청계천 입성 25년차인 임용자씨, 실을 팔고 실로 옷짜는 법을 가르친다. / 김천

청계천변 동신상가서 25년째 재료상

그의 두 평 남짓한 가게에는 실타래가 빼곡히 들어차 있고, 선반 아래 장의자에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방석이 줄지어 놓여 있다. 방석은 몇 개를 덧붙여 오래도록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공을 들였다. 마치 시골 아낙의 안방이거나 작은 마을의 사랑방 같은 모습은 실도매상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뜨개질하다가 막히면 찾아온다. 모르는 것은 가르쳐주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준다. 여기는 재료 도매상이라서 실만 팔아야 하는데 어느 사이 뜨개질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묻고 배우는 장소가 됐다.” 한 마디 두 마디를 받아주고 가르쳐주다보니 이제는 자리를 잡고 앉아 뜨개질을 하다 가는 이들도 생겼다.

청계천 복원사업 이전에 청계고가도로 아래 청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가 있었다. 인근 바다극장 쪽으로 건널 수 있는 육교에 상가가 있었고 상가에는 실을 파는 소매상들이 몰려 있었다. 임용자씨의 가게처럼 도매상이 아니라 뜨개질 용품을 파는 소매상 가게 앞에 앉은뱅이 의자를 놓고 뜨개질을 가르치던 곳이 군데군데 있었다. 육교상가가 철거되자 사람들은 길 아래 도매상에 와서 뜨개질을 물어보게 됐다.

“아주 초보자들은 못 가르쳐준다. 시간이 너무 걸리고 힘들기 때문이다. 대개 잘 짜는 분들이 찾아온다. 뜨개질은 코 계산이 잘못되면 옷이 울거나 퍼져서 여기 와서 물어보면 아는 대로 가르쳐주고 있다.” 임용자씨는 자신이 아는 세세한 부분까지 알려준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 출·퇴근하듯 찾아오는 사람도 생겼다. 가게 한편에 앉아 실을 살펴보던 노인이 임용자씨에게 계속 말을 건넸다.

“어버이날 손녀가 용돈을 줬다. 추석쯤 출산예정이라 옷 한 벌을 떠주고 싶은데 어떤 실이 좋나?” 상도동에서 청계천까지 찾아와 실을 사고 뜨개질도 배우며 하루를 보낸다는 유숙주 할머니는 올해 아흔 살이다. 할머니에게 임용자씨가 권한 것은 흰색 면사. 아이 옷이니 색이 들지 않은 고급 면사로 손수 짜주라고 권한다. 유 할머니가 이 가게를 드나든 것은 오륙 년이 됐다. “처음 스님 옷 한 벌을 떠주기 위해 이 가게를 찾았다. 실도 많이 샀고 배우기도 많이 배웠다.”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며 찾아갈 곳이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매일 가게에 나와 뜨개질로 소일거리를 하고 돌아가는 이들도 있다. / 김천

매일 가게에 나와 뜨개질로 소일거리를 하고 돌아가는 이들도 있다. / 김천

판매보다 뜨개질 가르치는 일 더 많아

임용자씨는 혼자 사는 어머니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고 귀띔한다. “운동이 많이 된다. 손과 머리가 함께 돌아가야 뜨개질을 할 수 있다. 나이든 분들도 감각이 뒤처지지 않고 잘 배운다.” 그는 주업인 실 도매업보다 뜨개질을 가르치고 고독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이 더 늘어났지만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뜨개질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느냐는 질문에 요즘엔 인터넷에 많이 나와 있다고 했다. 지자체의 문화센터나 동네 뜨개질방에서도 배울 수 있지만 인터넷을 통해서도 쉽게 배울 수 있으니 시작의 문은 널리 열려 있다는 것이다.

임용자씨는 나이 마흔에 실 도매상을 시작했다. 두 평을 살짝 넘고 세 평이 채 되지 않는 좁은 가게지만 가게 안에 진열된 실들은 억대를 훌쩍 넘는다. 가까운 창고엔 또 몇 배의 제품이 쌓여 있다. “처음 장사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이 동네 가게들 권리금만 수억 원씩 했었다. 그래도 들어올 수가 없었다. 팔려고 내놓은 가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친정 쪽 지인이 가게를 내놓는다는 소식을 듣고 두 말 없이 인수의사를 밝혔다. 전 주인은 계약을 하고나서도 미련을 가져 물리는 바람에 두 번이나 재계약을 하는 우여곡절 끝에 임용자씨는 청계천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의 40대는 지금보다 훨씬 곱고 세파를 겪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한 번도 하지 않던 일, 큰 짐을 싸고 나르는 험한 일들을 해야 했다. 보다 못한 주변 상인들이 일손을 거들어줬다. 뜨개질을 물으러 찾아오는 사람들을 물리지 않는 것은 그렇게 자신이 받은 도움을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IMF 구제금융 사태도 순하게 넘어갔고 장사를 시작하기 잘했다고 여길 정도로 만족스런 시간이 흘렀다. 공무원이던 남편도 어느새 정년퇴직을 해 가게 일을 돕고 있다. “일손이 바쁠 때 도와주지만 남편은 자유인이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한다.” 아침 8시에 가게 문을 여는 것은 남편의 몫이지만 가게를 지키는 것은 임용자씨의 일이다.

요꼬라고 부르던 편직기로 실을 많이 쓰던 가내수공업 공장이 번창하던 때를 거쳐, 실의 수요는 손뜨개질과 핸드메이드 홈드레스 시장으로 넘어갔다. 공장에서 가져가던 대량의 수요는 점점 사라져갔다. 대신 취미로 옷을 만드는 시장 규모는 커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몇 년 전부터 닥친 불황은 시장 분위기를 냉담하게 만들고 있다. “그 비싸던 권리금도 사라졌다. 이제는 빈 가게도 보인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는다. 실은 썩는 물건이 아니고, 최종 완성품처럼 유행을 크게 타지도 않는다. 재고 부담은 있지만 언젠가는 팔리지 않겠나?”

이 시장에서 임용자씨가 크게 재미를 봤던 때는 중국과 교역이 늘어나던 시절이다. 휴대폰 주머니를 중국에서 짜 오면 불티나게 팔렸다. 지금도 중국 제사산업의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아 중국으로 실을 수출한다. “휴대폰 주머니를 중국에서 50원 정도에 짜 왔다. 손이 많이 가서 우리나라는 1000원을 줘도 안 짠다. 중국 교도소에서도 손뜨개질로 휴대폰 주머니를 짰는데, 교도관한테 우리 돈 100만원을 주면 2만개, 3만개씩 짜가지고 올 수 있었다.” 전해 듣기로 중국 재소자에게 돌아가는 대가는 하루에 담배 한 개비. 그래도 소일거리에 서로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소매가는 대략 1만원 남 짓하였으니 한참 재미를 봤지만 너도나도 뛰어들면서 시장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임용자씨가 다시 눈을 돌린 것은 고급 니트 넥타이. 시험 삼아 중국에서 1000개를 짜 왔다. 재료비와 공임으로 대략 1만6000∼1만7000원이 들었다. 백화점 납품을 노렸지만 단가가 맞지 않았다. 1만원 미만이 아니면 납품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접고 말았다.

그는 실을 통해 세상을 본다. 실로 짠 상품을 보면 그 재료와 작업과정이 한눈에 보였다. 나라마다 실마다 특징이 달랐다. 색깔과 품질도 같은 물건이 없었다. 그 물건이 만들어지고 팔리는 흐름 속에 어떻게 자기 자리를 만들 수 있을지 고심한다. “시장에 나온 한 사람들을 대해야 하고 물건을 잘 골라 팔면서 내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과 만나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허술해 보이는 두 평 남짓 가게 안에는 억대를 넘는 제품들이 있다. / 김천

허술해 보이는 두 평 남짓 가게 안에는 억대를 넘는 제품들이 있다. / 김천

실값은 수만원에서 수십만원까지

허술하게 쌓여 있는 실들은 생각보다 비쌌다. 실은 무게 단위로 판다. 국산 실타래 한 파운드에 1만4000원짜리부터 수입 실은 같은 무게에도 수십만원짜리가 있었다. 캐시미어가 섞인 실은 더 없이 비쌌다. 과거에는 큰 타래로 나왔지만 지금은 소포장으로 다루기 쉽게 나온다. 좋은 실은 걸림 없이 부드러워 뜨개질바늘도 잘 움직이고 옷을 만들어도 가볍고 따뜻하다고 했다. 젊은이들은 싸고 빨리 뜰 수 있는 실을 찾는 반면,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이들은 비싼 실을 선호한다고 했다. 뜨개질이야말로 돈 없이는 할 수 없는 취미라고 강조한다. “하다 보면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결과물이 달라지는데 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나. 옆사람이 뜨는 옷을 보면 나도 그걸 갖고 싶은 것이 다 같은 사람마음이다.”

선반에서 그가 꺼내 보여준 스웨터는 단순해 보이지만 대략 50만∼60만원 정도의 실값과 품이 들었다고 했다. 낮은 바닥은 정해져 있지만 높은 곳은 끝이 없어서 그보다 더 비싼 옷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가게에 걸려 있는 예쁜 무늬와 색깔의 옷들은 모두 그의 작품이다. 스스로 색감과 디자인 감각이 있다고 자신한다.

스웨터 한 벌을 완성하는 시간은 대략 보름에서 20일 남짓. 남에게 품을 맡기면 대략 15만원 이상의 공임이 든다. “뜨개질이 좋아서 하는 이들이 맡아서 한다. 품삯을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자기 손으로 배워서 뜨는 것이 훨씬 낫다.” 원하는 형태와 재질로 자기 몸에 맡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고 뜨다가 막히면 임용자씨처럼 고수에게 길을 물으면 된다. 실력이 없으면 원하는 실과 디자인을 골라 편직기로 짜주는 곳에 맡기면 된다. 세상에 한 벌밖에 없는 자기 옷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개 있었다.

임용자씨는 뜨개질도 도를 닦는 일과 같다고 말했다. 단계가 있고 순서가 있으며 어느 한순간 갑자기 잘할 수 없는 것이 뜨개질이다.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내면 그 과정에서 배움이 생기고, 흠을 찾아낼 수 있다. 다음 번엔 그 가시를 없애고 더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 뜨개질이라는 설명이다. 정해진 결론은 없고 한계를 통해 배워나가면서 지금보다 더 나은 다음을 바라며 계속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임용자씨에게 뜨개질 수를 배우려는 이들은 한 사람 두 사람 따로따로 와서 같이 배우고 나중에는 일행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함께 앉아 세상 이야기도 하고 뜨개질 정보도 얻으며 함께 밥도 나눠 먹는 이들이 늘었다.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지만 모두가 선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말의 흉기로 가슴을 도려내려 덤비는 이들도 있는 법이다. “사람이 모인 곳엔 경쟁도 있고 시기와 질투가 넘친다. 그 어떤 말도 한 귀로 듣고 흘려보낸다.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도 상처받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려 한다. 내 표정으로 마음을 드러내면 상대방이 더 잘 알지 않겠나.” 시장 한복판에서 그에게 뜨개질로 길을 묻는 사람들을 대하는 임용자씨의 생각이다. 그의 가게 앞 청계천을 덮고 있던 도로와 고가도로가 사라지고 물이 흘러가는 시대의 변화를 지켜본 사람답게, 만나는 이들을 흘러가는 물처럼 대한다. 인생이란 뜨개질 같아, 한 땀을 떠야 그 다음 바늘을 움직일 수 있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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