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혼자 사는 시대, 난 어쩌자고 결혼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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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하기 힘든 상대의 입장이란 가끔 놀라울 정도로 사소한데, 예컨대 청소할 때 걸레는 얼마나 꽉 짜야 하는가 같은 문제다. 결혼하면 치약 짜는 법과 수저 꽂는 법으로 싸운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연재를 시작하며 나는 도래할 ‘비혼시대’가 빚어낼 새로운 관계의 풍경에 대해 열정적으로 떠들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기혼자다. 대세는 ‘나 혼자 산다’인데 촌스럽게 일찍 결혼해버렸다. 별 생각이 없어서 그랬다. 결혼의 의미와 함께 사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기 시작한 건 결혼 이후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물론 어렵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부동산 가격 때문에 그렇고, 오지랖 넓은 가족들과 친척들 때문에도 그렇고, 가부장적인 문화와 제도 때문에 가장 결정적으로 그렇다. 그러나 그 모든 관문을 어찌어찌 통과해 굳건한 사랑과 신뢰로 결합한 부부에게도 결혼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 어려움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예전보다 더 어려워진 ‘함께 살기’

함께 산다는 것은 우선 매일매일 나와는 다른 ‘차이’와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며,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결혼을 해서 같이 살아보면 왜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그 말을 그렇게 강조했는지 깨닫게 된다. 사람이 고작 둘인데, 상대의 입장을 포용하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포용하기 힘든 상대의 입장이란 가끔 놀라울 정도로 사소한데, 예컨대 청소할 때 걸레는 얼마나 꽉 짜야 하는가 같은 문제다. 결혼하면 치약 짜는 법과 수저 꽂는 법으로 싸운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이런 차이들을 끝없이 조율해나가는 것도 피로하지만, 또 하나 넘어야 할 산이 있었으니 노동의 배분 문제다. 결혼을 하면 한 가정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동이 필요한지 깨닫게 된다. 종일 치워도 새롭게 치울 것이 있고, 세 끼 밥만 차리고 치워도 하루가 간다. 이걸 둘이서 나눠 해야 하는데, 인간이란 받는 것은 적게 느끼고 주는 것은 크다고 여기는 존재라 문제다. 나와 남편은 둘 다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라 비교적 반반에 가까운 배분이 쉬운 편이었다. 비교우위론에 입각하여 남편은 요리를, 나는 정리정돈과 빨래를 맡게 됐다. 청소는 같이 했다. 이 균형에 대체로 만족하면서도 우리는 서로 자신이 좀 더 많이 한다고 느꼈다. 상대가 몰라준다 싶으면 그렇게 서운했다. 혼자는, 쉽다. 어차피 혼자 하는 거 남보다 더 한다고 억울할 일도 없고, 가사 중 일부를 외주화하기로 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 혼자 사는 일이란 얼마나 편한가! 왜 굳이 같이 살려는지 물어야지, 비혼이 늘어나는 데는 설명이 필요 없어 보인다.

이러한 감각은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일부 사람들만의 것은 아닌 듯하다. 울리히 벡, 엘리자베스 벡 게른샤임 부부는 현대의 부부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는 구조적인 요인이 있다고 말한다. 함께 살기는 예전보다 확실히 더 어려워진 게 맞다는 것이다. 그 어려움의 핵심을 ‘자유’와 ‘평등’의 문제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평등의 문제는 ‘가정 내의 노동을 어떻게 배분하는 것이 공평한가’ 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성별 분업이 확실하던 과거 산업사회에서는 성별에 따라 져야 할 짐이 미리 정해져 있었다. 각자 정해져 있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평등을 지향하는 현대의 부부들에게는 정해진 것이란 없고 모든 것이 협상의 대상이다. 많은 젊은 부부들에게 가사의 피로란 노동의 피로이기 전에 이 끝없는 협상이 야기하는 피로라 할 수 있다. 정답은 없고, 협상은 지난하다.

여성들이 보통 더 많은 짐을 지게 된다. 교육의 기회가 가장 먼저 평등해지며 여성들이 빠르게 밖에서 일하게 된 것에 비해 남성들의 가사 분담은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5 일·가정 양립 지표’에 따르면 한국 남성들의 가사노동 시간은 여성들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남성 개인들이 가정에 좀 더 헌신하려 해도 노동환경이 협조적이지 않다. 한국에서 일과 가정은 남녀 모두에게 양립이 아니라 양자택일의 대상이다. 더 많은 짐을 진 여성들 쪽에 당연히 불만과 요구가 많다. 반면 남성들은 현상유지를 바라며 아내의 문제 제기를 회피한다. 흔히 말하는 ‘추격자-도망자 부부 모델’이다. 미국에서 부부관계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로스블럼 박사는 이런 때 여성들은 더 많은 짐을 지고 있으면서 사태를 해결하고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한 노력까지 자신이 모두 떠맡아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다고 말한다. 불평등한 상황은 거꾸로 평등을 더욱 강력하게 요청한다. 평등에 대한 목소리는 커지지만, 부부들은 여전히 어떻게 해야 평등의 이상에 이를 수 있는지 잘 모른다.

자유의 문제란 개인성에 대한 우리들의 감각이 변화한 것과 관련이 있다. 타인이 나의 삶을 침범해 들어오는 것을 우리가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함께 사는 일이란 앞서 살펴봤듯 나의 일부를 일상적으로 포기하는 일이다. 함께 사는 한, 내겐 너무 당연한 습관조차 우리는 자유롭게 고수할 수 없다. 여성들의 경제활동을 제한함으로써 같이 사는 것이 숙명이었던 시절, 우리는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개인성의 포기를 견딜 수 있었다. 정확히는 포기를 담당하는 성별이 따로 있었다.

함께 사는 일이란 나를 포기하는 일

그러나 남녀 모두에게 선언적으로나마 동등한 자유가 주어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포기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상황은 물론 해방이었지만, 동시에 함께 살기의 능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됐다. 독립과 자율을 바탕으로 진정 자유로운 결사체들이 탄생해야 할 것 같은데 결론은 그리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제껏 누려온 것들을 성찰하고 여성들과 새롭게 관계 맺으려는 남성들은 소수였다. 때마침 일어난 소비사회로의 전환은 관계를 대하는 개인들의 태도를 쾌락 중심적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타인을 예전만큼 잘 참을 수 없게 됐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탄생이다. 그래서 벡 부부는 묻는다. “평등하고 자유롭기를 원하는 두 개인은 과연 어떻게 두 사람의 사랑이 자라날 수 있을 공동의 지반을 찾아낼 수 있을까?” 새 시대의 부부들은 ‘길 없는 길’을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50대 50의 자유와 평등의 기계적인 적용이 답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부부가 자발적으로 자신들만의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할 텐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은 자주 여성들의 희생을 요청한다는 것이 문제다. 여성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희생이 충분히 주체적인지 자기 마음 역시 심문해야 한다. 한편 불안정한 노동시장은 남성들을 여성혐오적인 논리에 휘둘리기 쉽게 몰아가고 있다. 남성들은 불안정한 자신의 지위를 여성들을 후려치는 가상적인 방식으로 보상받으려 하고, 생물학적 질서를 들먹이며 여성들에게 과거의 역할을 강요하기도 한다. 불거진 자유와 평등의 문제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안정적인 부부 모델은 전통적인 성 역할에 충실한 부부 모델이다. 더 행복해서가 아니다. 이들에게는 기댈 문화적 이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부부들보다 자신들의 고통을 해명할 언어들을 더 많이 가지고 있고, 해결방법도 더 쉽게 찾아낸다.

함께 살기를 받쳐주던 지지대들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굳이 같이 살기로 연을 맺었으니, 나와 남편 포함, 새 시대의 부부들은 더 많이 노력해야 할 운명이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우리가 함께 사는 일에서 발견한 가치가 무엇인지, 도달하고자 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랑은 어떤 모습인지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도달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완성된 관계는 전에 없이 새롭고 멋질 것이다.

<정지민 칼럼니스트·연애인문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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