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25분 만에 귀순해 10년 만에 쓴 박사모-귀순의 여정은 짧고 정착의 시간은 길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북한에서 한국으로 25분 만에 넘어온 후 10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뿐만 아니라 이곳에서의 경험을 궤적삼아 타자와 분단, 그리고 통일문제를 학문으로 더듬게 된 것은 결코 우연적이고 우회적인 경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에 와 있는 3만명 탈북민 중 북한에서 한국까지 25분 만에 온 사례는 내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러나 탈북민이 이곳으로 오기까지 10년 넘는 시간과 세월을 보냈든, 몇 년 혹은 몇 달이 걸렸든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생사를 가르는 절체절명의 무게와 경험에서는 누구랄 것 없이 똑같다는 것이다. 어느 북한연구자는 내게 탈북민 한 명이 한국에 입국하기까지 서너 명 이상이 실패하거나 잘못됐을 거란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한 명 한 명이 이 땅에서 잘 정착하고 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휴전선을 넘어와 10년 넘게 살았던 이곳은 자유와 풍요만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외부에서 유입된 마이너리티를 겁박하기에 충분한 자유의 공포와 시선의 폭력이 존재하는 땅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늘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삶과 죽음을 가르며 온 이 땅에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과 떳떳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뿐만 아니라 많은 탈북민이 빈한한 처지에서도 버티며 억세게 살아가는 의지의 원천이자 자양분이라고 생각한다.

주승현씨가 박사학위 취득 후 부산의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교사로 지내던 시절 학생들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다. / 필자 제공

주승현씨가 박사학위 취득 후 부산의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교사로 지내던 시절 학생들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다. / 필자 제공

나를 친구로 대해준 지방출신 교우들

한국에 온 지 1년도 안 돼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입학식 때 찾아와서 축하해줄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연고가 없었지만 새출발은 거기서부터였다. 첫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지방 출신 몇 명이 나에게 슬금슬금 접근해 왔다. 부푼 희망을 가지고 서울로 상경했지만 수도권 출신들에게 이물감을 느낀 그들이 남과 북의 어마어마한 거리감과 이질감에도 개의치 않고 나를 자신들의 집단에 포함시킨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역설의 미학처럼 한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지역·출신 간의 균열도 알게 됐다. 모호한 경계의 불분명성과 기묘한 관계의 임의성을 보면서 남북을 넘어서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어쩌면 지역문제일 수도 있겠다고 봤다. 정이 그리운 나에게 정으로 다가온 그들처럼 수도권 친구들은 보다 현실적으로 나를 대했다. 함께 동아리와 봉사활동을 하면서 수도권에서 적응하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친구들이 휴학하고 군복무를 할 때 어려운 형편이지만 그들의 면회와 외박을 챙겼다. 북측의 DMZ에서 근무했던 나처럼 남측의 DMZ에서 수색대원으로 근무를 하는 절친을 찾아서 강원도 민통선지역으로 면회 갈 때면 묘한 파토스의 정체에 두리번거렸다.

친구들의 부모와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가족행사나 명절에도 어김없이 불러주는 관계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끔 친구들이 세상이 주는 무게가 버거워 잠수도 타고 고시준비로 시골에 파묻혀 지날 때도 그들의 부모님에게서 전해지는 정성만큼은 끊어진 적이 없다. 오늘까지도 김치며 반찬이며 온갖 정성들이 배달되고, 찾아 뵐 때마다 받는 용돈도 같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처음 인연을 맺은 이후 오랫동안 북한출신이나 북한사정에 대해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분들이 현금에 자칭 ‘북한전문가’로 바뀌어져 있는 연원은 전혀 알 수 없었던 거다. 나를 알고부터 앞에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북한 관련 뉴스와 탈북민 관련 프로그램들을 챙겨보면서 나름 전문가가 됐다는 친구 아버지의 취중진담을 듣고 마음이 찡해왔다. 막냇자식의 혼사 대상으로 TV에서 본 탈북미녀를 소개해 달라는 난감한 부탁도 불쑥 온다. 남북관계는 악화되고 서로의 일상은 무관심으로 치닫고 있지만 그 속에도 개별적 관계의 명맥은 간간이 이어지기도 한다. 더 이상 나는 이곳에서 외로운 사람은 아니다.

함께 입학했던 친구들이 군대에 다녀오느라 먼저 졸업하고 취직했던 날들을 뒤로 하고 석사과정에 입학한 후 사정이 바뀌었다. 나중에 졸업하고 취직한 학교친구들이 밥도 사주고 필요한 것을 챙겨줬던 것이다. 지금은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탈북민이 적지 않지만 그때는 찾아보기 어려울 때여서 탈북민 친구들도 자랑스러워하며 데리고 다녔다. 학부 때보다 좋았던 것은 하고 싶은 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학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던 터라 연장선상에서 분단문제를 중심으로 공부했다. 나태함과 지루함으로 마음이 허허로워질 때면 무작정 차를 몰아 산과 바다며 농촌지역을 다녔다. 트렁크에 텐트가 구비돼 있어 시골 땅에 홀로 누워서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들이 그렇게 맑고 깊을 수가 없었다. 어느 여름날인가 혼자 치악산을 오르고 있었는데 일행이 없는 등산객을 만나 동행한 적이 있었다. 함께 정상까지 오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내 출신과 사정이 밝혀졌다. 헤어지면서 이메일만 교환했는데, 그 후 공부하는 데 보탬하라면서 꼬박꼬박 생활비가 보내졌다. 그가 누군지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몰랐고, 석사과정 졸업 후 감사의 인사를 메일로 드렸다. 나를 대신해 다른 탈북학생을 후원하겠다고 하기에 후배 탈북민을 메일로 보내드렸다. 아직도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이들의 관심과 나눔이 있어 졸업할 수 있었다. 때론 부박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살 만도 했다.

적지 않은 이들의 관심과 배려로 졸업

박사과정을 마치고 기업에 취직해 일하던 나는 논문을 쓰기 위해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이미 ‘박사백수’, ‘박사홍수’가 심각한 지경이고, 국내 출신 학자들의 위기감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치학과 분단문제의 토대에서 우리가 마주해야 할 통일을 더 진중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학위를 받은 후 생계도 보장돼 있지 않고 취업해 있던 안정된 기업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었지만 불문곡직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어려움이 컸다. 통일 관련 논문 때문에 남북분단사를 들여다보는 작업이 그처럼 힘들 줄은 몰랐다. 굴절되고 왜곡된 분단사와 근현대사에서 드러난 우리 민족의 상흔이 그토록 잔인하고 처절할 수가 없었다. 그 속에서 언뜻언뜻 자신도 보여서 더 고통스러운 적도 있었다.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어서 논문을 쓰던 중 두 번 정도 병원에도 실려 갔다.

집에서 작업을 할 때면 잠자리에 드는 것이 제일 걱정됐다. 한 번 누우면 다시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을 만큼 피곤에 차 있었던 것이다. 몇 번 그런 경험이 있어서 아예 책상에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대어 공부했다. 잠을 침대가 아니라 앉아서 잤던 것이다. 낮에는 도서관이 아닌 임진각에 갔다. 도서관 자료들은 필요할 때마다 확보할 수 있지만 그곳에서는 오래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머리를 식힐 겸 임진각에 갔는데, 임진각 내 북한을 보며 작업을 할 수 있는 2층의 커피숍 공간을 발견하고는 그 후론 고향 쪽을 바라보며 공부를 했다. 그곳에서 볼 수 있는 하늘 아래에 마침 내가 근무했던 북측의 비무장지대도 있었다. 1년 남짓한 기간에 수개월 다녔으니 그곳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동안 임진각에서 근무하는 사람보다 내가 더 그곳에 많이 갔을 법도 했다. 내가 넘어온 휴전선 지역이 임진각 근처이기도 했고, 북측에서 ‘자유로’ 고속화도로를 바라봤던 경험도 있었다. 새벽에 그 지역으로 가면 DMZ 특유의 상쾌한 공기가 정신과 몸을 정화시킨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자유로 고속화도로로 운전하다보면 10년 전의 나처럼 그곳을 보고 있을 북측사람들의 모습이 절로 다가온다.

북한에서 한국으로 25분 만에 넘어온 후 10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서 훌쩍 30대로 넘어선 것이다. 학부와 대학원에서뿐만 아니라 이곳에서의 경험을 궤적삼아 타자와 분단, 그리고 통일문제를 학문으로 더듬게 된 것은 결코 우연적이고 우회적인 경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가짐과는 다르게 정서와 문화에 정향된 변화도 있다. 명절이 오면 외롭고 그리워서 몸서리칠 만큼 힘들었던 시절마저도 어느덧 추억이 된 것이다. 명절 때면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학교·회사 인연들, 갈 곳이 없어 축구로 명절을 보내는 고향사람들과 두루 어울리다 보면 번다하고 바쁜 명절을 보내고 있다. 입맛도 바뀌었다. 한국에 온 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라면으로 때우던 나에게 고향음식은 유일한 낙이자 영양소였다. 고향음식 한 번 먹어보려고 비싼 선물을 사들고 부모님과 함께 온 친구들의 집을 기웃거렸던 시절도 옛말이 됐다. 이제는 되레고향음식에 적응하려고 애써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첫 입학식 때 찾아와 축하해준 사람이 없었지만 학부와 대학원 졸업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만큼의 꽃다발을 받기도 했다.

치유의 시간이 필요한 탈북민 자녀들

박사학위 취득 후의 앞날은 학부와 석사 이후보다 더 어둑했지만 이미 각오를 했던 터라 실망과 회의감은 적었다.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전공했지만 시간강사 자리도 얻기 어려웠고, 기초수급비 정도의 강사료로 핍진한 생활을 연명하면서도 후배들의 밥만큼은 챙기려 했다. 어느 고향후배는 어렵게 박사학위를 취득한 선배들이 변변한 직업도 없이 쓰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학문의 길을 포기했노라고 했다. 그럼에도 후회 없는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 있는 기량으로 좋아하는 강단에 설 수 있다는 그 한 가지뿐이었다. 북한출신의 박사지만 연구활동이나 강단에 설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는 것에 대해서도 굳이 불평하거나 편벽하려 하지 않았다. 한국의 수많은 박사들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박사학위를 따더라도 냉혹한 현실에 처해 있음을 이미 봐 왔던 터라 탈북출신 연구자들의 형편만을 호소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통일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이들과 함께하는 준비가 더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만은 첨언할 수 있다.

박사학위 취득 후 부산으로 내려간 나는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에서 사감 겸 교사로 지냈다. 그때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후과정(포스닥)의 초청장이 왔지만 심신이 고갈되고 체력마저 바닥났던 터라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에 와서 학교에서 따돌림당하고 상처받은 탈북아이들도 나만큼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학생 중 절반의 친구들이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어서 한국말도 거의 못했다. 그들이 분단에 의해 탈각된 탈북민의 면면을 보여준 아이들이라면 한반도에 실재하는 분단을 몸으로 보여준 아이들도 있었다. 예닐곱 살쯤으로 보이는 친구는 알고 보니 열다섯이었다. 또래 아이보다 키가 20㎝ 넘게 작았고, 몸무게도 35㎏ 정도밖에 안 됐다. 북한에서 워낙 어렵게 살았던 탓이었다. 다른 한 명은 한국에 와서 초등학교 6학년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했지만 북한출신이라는 이유와 말투 탓에 놀림을 받았고,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한 학기 만에 심각한 원형탈모가 찾아왔다. 원형탈모가 시작돼 머리를 완전히 밀었던 친구는 대안학교로 와서 1년 만에 원래의 머리를 되찾았다. 그렇게 머리숱이 많은 아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탈북민 중 어른들은 비교적 편견과 차별의 가시밭길을 담담하게 걸어간다. 그러나 탈북민 자녀라는 이유로 어려서부터 놀림 받아 상처가 깊은 탈북청소년들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보다 나은 사회로 갈 수 없다.

25분의 탈북 노정이었지만 그날에 착종된 트라우마는 10년 넘게 나를 괴롭혔다. 초기에는 눈을 감으면 악몽이, 눈을 뜨면 현실이 두려워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못했지만 극복했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DMZ의 한가운데에서 지뢰를 밟고 서 있는 고약한 악몽만큼은 계속 따라다닌다. 어느 정도 충분한 면역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탈북민의 삶을 매일처럼 언론이나 몸으로 직접 마주하기에 분단이 주는 통증을 날마다 느끼며 살고 있다. 어쩌면 천착의 범위를 북한과 통일문제에 둔 업보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살아야겠다는 절박함이 있어 비무장을 통한 탈북 길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했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통일에 대한 간절함으로 살아왔다. 지금 나는 또 다른 오기와 갈급함으로 하루하루를 마주한다. 그것은 바로 통일이다. 단순히 고향을 북한에 둔 출신으로, 통일을 학문으로 공부한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남북의 분단체제를 경험한 경험자로서, 그리고 한반도에 존재하는 수많은 분단의 조난자 중 한 명으로서 통일을 갈망하고 갈구한다. 그리고 그 통일은 소수가 원하고 다수가 외면하는 그런 불가해한 통일이 아니라 기형적인 분단 안에서 살아온 남북한 주민들이 비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강한 삶의 공동체이고 터전이기를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다.

<주승현(전주 기전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