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와 극우 사이 ‘제3의 길’에 선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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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 좌·우파의 몰락으로 입증됐지만 프랑스 정치에서 이념은 폐기처분된 지 오래다. 조스팽과 올랑드가 힘겹게 유지해온 프랑스식 ‘제3의 길’은 끝났다. 이제는 중도와 극우 사이에서 또다른 제3의 길을 찾아야 한다.

지난해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와 미국 대선 때 여론조사기관들은 체면을 구겼다. 하지만 프랑스는 달랐다. 4월 23일(현지시간) 치러진 프랑스 대선 1차투표 결과를 거의 정확하게 예측한 것이다. 오독사, BVA, 입소스, 오피니언웨이 등 8개 기관이 선거 직전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앙마르슈(전진)!’의 에마뉘엘 마크롱 득표율이 23.9%, 민족전선(FN)의 마린 르펜이 22.2%다. 실제 결과는 마크롱이 24.01%, 르펜이 21.3%였다. 이 정도면 ‘족집게’ 수준이었다.

여론조사기관들이 1차투표 때처럼 정확하게 결과를 예측한다면, 결선투표 결과는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마크롱은 60~64%의 득표율로 36~40%의 르펜을 누르고 당선될 것으로 점쳐진다. 각국 언론들과 시장은 이제 마크롱의 당선을 거의 기정사실로 본다. 1차투표 이튿날 달러화 대비 유로화 가치는 올랐고, 프랑스 기업들의 주가도 뛰었다. 프랑스 국채와 독일 국채의 수익률 격차는 줄었다.

결선투표에 오른 마린 르펜 프랑스 국민전선 대선후보가 4월 17일 파리에서 열린 대선후보 초청행사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결선투표에 오른 마린 르펜 프랑스 국민전선 대선후보가 4월 17일 파리에서 열린 대선후보 초청행사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안심할 수 없는 마크롱의 우세

하지만 ‘이면의 진실’도 봐야 한다. 2002년 르펜의 아버지인 FN의 장마리 르펜은 결선투표에서 17.8%의 득표에 그쳐 82.2%를 얻은 중도우파 공화국연합(RPR)의 자크 시라크 후보에게 참패했다. 그러나 이번엔 판세가 사뭇 다르다. 1차투표 뒤의 여러 여론조사에서 마크롱의 예상 득표율은 65%를 넘지 않는다. 르펜은 40%에 육박하는 지지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15년 만에 유권자 10명 중 4명이 극우 후보를 지지하게 된 것이다.

일차적인 원인은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후보가 시라크를 지지했던 2002년 결선투표에 비해 좌우합작의 공화국 전선이 느슨해졌다는 점이다. 동시에 르펜이 종래 중도우파의 영토를 파고들었음을 의미한다. FN과 중도우파 지지자들의 수렴현상은 더 이상 이론적 가정이 아니다. 특히 ‘프랑스적인 삶’과 ‘가톨릭 정체성’을 수호하려는 르펜의 비전은 대테러·이민·난민·치안정책 분야에서 전통우파와 일치한다. 여론조사기관 엘라브의 4월 24일 조사에 따르면 중도우파 공화당의 프랑수아 피용 후보를 지지했던 이들 가운데 37%가 결선에서 르펜을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63%는 마크롱에게 갈 것으로 조사됐다.

투표율은 결선의 중요한 변수다. 르펜 지지자들은 80~90% 이상 결선투표장에 갈 것으로 점쳐진다. 반면 소극적 지지가 많은 마크롱 지지자들의 투표율은 미지수다. 충성도와 기권율이 만들어낼 경우의 수에 따라 이변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파리정치대학 정치연구소(CEMPOF)의 세르주 갤럼 연구원은 이변의 매직넘버를 ‘50.07%’로 제시한 바 있다. 르펜 지지자의 90%, 마크롱 지지자의 65%가 투표할 경우 르펜의 득표율이 간신히 과반을 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엘라브 조사에서 ‘공화주의 전통’에 대한 충성도는 좌파가 훨씬 강했다. 사회당 브누아 아몽 후보 지지자의 93%가 마크롱을 지지한 반면, 7%만 르펜을 지지했다. 극좌연대 장 뤼크 멜랑숑 지지자들은 77%가 결선투표에서 마크롱을 찍겠다고 했다. 하지만 멜랑숑에 표를 던졌던 이들 중 23%는 르펜을 지지할 작정이다. 사회당을 찍겠다는 이들의 3배가 넘는다. 극좌와 극우인 멜랑숑과 르펜의 경제, 유럽, 대외관계 공약 싱크로율이 가장 높았음을 보여준다.

포퓰리즘의 확장성 보여준 르펜

더욱 의미 있는 조사 결과는 극우 포퓰리즘의 확장성이다. 마크롱과 르펜 가운데 진정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후보로는 르펜이 47%로 앞섰다. ‘갈 길이 뻔한’ 마크롱의 친기업·개방개혁이 프랑수아 올랑드의 현 사회당 정부처럼 벽에 부딪힌다면 5년 뒤 대선의 승자는 르펜이 될 수 있음을 가늠케 한다

향후 프랑스 정치의 지형도는 몰락한 사회당과 공화주의자들의 표를 누가 얼마나 가져가느냐에 달렸다. 중도 좌·우파의 재구성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가장 주목되는 대목이 바로 중도우파 지지층의 FN 경도 현상이다. 4월 20일 파리 샹젤리제에서는 이슬람국가(IS) 추종자의 총격테러가 일어났다. 이보다 규모가 큰 테러가 발생하거나 유럽연합(EU)이 터키와 맺은 난민협약이 깨져서 더 많은 난민이 프랑스로 들어온다면 르펜의 포퓰리즘은 저변이 확대될 것이 분명하다. 마크롱의 중도개혁 결과에 따라, 멜랑숑에 환호했던 유럽 통합과 세계화의 희생자들이 좌파 포퓰리즘의 처마 밑에 들어올 가능성도 필연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대선 1차투표 후보들 가운데 사회당 출신인 마크롱(23.86%)과 멜랑숑(19.62%), 아몽(6.35%)의 득표율을 합하면 절반(49.83%)에 육박한다. 하지만 사회당의 적자인 아몽의 몰락에서 확인됐듯이 각기 다른 캠프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이합집산의 혼란기에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형국이 될 것을 예고한다.

중도 좌·우파의 몰락으로 입증됐지만 프랑스 정치에서 이념은 폐기처분된 지 오래다. 조스팽과 올랑드가 힘겹게 유지해온 프랑스식 ‘제3의 길’은 끝났다. 중도좌파 사회당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앞서 실천함으로써 우파의 어젠다를 빼앗았지만 토니 블레어의 영국과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독일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그 수명이 다했다. 오히려 좌우 포퓰리즘에 전통 좌파의 어젠다를 빼앗겼다는 사실이 이번 선거과정에서 여실히 증명됐다. 더 이상 좌우 구도는 없다. 이제는 중도와 극우 사이에서 또 다른 제3의 길을 찾아야 한다.

프랑스 대선 1차투표 결과가 발표된 4월 23일 밤 민족전선의 마린 르펜 후보가 결선에 진출하게 된 것에 반대하는 청년들이 파리 시내 바스티유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AFP연합뉴스

프랑스 대선 1차투표 결과가 발표된 4월 23일 밤 민족전선의 마린 르펜 후보가 결선에 진출하게 된 것에 반대하는 청년들이 파리 시내 바스티유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AFP연합뉴스

중간 접점, ‘회색지대’는 어디인가

중간 접점 찾기는 1789년 대혁명 이후 프랑스 역사가 밟아온 길이기도 하다. 대혁명 뒤 100년 동안 백색테러와 적색테러로 혼란을 겪은 뒤에야 탄생한 것이 좌우파의 중도가 합의를 이룬 지금의 구도였다. ‘잊힌 그들’을 대변하는 포퓰리즘은 더 이상 무시해도 좋을 세력이 아니다. 선거연대나 정치적 이해에 따른 거래가 아닌, 더욱 근본적인 콩방시옹(convention·협약)이 필요한 시점이다. 더 이상 물타기로는 되지 않는다. 멜랑숑이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듯이 좌파는 좌파의 가치로 돌아가고, 우파는 우파의 가치에 충실하되 극우화를 경계해야 하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럴 때 건전한 좌파와 우파가 새로운 콩방시옹을 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간지대’를 선점하는 정치인이 시대를 열어가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정치적 회색지대에 있는 유권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1980년대 초 로널드 레이건 아래 모인 ‘레이건 민주당원’들이 그랬다면, 사상 첫 흑인 대통령의 역사를 연 버락 오바마에게는 ‘오바마 공화당원들’이 있었다. 지금의 프랑스에서는 르펜을 추종하는 ‘르펜 중도우파’가 늘어가고 있다. 새로운 접점의 좌표에 따라 이념적 스펙트럼의 발원지인 프랑스 정치판은 요동칠 수밖에 없다.

<김진호 경향신문 국제부 선임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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