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낭만적 사랑’이 ‘자유시장’을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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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계산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너무 계산을 몰라서도 안 된다는 것, 끌리되 ‘옳은’ 사람에게 끌려야 한다는 것이 낭만적 사랑의 공리다.

<투쟁 영역의 확장>(미셸 우엘벡 지음, 열린책들 펴냄)이라는 묘한 제목의 소설이 있다. 소설에는 티스랑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은 갖췄지만 여성들과의 섹스에 필요한 매력자본은 1도 갖추지 못해 소설 내내 섹스에 실패하는 인물이다. 그는 추남인 데다 탈모가 진행 중이며 뚱뚱한데, 설상가상으로 화술도 후지다.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클럽에서 또 한 번 거절당하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그에게 주인공 ‘나’는 이제 ‘규칙’의 세계에서 ‘투쟁’의 세계로 나아갈 때라고 속삭인다. 섹스장(場)의 정해진 규칙을 지키며 고분고분 거절당하고 있을 게 아니라 그 규칙 자체를 거부하며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티스랑에게 칼을 쥐어준다. “네가 원하는 여자들을 너도 소유할 수 있어. 오늘 저녁부터 살인자가 되는 거야. 날 믿어, 이 친구야. 너한테 남은 기회는 그것뿐이야.”

‘나’는 완전히 자유로운 경제체제에서 불평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듯이, 완전히 자유로운 섹스체제에서도 불평등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풍족한 매력자본을 바탕으로 화려하고 짜릿한 성생활을 즐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티스랑처럼 자위밖에 허락되지 않는 외로운 생들이 있다. 섹스체제의 ‘절대 빈곤층’인 셈이다. 이 냉혹한 차별 체제를 시정하기 위해 우리는 경제영역에 있어서는 국가의 개입을 승인했다. 국가는 빈곤층을 구제하고 해고를 막고 평등을 진작시킬 의무가 있다. 그러나 섹스의 영역에는 아무것도 없다. 불평등은 그대로 관철된다. 그러니 투쟁영역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김상민 기자

/ 김상민 기자

자유연애의 승자와 패자들

남성인 주인공이 날카롭게 부조리를 느끼는 영역은 ‘자유 섹스체제’지만, 연애라고 다르지 않다. 두 영역은 모두 자유시장처럼 작동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현대인들은 가게의 진열장을 바라보듯 사랑의 대상을 고른다고 말한다. 소비자이자 상품으로서 우리는 ‘자유경쟁’하며 ‘상호 간의 균등한 교환’을 추구한다. “자신들의 교환가치의 한계를 생각하고 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아냈다는 느낌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당연히 승자와 패자가 있다. 거래에 성공한 승자들은 연애를 통해 다시 한 번 스스로의 가치를 높인다. 패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경쟁하는 사이 너덜너덜해진 자존감과 익숙한 자괴감뿐이다. 어떤 이들은 연애를 포기한다. 이들을 구원할 방법은 없다. 완전 자유시장이란 철저한 능력주의의 세계다.

능력주의는 원래도 비판하기 힘들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더욱 그런 것 같다. 사랑에는 요즘 말로 ‘케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훨씬 못한 상대를 만나는 사람에게 흔히 ‘유니세프’나 ‘마더 테레사’ 같은 말을 쓴다. 얼핏 봐서는 사랑할 구석이 별로 없는 이를 사랑하고 있으니 인류애 차원에서 복지를 실천하는 게 아니냐는 거다. 케미가 터지지 않는데, 유니세프도 아니고 어떻게 사랑을 다시 배분하겠는가? 사랑은 시장의 논리를 따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두 사람 사이의 사적인 문제로 여겨진다. 억울해도 각자 알아서 해결할 일인 것이다. 우엘벡의 <투쟁 영역의 확장>의 흥미로운 점은 이 사랑-섹스의 능력주의를 겨냥했다는 점이다.

사랑을 아주 사적인 끌림의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장의 논리를 따르는 교환이라고 인정하는 이 모순은 사실 ‘낭만적 사랑’ 자체가 안고 있는 긴장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낭만적 사랑은 18세기 후반 서구에서 발생하여 오늘날 우리 모두가 대체로 따르고 있는 사랑의 형식이다. 그 이전까지 사랑과 결혼은 반드시 합치될 필요가 없었다. 결혼은 정치적 동맹을 위한 수단이거나 경제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결혼의 당사자들은 별로 권한이 없었으며, 가문의 수장이나 가부장들이 계산하고 결정했다.

이런 가운데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 바탕으로 결혼을 이루겠다고 주장한 것이 자유연애사상이었다. 사랑-연애-결혼은 처음으로 묶인다. 사랑에 빠져 연애하고, 이를 바탕으로 결혼하는 이 새로운 연속체가 ‘낭만적 사랑’이다. 이제 개인들은 가문의 요구로부터 벗어나 각자 마음의 소리를 따를 수 있게 됐다. 과연 ‘낭만적’이다. 그러나 그게 이전의 결혼에서 고려하던 돈, 사회적 지위, 상속과 같은 이익들에 자유연애가 완전히 무심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결혼과 결부된 그 이익들은 이제 자유연애를 통해 성취해야 할 목표가 됐다. 이익의 고려가 자유연애의 논리를 따라 재조직된 것이다.

물론 열정에 눈이 멀어 다른 계급의 사람을 사랑하게 되거나 이익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는 일은 왕왕 일어났다. 그런 사랑에도 ‘낭만적’이라는 이름은 붙었다. 그러나 진짜 낭만적인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다. 사랑의 요구에 따랐을 뿐 이익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이익에도 살뜰히 부합하는 사랑이야말로 낭만적이었다. 운명적 사랑에 빠진 상대가 알고 보니 건물주인 것, 이게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우리의 진정한 ‘로망’인 것이다.

너무 계산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너무 계산을 몰라서도 안 된다는 것, 끌리되 ‘옳은’ 사람에게 끌려야 한다는 것이 낭만적 사랑의 공리다. 취향과 열정은 적극적 관리의 대상이 됐다. 사회적 교환행위로서의 결혼을 열정적인 사랑을 통해 이뤄낸다는 어울리지 않는 결합이 낭만적 사랑의 긴장과 모순을 빚는다. 그리하여 사랑은 ‘열정’이면서 ‘교환’인 것, ‘사적(私的)’이면서 ‘사회적’인 것이 됐다.

사랑, ‘열정’과 ‘교환’ 사이

지난해 11월 노동사회연구소가 흥미로운 보고서를 발표했다. 20~30대의 소득별 기혼자 비율을 분석했는데, 남녀 모두 소득이 높을수록 더 많이 결혼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소득 1분위의 가난한 남성이 결혼할 확률은 10분위 남성보다 12배나 적었다. 이 사랑과 연애, 결혼의 루저들은 ‘덜 끌리는 사람들’이면서, 명백히 사회적인 힘에 의해 소외된 이들이다. 투쟁 영역의 확장을 외치는 우엘벡의 주장에 힘이 실리는 것 같다. 사랑의 영역에도 무언가가 개입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그런 주장이 나와 요 며칠 화제가 됐다. 사랑의 재분배를 위해서는 물론 아니었지만, 한국보건사회연구소의 한 연구원이 혼인율 재고를 위해 상향 결혼하려는 여성들의 선호를 조작하자고 한 것이다. 청년들의 불안정한 고용상태와 여성들에게 불리한 한국의 결혼제도는 그대로 두고 고학력·고소득 여성들의 하향 결혼을 유도하자고 했으니 비판여론이 거센 것도 당연했다. 그는 결국 옷을 벗었다.

나는 그 비판들이 모두 타당하다는 데 기꺼이 동의하면서도, 그 연구원이 점점 더 ‘동질혼’이 되어가는 결혼의 어떤 경향을 지적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수준이 비슷한 이들끼리 만나려는 이 경향은 연애와 결혼 자체를 상위 몇 %의 전유물로 만들고 있다. 상향 결혼이라는 합리적인 선택과 여성들의 교육 및 소득수준이 과거에 비해 전반적으로 높아진 것은 그 ‘상위 X%’를 조금 더 위로 끌어올렸을 것이다.

예쁜 여성을 선호하는 것, 능력 있는 남성을 선호하는 것이 잘못됐다거나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선호를 조작하거나 선호에 맞서 투쟁하는 것도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내 사랑의 조건에 성찰적이어야 할 것 같다. 어느새 우리들의 사랑은 ‘열정이면서 교환’인 것이 아니라, ‘성공적인 교환이 곧 열정이고 사랑’이게 된 건 아닐까?

<정지민 칼럼니스트·연애인문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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