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분단사회의 아웃사이더들-탈북사회 ‘수저 계급론’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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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탈북민은 남한에서도 금수저라는 세습성을 유지한다. 최근 들어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불신으로 저변화되고 있는 것은 북한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출발조차도 동일선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정착했다고 젠체하는 편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나를 대하는 명칭만큼은 아직도 낯설고 이질적일 때가 많다. 6·25 한국전쟁 전후에 월남한 분들은 실향민 혹은 월남자로 명칭이 통일돼 있지만 정전협정 이후 탈북한 사람들은 수십 가지의 호칭으로 상황에 따라 불리는 기현상(奇現象)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물론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법적·행정적 표현은 북한 이탈주민이고 별칭은 ‘새터민’이다. 내 경우에는 군 출신으로 휴전선을 넘어 왔으니 귀순자였지만 시대가 변했으니 그 호칭만 빼고 수십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적응 압력을 받았다. 주변에서는 총을 들고 넘어왔으니 보로금도 상당할 것이라고 수군거렸지만 동대문시장에서 25만원이면 살 수 있는 무기여서 크게 기대하지 말라는 당국 관계자의 말을 듣고도 별로 섭섭하지 않았다. 귀순자라는 침침하고도 부자연스러운 주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러 호칭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귀순자라는 호칭에서조차 차별을 받았던 내가 슬그머니 탈북민 대열에 합류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탈북민에 대한 각종 호칭들

한국전쟁 이후 1990년까지 총 607명의 탈북민이 귀순자라는 호칭으로 한국 사회에 존재했는데, 남북한의 체제경쟁 시대에 이들은 북한을 고발하고 자유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할 수 있는 존재로 그 가치를 높게 인정받았다. 이들은 ‘월남 귀순자’ 혹은 ‘귀순용사’로 불리며 국가유공자보다도 더 많은 수혜와 혜택을 지원받았고, 후한 정착금과 복리후생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직업까지 보장받으며 반공 안보선전에 활용됐다. 1979년에 25세의 나이로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안찬일 박사는 당시 정부가 자신을 비롯한 귀순자들에게 30평대 아파트 1채와 정착금으로는 아파트 2채를 살 수 있는 액수의 돈과 선물, 그리고 본인이 원하는 대기업·공기업에 취직시켜줬다고 회고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순회 강연에 동원될 때면 통상 한 곳에 가서 받는 가전제품이 1톤 트럭 분량이고 적지 않는 돈과 상품권도 받았는데, 당시 한국의 처녀들이 결혼하고 싶은 상대 3~4번째로 귀순용사를 선호했다는 것이다. 옛말이 됐지만 한국 사회에 귀순자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 적도 있었던 것이다.

탈북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지난해 12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 권호욱 기자

탈북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지난해 12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 권호욱 기자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도미노 붕괴와 북한의 경제난 심화로 한 해에 100명이 넘는 탈북민이 입국하면서 귀순자의 명칭은 탈북자로 바뀌었고, 사회적 시선과 대우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체제경쟁이 더 이상 의미 없다고 판단돼 휴전선을 넘어와도 탈북자와 똑같이 불렸고, 오히려 탈북사회의 약자로도 취급당했다. 북한주민의 탈북은 급속히 증가해 2002년에는 연간 입국자가 1000명을 넘어섰고, 2006년에는 2000명을 넘어서 마침내 3만명의 시대가 왔다. 사실 탈북민 3만명 시대라고 장황하게 떠들어도 한국 인구 5100만명과 비교하면 그 숫자는 0.06%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탈북민을 칭하는 호칭이 수십 가지가 넘고, 이에 대한 명칭조차 오랫동안 통일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탈북민 정착제도의 논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탈북민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천차만별적인 시각은 대체로 각박하고 부정적이다. 탈북민 사회에서조차 귀순자라는 명칭은 이방인의 또 다른 이름이었지만, 살다보니 탈북민에 대한 다양한 호칭들도 한국 사회에선 결국 아웃사이더 내의 그로테스크한 기호에 불과했다.

두 탈북민의 상반된 생사

냉전의 뒤안길로 사라져 시대의 퇴적물로 불릴 법한 ‘귀순’이라는 호칭이 다시 되살아난 것은 지난해 있었던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의 한국행을 통해서였다. 일제히 모든 언론은 약속이라도 한 듯 태영호 귀순공사라고 칭했고, 정부조차 정부의 공식 명칭인 ‘북한이탈주민’이나 ‘새터민’으로 부르지 않았다. 탈북사회에서부터 시작해 이제는 한국 사회에서조차 무언의 합의로 자리 잡은 ‘탈북민’이라는 명칭도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과거지향적이고 음습한 귀순이라는 호칭이 다시금 등장한 것은 아마도 체제경쟁시대만큼이나 북한 붕괴를 바라는 일부의 절박함 때문이기도 했고, 탈북민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교차된 시선과 탈북사회 내부에 새롭게 드러낸 ‘수저 계급론’의 등장이기도 했다. 이때 북한에서 온 두 탈북민의 상반된 생사를 보며 탈북사회에 수저 계급론이 팽배하기 시작했다. 태영호 전 공사의 등장에 한국 사회가 요란스러울 때 이미 이곳에 정착했던 의사 출신의 한 탈북민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북한에선 엘리트 의사였지만 10년 전 남한에 정착한 후 일거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고, 숨지기 전에는 청소용역 업체에서 안전모도 없이 고층빌딩의 유리창을 닦다가 추락해 숨진 것이다.

사실 고위 탈북민은 여느 탈북민과 다르게 북한에서부터 금수저라는 세습성을 유지한다. 때문에 일반 탈북민은 과거 자신들의 지배자였던 엘리트 출신들을 경계한다. 최근 들어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불신으로 저변화되고 있는 것은 북한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출발조차도 동일선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엘리트 출신들은 북쪽에서 누렸던 특권의 연장처럼 한국 정부의 보호와 보살핌 덕에 안정된 직업과 남부럽지 않은 월급을 받으며 자유세계를 만끽한다. 정부기관 산하의 연구소나 공공기관의 명함으로 높은 월급과 정년을 보장받는 엘리트 출신들은 입국과 동시에 실업과 빈곤의 환경에 직면하는 일반 탈북민들의 상황과 크게 비교된다. 금수저 출신을 가용 수단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차별적 대우를 견디면서 이곳에서 열심히 정착하고 준비한 이들에게 훗날에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한국에 와서 10년 넘게 공부를 하고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탈북민도 연구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는 제공받기 어렵다. 몇 년 전 어느 북한통일문제 연구기관에 탈북민 박사 몇 명이 연구 프로젝트 자문으로 간 적이 있었다. 같은 박사이지만 북한 통일문제에 문외한인 담당 연구원과 북한 통일문제에서는 전문가이지만 실직자에 가까운 탈북민 간의 어색한 부조화였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 탈북민 여성 박사가 “이런 꼴을 보자고 어렵게 학위를 취득한 것이 아닌데”라는 탄식을 내뱉었다. “오히려 외국에 나가 보면 탈북자들을 난민이 아니라 정치적 망명자로 존중해줍니다. 인문학 분야에서 세계 최정상급으로 인정받는 레이던대학에서 일개 탈북 작가인 저를 학과장급 대우로 초빙했는데, 국내에선 어떤가요. 국내에 탈북자가 3만명인데 북한학과에 탈북 출신 교수가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장진성 탈북시인의 한마디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버텨온 수많은 탈북민이 최근에 와서야 스스로 깨닫고 있는 회한이다.

일반적으로 수저 계급론은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특징이 있는데, 탈북 엘리트들도 마찬가지다. 고위 탈북 엘리트와 가깝게 지낸 적이 있었는데, 이 분은 나를 만날 때마다 공부보다는 북한 민주화와 반북활동에 청춘을 바쳐야 의미 있는 삶이라고 독려하곤 했다. 나중에 그의 자녀 모두가 해외유학을 통해 안정적 직장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씁쓸했다. 실제로 나와 비슷한 시기에 대학에 간 몇몇 탈북민 친구들은 학업을 중단하면서까지 북한 관련 활동에 투신했었다. 지금은 중국집 배달원으로, 물류창고 경비원으로 살고 있는 그들의 이구동성은 그때의 학업 중단에 대한 후회다. 그러다가도 북한이나 북한 관련 활동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쓴 술잔만 삼킨다. 학원과 유학을 보내며 성장하는 탈북 엘리트의 자식과 아르바이트와 치열한 경쟁으로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이중적 시공간에서의 양극화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탈북민 사회에서도 목격할 수 있는 금수저와 흙수저의 흔한 풍경이다. 최근에 많은 달러를 챙겨 들어오는 ‘달러 수저층’이 탈북 금수저 내에서도 새로운 계급을 만들고 있다는 그들만의 푸념도 다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전해진다.

정전협정 이후 탈북한 사람들은 수십가지의 호칭으로 불린다. 과거엔 '귀순자'라는 호칭으로 북한을 고발하고 자유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존재로 대접받았지만, 지금은 생계를 이어가기도 급급한 삼등국민으로 전락했다. 탈북사회에서도 존재하는 것이 바로 '수저 계급론'이다. / 김상민 기자

정전협정 이후 탈북한 사람들은 수십가지의 호칭으로 불린다. 과거엔 '귀순자'라는 호칭으로 북한을 고발하고 자유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존재로 대접받았지만, 지금은 생계를 이어가기도 급급한 삼등국민으로 전락했다. 탈북사회에서도 존재하는 것이 바로 '수저 계급론'이다. / 김상민 기자

탈북민과 5계급론

상대적 박탈감은 하급계층의 탈북민보다 중간계층의 탈북민일수록 더하다. 북한에서는 나름 잘나갔지만 이곳에서 간택을 받지 못하는 대다수는 경력 단절과 생계 파괴로 폄훼되고 방황하고 있다. 교사 출신의 탈북민은 식당 설거지로, 북한군 연대장 출신의 탈북민은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연구자 출신은 이삿짐 용달로 살아가는 모습은 이제 너무 흔하다. 청소부로 유리창을 닦다 추락해 숨진 탈북민의 북한에서의 직업도 의사였다. 물론 체제와 제도가 상이한 이곳에서 북한에서의 경력이 쉽게 인정될 수 없다는 것에 수긍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전문직에 종사했던 이들의 방치는 통합과 통일을 얘기하는 정책과는 배치되는 다른 얼굴이다. 국내에 정착하고 있는 탈북민들의 상황도 심상치 않다. 자유와 조국을 찾아왔지만 벌써 수천 명이 탈남하고, 이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는 재입북 현상마저 심심치 않게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조선족 동포의 위치인 ‘이등 국민’을 넘어 ‘삼등 국민’으로 불리고, 금·은·흙수저·이민자·탈북자라는 5계급론으로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다. 이미 북한의 일반주민도, 중견간부들도 이러한 사실을 보고 있다.

작고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는 나이와 지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부 모임이나 개인적 친분을 통해 오랜 인연을 유지했다. 분단체제 이래 최고의 귀순자라고 불리는 그조차도 몇명 탈북단체장을 제외하고는 일반 탈북민에게는 비판과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북한체제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그 체제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당사자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국 사회의 탈북민 정착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얼마 전 국정원의 산하기관에서 근무를 시작한 태영호 전 공사를 만났다. 언론과 관련 기관들이 붙여준 귀순자나 망명자의 호칭 대신 ‘탈북민’으로 칭하는 태도에서 판단력이 빠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언론을 통해 북한 정세에 대한 그의 견해를 충분히 접했던 터라 주로 한국에서 정착하고 있는 탈북민에 대한 관심을 주문했다. 탈북사회에서 그들은 금수저이지만 그들조차 긴장하며 살아야 할 곳이 바로 만만치 않은 한국 사회다. 청소 일을 하다가 추락하여 숨진 의사 출신 탈북민처럼 태 공사도 이곳에서 탈북 출신이라는 굴레를 쓴 생존기를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골프 치러 가고 비싼 술을 먹는 것 같지만 매일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직장에서 남한 출신으로부터 받는 경계와 스트레스는 너는 아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지내는 국책기관의 어느 탈북 금수저의 고백은 탈북사회에서 이들의 위치는 성골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이들도 그들과 다른 ‘탈북자’로 대접받고 있다는 고충의 토로였다.

태영호 전 공사와 같은 고위 탈북민이 생기면 언론은 북한체제 균열을 대입하며 당장 큰일이라도 일어날 듯이 호들갑을 떨지만, 정작 이곳에서 살고 있는 다수의 탈북민들은 놀랄 정도의 무심함으로 그 같은 사건들을 대면한다. 누구보다 간절히 통일을 원하지만 누구보다 생계가 절박한 그들에게 금수저 탈북 출신들은 별로 관심 가질 필요 없는 남이나 진배없다. 북한 주민들과 고위간부들의 도미노 탈북만 갈구하기보다는 한국에 이미 와 있는 3만명의 탈북주민부터 챙기고 함께하는 모습이야 말로 나중에라도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얻고 준비된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언제인가 오준 전 한국 유엔대표부 대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북한주민, 남이 아니다”라고 한 연설을 두고 앞을 다투며 세계를 울린 연설이라고 극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를 본 탈북민 후배의 중얼거림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럼 우린 남일까요?”

<주승현(전주 기전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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