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 대우가족을 신화화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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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이 창립 50주년을 맞았고, 김우중 전 회장이 회고록을 내놓았다. 이 흐름에 아트선재센터는 기념전 <기업보고서 : 대우>로 함께 했다. 전시가 열리는 3월 21일은 창립기념일 바로 전날이었다.

올해 초, 서울 삼청동에 자리 잡은 아트선재센터에는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대형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빨강과 검정, 노랑과 파랑, 색색이 물든 상자와 글자로 이루어진 시각적인 대비는 자극적인 문구와 함께 그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 현수막은 장영혜중공업의 개인전 <세 개의 쉬운 비디오 자습서로 보는 삶>의 한 부분으로 준비됐다. 자본주의의 논리가 우리의 삶에 침투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준비한 작업인데, 보는 이에 따라서는 생산과정에서 얻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시가 열린 장소다. 전시가 열린 아트선재센터는 대우문화재단에서 설립한 미술관이고, 미술관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김우중 전 회장의 장녀 김선정과 그가 대표로 있는 관내 하청업체(?) 사무소(SAMUSO)다. 재벌가가 이룬 미술관에서 재벌을 공격하는 전시가 열렸다니, 이래저래 화제로 삼기 좋지 않은가?

전시에서 지워진 기억들

하지만 이 전시를 두고 그렇게 평가하는 논자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만약 그런 평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다지 귀 기울여 목소리를 들을 만한 비평가로 여겨지지는 못할 것이다. 미술계에서 김선정이라는 이름 석 자는 회장님의 큰딸 이름도 아니고, 이수그룹 회장 사모님의 이름도 아니다. 김선정은 김선정일 뿐이며, 지금의 아트선재센터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축을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정반대편에 자리 잡은 대림미술관이 놀이동산 같은 친근함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간다면, 아트선재센터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축이라는 자부심으로 관객들을 압도한다. 재벌가들에 의해 꾸려진 미술관들에서 모기업의 흔적을 지우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반대로 아트선재센터에서 옛 대우그룹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굳이 찾자면 입장권을 사고 받은 영수증에 찍힌 대우문화재단의 이름뿐이다.

장영혜중공업의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의 전시 전경. / 아트선재센터 제공

장영혜중공업의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의 전시 전경. / 아트선재센터 제공

그런 아트선재센터가 갑자기 대우그룹과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우연한 계기는 아니었다. 대우그룹이 창립 50주년을 맞았고, 김우중 전 회장이 회고록을 내놓았다. 이 흐름에 아트선재센터는 기념전 <기업보고서 : 대우>로 함께 했다. 전시가 열리는 3월 21일은 창립기념일 바로 전날이었다. 세간의 시선을 의식한 듯 전시는 조용하게 준비되었으나 전시 소식 자체를 숨기는 것은 어려웠다.

전시는 이 전시가 대우를 신화화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고 부단히 애썼다. 기획을 맡은 한금현 교수는 서문을 통해 이 전시가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대우를 ‘객관적’으로 조명한다고 밝힌다. 갑작스레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도 이 전시의 객관성을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객관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클수록 전시의 객관성은 의심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전시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대우를 신화화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전시가 대우를 어떻게 신화화했느냐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전시에 선택된 기억과 배제된 기억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기록은 어떤 사실들을 취사선택했느냐에 따라 그 기록의 의도를 알 수 있다. 그 전에 전시에서 배제된 기억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교적 전시가 어떤 기억을 지우고 있는지 바로 찾아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우의 영광을 뺀 나머지 전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전시가 빼놓은 두 가지는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은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이 전시에서 배제되고 있다.

첫째로 대우의 몰락이다. 대우그룹의 몰락 자체는 빠른 호흡으로 장면이 전환되는 영상작품에 아주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주의 깊게 전시를 보지 않은 관객이라면 아마 그 내용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우그룹의 몰락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의 관객이라면 이 거대한 기업이 어떻게 스러졌는지 궁금할 법하다. 그 무엇보다 대우가 한국 현대사에 가장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순간은 티코와 마티즈의 전성시대가 아닌 대우 사태와 그 후폭풍이었다. 손실을 이익으로 둔갑시킨 분식회계, 가짜 회계자료를 미끼로 대출을 끌어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는 그 누구도 아닌 김우중 회장과 대우 경영진의 실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에서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취급되고 있다.

두 번째로 전시에서 배제되고 있는 이들은 일하는 사람들, 즉 대우를 만들고 지탱했던 평범한 노동자들이다. 물론 구성만 놓고 볼 때 노동자들의 비중은 그리 작다고 할 수 없다. 문제는 노동자들이 묘사된 방식에 있다. 최첨단의 시설과 단정한 차림새, 건강한 웃음기가 맴도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기업이 빚어낸 산업 프로파간다에 가까운데, 이 이미지들에서 85년의 구로동맹파업과 대우어패럴의 미싱사 심상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보이지 않는다.

전시가 지운 기억은 전시장을 둘러싼 하얀 벽, 어떠한 잡티도 허락하지 않는 무균실 같은 하얀 벽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억들이다. 그 어떤 신화도, 편향도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하얀 방은 역설적으로 신화가 깃들고, 지극히 편향적인 전시를 빚어내고 있었다. <기업보고서 : 대우>가 객관성을 선언한 순간은 전시가 객관성을 띠고 있지 않음을 털어놓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탈색된 기억 속에 숨겨진 의도

이 전시는 대우의 역사를 탈색하여 영광의 기억만 간직한 신화이며, 인간 김우중의 사회적 복권을 위해 기획된 전시다. 이전까지 대우와 김우중 전 회장을 옹호하는 목소리와 함께 최근 몇 년 사이 대우를 복권하려는 시도는 보다 치밀해져 왔다. ‘반(反)DJ 정서’에 의존한 음모론에서 벗어나 김우중 전 회장 본인과 ‘대우가족’들이 직접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시와 맞물린 그 일련의 행위들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나도 5·18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전두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노회한 범죄자의 인정투쟁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

<기업보고서>를 보는 내내 이 전시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할 필요성을 느낀다. 전시장에서 자랑스럽게 펼쳐진 대우의 영광은 그 공동체 안에서 인생을 바친 이름 없는 이들의 헌신으로 빚은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이 발 디딜 곳이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흩어지고 죽어갔다. 글의 서두로 돌아가보자. 장영혜중공업의 글귀는 ‘대우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고쳐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여전히 그 글귀와 <기업보고서>의 풍경은 씁쓸하게 남는다. 더 씁쓸한 것은 이 흐름에 맞설 대항문화는 이 전시의 탈색된 기억을 접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점에 있다.

<권혁빈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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