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랑을 하겠다면·끝

(6)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이렇게 어려웠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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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손에 쥔 가능성과 한계를 사유하며 20세기의 지지대들이 사라지고 있는 와중에도, 잘 사랑하자는 것이 긴 연재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이었다. 사랑 권하기 어려운 시대, 그래도 사랑을 권한다.

사랑에 관한 글을 쓴 지도 어느덧 5년차다. 그런데도 내 글에 대해 설명하라고 하면 여전히 당황한다. 통상의 연애칼럼이 아닌 건 확실한데 완전히 사회학적인 분석도 아니고, 인문학을 갖다 붙이자니 나의 소양 부족이 인문학에게 좀 미안하고, 꼭 집어 어떤 글이라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며칠 전 친구네 집들이에서 친구 남편에게 내 칼럼을 설명하다 대충 얼버무리고 새삼 고민에 빠졌다. 내 칼럼의 정체성은 뭘까.

‘연애인문학’이라 이름 붙은 강연을 하고,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라는 묘한 제목의 공저를 냈지만 내가 하는 작업에 ‘인문학’ 자를 붙이기 시작한 건 대학원에 기웃거리면서부터고, 그보다 훨씬 오래된 내 정체성은 따로 있다. ‘연애 권하는 여자’다. 대학생 시절 <대학내일>에 처음 쓰기 시작한 칼럼도 연애를 권하는 내용이었다. 당시는 ‘88만원 세대’에 이어 ‘삼포세대’가 화제가 되며 젊은이들의 비(非)연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던 때였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친구들이 연애를 별로 안 했다. 꼭 가난 때문만도 아니고 늘 포기의 형태도 아니었다. 의아해하면서 연애, 해보니 참 좋은데, 어떻게 설득할 방법이 없어 그 칼럼을 썼다. 지금 보면 얼굴이 화끈화끈하지만 그 시절엔 부끄러울 게 없었다. 내 대학생활의 화두는 단연 연애였던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한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건 연애다

내가 연애를 하며, 동시에 연애라는 행위에 대해 끝없이 반추하며 매혹을 느꼈던 이유는 그것이 한 사람을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거듭나게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자아에는 중심으로 모이려는 구심력과 바깥으로 튀어나가려는 원심력이 동시에 작용한다. 기본적으로 우리를 움직이고 생존하게 하는 건 자기를 보존하고 중심으로부터 단단해지려는 구심력이다. 중심을 향하는 이 힘 때문에 인간은 잘 변하려 들지 않고, 실제로도 잘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따금 스스로 변화를 도모하는데, 그 흔하지 않은 순간이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다. 그가 사랑함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기꺼이 노력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랑이라, 사랑하며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기대와 바람에 의거하여 자아를 허물고 새로 짓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원심력은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 더 정확히는 ‘자신을 바꾸어서라도’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구심력이 애써 굳혀 놓은 자아의 경계를 원심력은 좀 더 바깥으로 밀어낸다.

사랑의 모든 순간이 이처럼 극적이진 않다. 보통의 경우 사랑은 자아를 허물고 확장시키기보다는 굳히고 강화한다. 사랑하는 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우리는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이토록 유아(唯我)적인 인간들이 사랑을 하며 때때로 자신의 경계를 넘어 본다. 찰나이지만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 그건 내 이야기이기도 했다. 변화와 확장을 외치는 칼럼을 썼지만 그건 역설적이게도 사실 나 자신이 잘 변하지 않는 보수적인 사람이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내게 사랑은 자아의 구심력으로부터 벗어나 누군가를 위해 더 나아지고자 하는 열망이자 의지였고, 끝끝내 더 나아지는 경험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아주 깊이 사랑했다는 그 사람의 말은 믿지 않지만 그 사람의 변화는 믿는다. 사랑하기 전과 후의 변화가 그 사랑의 밀도다. 좋은 연애는 우리를 반드시 변화시킨다는 것,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타자와 만나고 자아를 갱신해가야 한다는 것이 그 시절 내 칼럼의 요지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덮어놓고 ‘연애 권유’에 머물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사랑을 둘러싼 조건들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사랑에 ‘권유’가 필요한 상황 자체가 문제적이지 않은가. N포 세대, 썸, 혼족, 비혼, 여혐, 한남 등, 요 몇 년 새 화제가 됐던 키워드들이다. 오랫동안 사랑의 주체였던 청년들은 자발과 비자발의 경계에서 포기인지 거부인지 모를 선택을 하고, 사람들은 관계의 무거움을 견디는 대신 보다 가볍고 결속력이 약한 새로운 관계의 형식들을 발명해내고 있다. 혹은 혼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게 됐다.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른 이들을 자본은 환영하고 있다. 자본의 환대 속에서 혼자인 것은 간편하고 안락하다. 우리는 예전만큼 유대가 절실하지 않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멋진 사랑을 하고

한편 경제상황 악화 및 노동시장의 항시적 불안정화와 함께 여성들에 대한 혐오와 공격은 집요해지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능력주의조차 제대로 관철되지 않는 남성중심적 사회 질서는 물론 관계맺기의 규칙 역시 새롭게 협상하고자 하지만, 남성들은 “여성의 권리가 위협으로 변할 때면 자연의 이치에 호소하는 오랜 노선을 따라”(울리히 벡) 현재의 질서를 옹호하기 바쁘다. 여성들의 자원이 페미니즘이라면 남성들의 자원은 진화생물학이다. 이들에 의해 전파되는 속류화된 버전의 진화생물학은 문화가 우리에게 부여한 사랑의 방식마저 자연화하며 이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을 무화시키고 있다. 갈등의 골은 깊어 두 성은 다시 사랑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지난 세기 관계를 안정적으로 지탱해주던 지지대들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데 그나마 비빌 언덕인가 싶은 국가는 어서 빨리 애 낳으라는 타박 외에 하는 게 없다. 결국 모두 개인의 몫이다. 이런 시대에 그래도 사랑을 하겠다면, 우리는 각자 요령껏 자유와 평등의 함수를 풀고 쾌락의 요구에 저항하며 관계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그러니 우연히 발견하고 무릎을 쳤던 어느 신간의 제목처럼 질문할 수밖에.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이렇게 어려웠던가?’

이런 시대, 여전히 사랑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의 사랑이 처해 있는 상황이 이렇게 어렵다는 사실이 사랑의 불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영향 속에서도 어떤 이들은 멋진 사랑을 하고, 실은 우리 모두가 주어진 조건들과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타협하며 있는 힘껏 자신의 사랑을 온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앎과 고민이다. 사랑의 문제에 있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변화는 무엇이며, 이 가운데서 ‘그래도 사랑’하고 이왕이면 더 잘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그런 이야기를 담는다고 담았는데 충분했는지 모르겠다.

인간의 삶은 결코 자족적일 수 없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묻기 좋아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지만 답해보면 알게 된다. 나는 나의 가치를 스스로 확정할 수 없다. 내 삶의 이유는 나 자신으로부터 기인하지 않는다. 홀로 삶을 완결되게 꾸릴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굳이 관계를 맺을 필요도 자기애를 극복할 필요도 없겠지만, 동시에 먹고 싸며 단순히 살아 존재하는 것 외에 삶을 이어갈 이유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부대껴 살며 서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준거점들이 되어 준다. 그리고 연애는 그런 인간 유대의 기초를 배우는 장이다. 본능처럼 질긴 자기애의 관성을 우리는 연애를 통해서야 비로소 넘어보고,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배운다.

우리의 사랑을 어렵게 하는 외부의 상황들이란 차라리 우리 삶의 존재 조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손에 쥔 가능성과 한계를 사유하며 20세기의 지지대들이 사라지고 있는 와중에도, 잘 사랑하자는 것이 긴 연재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이었다. 사랑 권하기 어려운 시대, 그래도 사랑을 권한다. 연재를 끝낼 때가 되어서야 내 칼럼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정지민 칼럼니스트·연애인문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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