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과학사

(1) 과학자의 초상은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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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근대 과학기술인물의 초상 중 실제 얼굴을 보고 그린 것은 하나도 없다. 장영실과 허준 등 우리가 친숙하게 느끼는 얼굴들은 실은 순전히 현대의 창작이다. 서구 과학자들의 초상과 비교하면 큰 차이점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2층 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근대 화학의 주춧돌을 세운 앙투안-로랑 라부아지에와 부인 마리-안느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이 부부 과학자의 초상화는 자크 루이 다비드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788년 그린 것으로, 가로 약 2m 세로 약 2.6m의 대형 작품이다. 유럽과 북미 등에는 이처럼 성공한 과학자들의 초상화가 많이 남아 있다. 우리가 오늘날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 라부아지에, 다윈과 같은 이름을 들으면 마치 텔레비전에서 본 연예인처럼 친근하게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이들이 남긴 초상화 덕분이다.

한국 과학자의 초상은 어떠한가? 사진이 보급된 20세기 이후를 제외하고, 전근대의 과학자 중에 우리가 이름을 들으면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이는 누가 있는가? 물론 얼굴은 고사하고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과학자도 많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난관이겠지만,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허준의 얼굴, 최근 많이 보이는 장영실의 얼굴, 또 ‘과학자’의 정의를 넓힌다면 조선 전기 절정에 오른 과학기술 제도의 기획자이자 지도자였던 세종대왕의 얼굴 등이 어렴풋이나마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장영실 표준영정, 허준 표준영정, 정약용 표준영정

장영실 표준영정, 허준 표준영정, 정약용 표준영정

나라가 ‘인증한’ 선현의 초상

그런데 이들 초상과 서구 과학자들의 초상을 비교하면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 한국의 전근대 과학기술 인물의 초상 중 실제 얼굴을 보고 그린 것은 하나도 없다. 장영실과 허준 등 우리가 친숙하게 느끼는 얼굴들은 실은 순전히 현대의 창작이다. 우리나라에도 초상화의 전통이 탄탄했고, 조선시대 초상화들 가운데는 서양의 인물 초상보다도 사실적인 묘사를 자랑하는 것들도 있지만, 과학기술 관련 인물 가운데는 초상화가 남아 있는 이들이 아쉽게도 거의 없다. 더러 초상이 소실된 경우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초상을 남길 정도로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우리에게 친숙해진 그 초상들은 무엇을 토대로 그린 것인가? 어차피 근거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내가 그려 모셔도 되는 것이 아닌가? 안 된다. 위인들의 초상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정한 ‘정부표준영정’을 사용하도록 훈령으로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2017년 2월 현재 97인의 역사 위인의 표준영정이 지정돼 있는데, 이 가운데 넓은 의미의 과학기술 관련 인물로 간주할 수 있는 이들은 김기창이 1973년 영정을 그린 세종대왕을 비롯해 정약용(장우성 작·1974), 우륵(이종상·1975), 김정호(김기창·1975), 김대성(김창락·1986), 최무선(신영상·1987), 허준(최광수·1989), 김육(오낭자·1991), 왕산악(김영철·1994), 이익(손연칠·1996), 장영실(박영길·2000), 류방택(조용진·2012) 등 12명이다.

이 정부표준영정이라는 제도가 1970년대 중반 생겨난 것은 유신정권이 ‘문예중흥’과 ‘민족문화 창달’을 내세웠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이순신을 ‘성웅’으로 추앙해 국민적 상징으로 삼으려던 박정희는 1973년 4월 28일 이순신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충무공 영정의 통일’을 지시했고, 그에 따라 정부가 역사인물의 초상을 심의하는 제도가 일사천리로 수립됐다. 이에 따라 정부 각 부처와 유관단체들이 당대의 저명한 한국화가들에게 역사인물의 초상작업을 의뢰했다. 당시의 열악한 화단 사정을 생각하면, 유명 역사인물의 초상을 그리는 것은 화가들에게 명예로운 일이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문예중흥의 기치 아래 표준영정이나 크게는 1000호에 이르는 대형 ‘민족기록화’ 등을 시시때때로 발주해 주는 국가의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장영실, ‘과학적으로’ 그린 초상?

하지만 표준영정의 세세한 내용까지 국가가 간섭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화가 개인의 미감이나 의지가 크게 작용했고,(실제로 세종대왕 영정을 처음 발표했을 당시에는 “화가 자신과 비슷하게 그렸다”는 뒷말이 돌기도 했다) 대상 인물에 대한 당대의 지배적인 역사적 해석도 영향을 미쳐 왔다. 표준영정 가운데 장군의 초상은 용맹해 보이게 그리면 되고, 대학자의 초상은 현자의 풍모를 담으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여성 위인은 대체로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리면 무난할 것이다. 하지만 ‘과학기술 선현’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똑똑해 보이는 얼굴, 더욱이 요즘 말로는 ‘이과적으로’ 똑똑해 보이는 얼굴이란 어떤 것인가? 결국 과학기술 위인의 초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뛰어난 과학자의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운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런 까닭에 우리의 자화상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전형적인 방법은 옛날 500원권 지폐의 이순신 초상의 배경에 거북선을 집어넣듯, 인물의 속성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지물(attribute)을 그림에 넣는 것이다. 천안아산역이나 과학기술한림원에 있는 장영실의 동상이 구리 자를 들고 측우기 옆에 서 있는 것이 좋은 예다.

라부아지에, 정약용 안경영전

라부아지에, 정약용 안경영전

하지만 이 방법을 모든 과학기술 위인에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론 분야(가령 천문학 계산)나 과학사상에 업적을 남긴 이들은 지물을 통한 형상화가 불가능하다. 더욱이 구체적인 업적을 남겼다고 흔히 여기는 이들도 무엇을 대표적 지물로 뽑을 것인지 합의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예컨대 형상화가 쉽다는 이유로 정약용의 대표 지물로 거중기를 배치하는 것은 정약용이라는 인물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오히려 가로막을 수도 있다. 사실 장영실 옆에 측우기를 놓은 것 또한 과학사학계에서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세종대에 측우기 제작사업을 고안하고 지휘한 것은 세자, 즉 뒷날의 문종이었으며, 장영실의 대표 업적은 간의와 같은 다른 의기의 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간접적인 지물도 있다. 정약용의 표준영정은 장우성이 1974년 그린 것으로, 한국은행이 소장하고 있으며 경기도 남양주 다산 유적지의 사당에는 이 사본이 전시돼 있다. 그런데 정약용의 오랜 유배생활의 터전이었던 전라남도 강진군의 다산초당에는 2009년 강진군이 독자적으로 새로 만든 영정이 걸려 있다. 이 영정은 강진의 쪽과 붉은 흙을 안료로 이용했다는 등의 특징을 내세우고 있는데, 그밖에 큰 특징을 들자면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정약용은 노년에 시력이 매우 나빠 늘 안경을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개항기까지도 어른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공식적 초상인 영정이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이 당시의 문화적 기준에 맞는 일인가 의문도 든다. 당시의 격식에 맞지 않을 위험을 무릅쓰고 안경을 씌운 것은 ‘실학’과 ‘근대성’이라는 상징을 전유하기 위한 조치는 아니었을까? 안경은 언제부터, 망원경은 언제부터, 서양 책은 언제부터 조선에 들어왔는지가 조선 후기가 얼마나 ‘근대’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징표와 같이 여겨지는 것이 요즘 유행하는 조선 후기사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안경은 과학기술자의 지물은 아니지만, 실학자이자 근대인의 지물로 초상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을까?

한편 초상을 그리는 방법론에서 ‘과학성’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장영실의 표준영정은 2000년 지정되었는데, 그 제작을 주도한 사단법인 ‘과학선현 장영실 선생 기념사업회’는 기존 표준영정과는 달리 장영실의 영정은 ‘과학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장영실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는 아산 장씨 100명의 얼굴을 촬영한 뒤 그 공통적 특징을 추출하여 영정 도안을 결정했다. 수백년 동안 수많은 통혼을 거치며 남아 있는 특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지, 더욱이 조선 후기 족보의 난맥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등의 의문이 들 테지만, 중요한 것은 ‘과학적’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점 그 자체일 것이다. 과학기술 위인이라면 그 초상도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역사학의 관점에서는 다소 기괴해 보일 수도 있는 방법론을 과감하게 채택하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과학자의 초상은 사실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아직 역사 속의 과학기술인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쟁해본 경험이 적다. 과학기술 위인은 어떻게 생겼으면 좋겠다는 흐릿한 바람을 안고 있을 뿐이지만, 그 바람은 결국 주체적 근대화에 대한 미련과 강박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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