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청춘 남녀에게 사랑할 ‘여력’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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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들은 사랑으로부터 취할 것만을 정확히 취하되 사랑이 요구하는 다른 비용들은 최소화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의 연애는 외로움이 빚어내는 관계를 향한 ‘인력’과, 그 관계가 하루가 빠듯한 나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척력’이 이루는 묘한 균형 상태에 걸쳐 있었다.

사랑을 온전히 경험할 여유가 없는 요새의 청춘들은 목하 기묘한 사랑의 형태를 개발하는 중인가 보다. 최근 노량진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청춘남녀들의 사랑을 스케치한 어느 기사(<경향신문> 2월 4일자, 불안한 미래 앞에 사랑도 인간관계도 ‘유예’… ‘괜히 얽히기 싫어요, 공부 리듬 깨질까봐’)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청년과 사랑이 한몸인 이유

기사 속 청춘들은 사랑으로부터 취할 것만을 정확히 취하되 사랑이 요구하는 다른 비용들은 최소화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의 연애는 외로움이 빚어내는 관계를 향한 ‘인력’과 그 관계가 하루가 빠듯한 나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척력’이 이루는 묘한 균형상태에 걸쳐 있었다. 인터뷰이는 자신의 연애가 육체적인 필요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로 ‘인스턴트 러브’였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왜 사랑이 아닌가’ 하는 항변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물음은 보다 정직한 다른 곳을 향한다. ‘이런 것도 과연 사랑일 수 있을까?’

흔히 사랑을 청춘의 특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청년들의 사랑과 연애는 당사자의 문제를 넘어 자주 사회적인 관심거리로 부상한다. ‘가난한 현재의 젊은 세대는 섹스할 자유도 없다’던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 세대> (2007)의 도발적인 서두를 기억할 것이다. 불안정한 노동시장과 저임금으로 연인과 자유롭게 부둥켜안고 있을 방 하나 갖지 못하는 20대의 상황은 그들의 곤궁을 적실하게 드러냈고, 그에 힘입어 ‘사랑은 88만원보다 비싸다’, ‘88만원 세대의 슬픈 사랑’ 같은 제목을 단 기사들이 뒤를 이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청년들의 사랑을 염려하는 많은 목소리는 사실 인구 재생산에 대한 우려로부터 나온다. 국가와 사회의 재생산은 무엇보다 인구의 재생산일 수밖에 없기에 젊은이들의 사랑을 관리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권력의 관심사였다. 우수한 인재들끼리 결합시켜 유전자를 개량하겠다는 우생학적 시도부터, 조혼(早婚)이나 낙태를 장려하거나 금지하는 것, 아주 가깝게는 최근 관 차원에서 벌이는 대규모 미혼남녀 미팅, 여성들의 하향결혼을 유도하기 위한 정책 제안 같은 것들이 모두 사랑-재생산에 권력이 개입한 예다. 실제로, <88만원 세대> 이후 나온 가난한 청년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혼인율과 출산율 급감을 배경으로 했기에 심각한 문제로 인식됐다. 2011년 ‘삼포세대’라는 말이 등장하며 ‘88만원 세대’를 빠르게 대체한 것 역시 이와 유관할 것이다. 연애 포기는 결혼, 출산 포기의 입구였기에 진정 문제였다.

하지만 청년들의 사랑을 단지 재생산의 수단으로만 얘기하는 건 어딘가 미진한 느낌이 든다. 그런 관점으로는 당사자들이 사랑과 연애로부터 느끼는 효능감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랑은 보다 더 내밀하고 근본적인 지점에서 청년이라는 특수한 지위(status)와 연결돼 있는 것 같다.

이는 가장 먼저 사랑이 행하는 ‘인정(認定)’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사랑의 첫 느낌을 떠올려보자. 사랑의 느낌은 자아가 팽창하는 느낌과 닮아 있다. 예상치 못한 고백을 받았을 때, 불확실성을 안고 던진 고백에 상대의 화답을 받았을 때 우리의 자아는 팽창한다.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어떤 일에 실패했거나 심리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을 때 사랑에 빠지기 쉬운 이유는 그래서다. 우리는 사회적으로는 잃어버린, 그 고양되는 느낌을 사랑을 통해 보상받고자 한다. 사랑은 나를 다시 발견해주며, 내가 내 생각만큼 초라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눈부시게 일깨워준다. 에바 일루즈는 이러한 사랑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사랑은 인정이라는 강력한 닻을 제공해준다. 누군가의 가치를 지각하고 구성해주는 일이 곧 사랑이다.”

사랑은 그래서 무엇보다도 청년들의 일이다. 청년들은 세계의 입구에서 가능성밖에 쥔 것이 없는 불안정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청년기가 신체적으로 ‘혈기 왕성’한 시기라는 것도 부차적이다. 그건 차라리 섹스와 관련돼 보인다. 이해에 어두워 ‘순수’한 사랑을 경험하기 좋은 시기라는 말도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인생의 시기마다 우리는 각 시기에 필요한 것들을 고려해 사랑을 하고, 청년기도 마찬가지다. 청년기에 사랑이 중요한 진짜 이유는 사랑이 곧 인정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안정된 이들은 사랑에 갈급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자신을 증명할 기회가 아직 오지 않은 이들이야말로 사랑에 목마르다. 이때의 사랑은 사회의 승인을 대체하고 대리한다.

사랑이 ‘여력’을 필수적으로 요청한다는 점도 청년들을 사랑에 있어 특권적인 위치에 놓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존재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도모한 사랑이 사실은 불안의 원천이라는 사실이 곧 밝혀지기 때문이다. 카톡 메시지의 ‘1’이 사라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려본 사람이라면 사랑이 불안의 원천이라는 말에 부연이 필요 없을 것이다. 팽창했던 자아는 쪼그라들고, 우리는 상대를 채근하기 시작한다. 이 불안은 기본적으로 내게 너무나 큰 기쁨을 선사하는 기쁨의 원천이 나의 내부에 있지 않고 외부에 있다는 데서 발생한다. 외부는 내가 통제할 수 없고, 우리는 모두 시간 속에서 흔들리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연인이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주었던 사랑을 거두겠다고 해도 나는 호소하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불안을 감당할 ‘여력’이 필요하다. 이 여력은 개인의 성정(멘탈)과도 관련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물리적인 것이다. 물리적인 여력이란 불안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스스로를 추슬러 다시 걸어나올 수 있을 때까지의 충분한 시간을 말한다. 복잡하게 썼지만 술 마시고 며칠 널브러져 있어도 별 문제 없는, 시간적이고 정서적인 널널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과거 대학시절은 다른 게 아니라 사랑과 인정에 목마른 청년들이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낭만의 시절일 수 있었다.

그 여력에 힘입을 때, 사랑의 불안은 성장의 자양분일 수 있다. 마음껏 불안한 동안, 그 속에서 우리는 자기 마음의 동태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연인을 타인으로 인정하는 법과 불안을 다스리는 법을 배운다. 삶에 대한 통찰 역시 길어낸다. 이를테면 나의 외부에 존재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사랑만이 아니라 삶 도처에 있으며, 그게 우리의 존재조건이라는 것, 사랑이 그러하듯 나의 존재 자체가 타인들의 시선과 인정, 선의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안을 견디는 사이 우리는 타인들과 생 앞에 좀 더 겸허해질 수 있다. 이로써 청년과 사랑의 연결고리는 완성된다. 청년기는 사랑에 가장 목마른 시기이며,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폭도 가장 큰 시기인 것이다.

끝나지 않는 가난한 사랑 노래

88만원 세대론이 등장한 지 10년이 흘렀다. 삼포세대는 어느덧 N포세대가 됐다. 혼인율과 출산율 감소 추세는 더욱 뚜렷하다. 국가와 미디어는 덮어놓고 연애, 결혼, 출산을 권유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사랑과 청년이 이어졌던 고리들을 생각한다면 진짜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노동시장의 불안정한 상황과 심해지는 경쟁 속에서 모든 시간을 오지 않은 미래를 앞당기는 데 써야 하는 청년들은 더 이상 불안 속에서 자신과 상대를 탐구하고 사랑으로부터 더 나은 통찰을 길어낼 여유가 없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살아남기 위해 이것을, 이 모든 것들을 버리고 있다는 것을.

<정지민 칼럼니스트·연애인문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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