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생의 삶 : 경쟁사회의 아웃사이더-탈북자 흔적 지우고 입사지원 했더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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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곳 가깝게 지원서를 제출하여 한 번도 통과된 적이 없었던 나에게 그때부터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서류를 제출한 지 몇 개월 안 됐는데 줄줄이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던 것이다. ‘서류가즘’이라는 신조어도 있지만 나에겐 그 따위에도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이곳 출신의 친구들과 다르게 학교시절의 목표는 졸업이었지만 정작 졸업을 목전에 두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행정고시나 언론사 취직,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몇 명을 제외한 정치외교학과 친구들 대부분이 기업으로의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생활비 마련 등으로 경제적으로 지치고 궁핍했던 나는 학업에 대한 미련을 뒤로한 채 학부졸업장을 들고 구직활동에 뛰어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입사원서를 쓰고 지원하는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계속되는 구직활동 속에서 몇 달이 훌쩍 지났고 봄날은커녕 매서운 취업의 한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졸업 후 취업이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함께 공부했던 학과친구들의 합격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낙오자의 무기력감이 에워쌌다.

그 기간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초라한 처지를 동정하며 접근해 남북한의 문화적·경제적의 낙후성에 대하여 장황하고도 질퍽한 훈계만 남기고 사라지는 사람들도 보았고, 한국에 와서 겪는 어려움에 경쟁과 자본의 타자화로 우월적 지위만을 확인시키려 하는 가짜 사이비 멘토도 있었다. 차라리 무관심에서 희망을 찾을지언정 차이와 차별을 동일화하려는 그들의 선입관과 뿌리 깊은 편견 속에서 다른 고향사람들이 똑같이 겪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면 가끔 머릿속이 하얘진다.

청년실업이 사회적 화두가 된 2008년부터 주승현 교수도 취업전쟁에 뛰어들었다. 취업을 위한 스펙 경쟁과 취업문까지 한 고비 한 고비 탈락을 겪을 때마다의 좌절은 탈북 청년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 뒤늦게 적응해야 했던 만큼 동시대 젊은이들이 느끼는 고통은 더 큰 무게로 다가왔다. 사진은 2011년 8월 서울의 한 대학 졸업자가 졸업식이 끝난 후 긴 계단을 오르고 있는 장면이다. / 권호욱 선임기자

청년실업이 사회적 화두가 된 2008년부터 주승현 교수도 취업전쟁에 뛰어들었다. 취업을 위한 스펙 경쟁과 취업문까지 한 고비 한 고비 탈락을 겪을 때마다의 좌절은 탈북 청년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 뒤늦게 적응해야 했던 만큼 동시대 젊은이들이 느끼는 고통은 더 큰 무게로 다가왔다. 사진은 2011년 8월 서울의 한 대학 졸업자가 졸업식이 끝난 후 긴 계단을 오르고 있는 장면이다. / 권호욱 선임기자

탈북민은 분단사회의 주홍글씨 같은 꼬리표

탈북민을 선의로 돕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삶을 비교하며 신체적·문명적인 열등함을 자백 받으려 하는 태도는 지금도 곳곳에서 확인된다. 그 근거 없는 우월감을 알 수 없는 열등감의 또 다른 발로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의 성숙이 없으면 공동체의 미래는 그만큼 어려워진다.

학부를 졸업하자 곧 생계지원비가 끊겼다. 졸업을 유예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그런 나를 두고 전략적이지 못했다고 했지만 휴학 없는 졸업이 목표였던 나는 그에 대한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다만 생계는 더욱 막막했다. 동아리활동과 봉사, 인턴 등의 경험은 있으나 자격증이나 어학연수와 같은 스펙의 한계가 태부족인 듯싶었다. 스펙에 필요할 것 같은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등록했고, 취업에 유리하다는 사무자동화(OA) 자격증을 먼저 취득했다. 언론사 취업에도 대비하여 한국어능력시험 자격증도 확보했다. 방송을 보다가 한 연예인이 버스 운전으로 주변의 탄성을 자아낸 프로그램에서 영감을 얻어 1종보통 면허가 있음에도 1종대형 면허를 새로 땄다. 그래도 당시 취업 시 요구됐던 이른바 8대 스펙(학벌·어학점수·봉사활동·자격증·경력·학점·수상경력·어학연수 및 해외경험)에는 완벽하게 부족했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재산인 집 보증금을 빼내 어학연수를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짧은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입사지원서를 냈지만 합격통지는 없었고, 100곳 가까이에 좌절의 기록만 남겼다. 어느새 대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다시 중소기업으로 하향조절하며 지원했지만 서류전형에서조차 통과되지 못했다. 어려움을 견디며 캠퍼스에서 노력한 과정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이 사회에서 경쟁하며 살아갈 용기가 점점 사라졌다. 한국에서도 나름 좋다고 하는 대학을 졸업했고, 각종 자격증 취득이며 어학연수까지 다녀와 이른바 8대 스펙에도 거의 근접했다고 생각했는데, 1차 서류에서조차 통과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길 없어 어느 날 지원 서류를 다시 한 번 찬찬히 훑고 톺아보았다. 군복무를 묻는 칸에는 굳이 탈북자임을 기재했고, 자기소개서의 성장과정과 입사 후 포부에서조차 북한출신임을 친절하게 밝히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셈치고 탈북자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서류지원을 했다. 100곳 가깝게 지원서를 제출하여 한 번도 통과된 적이 없었던 나에게 그때부터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서류를 제출한 지 몇 개월 안 됐는데 줄줄이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던 것이다. 1차 서류 합격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는 ‘서류가즘’이라는 신조어도 있지만 나에겐 그 따위에도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기쁨은 잠시, 격한 슬픔과 비애가 온몸을 감쌌다. 민주주의 발전과 의식수준을 자랑하는 한국에서 ‘탈북민’은 경쟁사회의 아웃사이더이자 분단사회의 주홍글씨와 같은 꼬리표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며 백안시하는 태도를 애써 감추려 하지만 실제 모습은 제도와 시스템 속에 철저히 내재화돼 있었다. 여기에 물질과 이기의 논리가 덧칠해져 유사한 얼개로 괄시와 배척이 가중된다. 흔히 조선족동포는 ‘이등국민’이라는 필지의 사실로 우리 사회에 굳어져 있다. 그동안 종종 많은 탈북민이 주민등록증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북쪽 출신임을 밝히지 못하고 조선족동포로 행세하여 일하는 것을 봐왔다. 조선족동포라고 하면 취업이 가능하지만 탈북자임이 알려지면 취직이 어려웠던 것이다. 사실상 이등국민이란 타자에도 진입 못한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에 가까웠다. 대학을 졸업한 탈북후배들이 서류전형에서조차 통과되지 못한다는 하소연을 듣고 제출서류에서 탈북민의 흔적을 지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왠지 모를 죄인의 심정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던 기억이 난다. 나도 모르게 후배들에게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을 안내한 것에 대한 후회와 모든 것이 조건부인 현실에 대한 원망이 뒤섞여 온밤을 뒤척거렸다. 다행히도 지금은 자기소개서에 출신지역을 비롯해 민감한 부분을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등 채용 생태계가 변화하고 있어서 북쪽 출신이란 것 때문에 그때 겪었던 ‘자소서포비아’(자기소개서 작성에 대한 공포감)를 후배들이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이 위로라면 위로이다.

‘8대 스펙’ 준비했어도 1차에서 통과 못해

1차 서류 합격 후에는 실력전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서류 후 인적성검사를 포함해 역량면접, PT, 토론면접, 인성면접 등을 통해 최종합격자를 선발하는데, 인적성시험만 통과하면 어려운 과정은 지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면접과정에서 면접관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선택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유리한 면이 있다. 입사지원서에서 탈북민임을 밝히지 않았던 터라 면접에서 감추기보다는 사실을 주도적으로 밝히는 것이 필요했다. 탈북민이라는 것을 밝히면 면접자들은 크게 놀란다. 말로만 듣던 탈북민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북쪽 출신으로 여기까지 오기까지 경험과 노력을 밑절미로 삼고 정신력과 강인함이 회사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호소하면 생경하긴 하지만 다음 단계로 가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어느 집단면접장에서는 최종합격자가 한 명이라면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면접관의 질문에 동료면접자들이 모두 나를 선택하기도 했다. 그 상황은 동정에 의한 지목보다는 그간에 있은 각고의 노력에 대한 담담한 인정이자 탈북민에 대한 동등한 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탈북민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들도 취업 때문에 아우성이다. 기업의 인사팀에서 근무하면서 화려한 스펙으로 무장한 많은 인재들도 보았고, 취업을 위해 얼마나 준비하고 노력하며 또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는지도 보았다. 그렇지만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지원 서류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것은 기실 분명한 차별이자 편견이다. 나는 비단 그것이 기업의 잘못이라고 보지 않는다. 한반도의 분단상황이 낳은 부정적인 요소가 우리 사회와 삶에 스며들어 곳곳에 깊숙이 뿌리내린 결과다. 부정적인 분단은 분단사회에, 분단문화에, 분단의식에 깊게 내재되어 끝없이 경계하고 배척하고 때론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서류에서조차 통과할 수 없었던 내가 정작 면접장에서 진실하게 자신감과 경쟁력을 내보이니 그때부터 이념이 아닌 사람의 문제로 바뀌었다. 기업인사팀에서 근무할 때 편할 대로 편해진 팀장에게 불쑥 물은 적이 있었다. “만약 서류전형에서 탈북민 지원자의 서류를 보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팀장은 당황하지 않았고 솔직했다. “처음에는 놀랄 수도 있겠지만 오래 생각할 것 같지 않아. 기껏해야 주민등록증은 있는지, 간첩은 아닐까 하는 생각 정도지. 탈북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럴 때는 제외시키는 것이 어느 인사팀이든 회사를 위한 최선의 결정이 아닐까.” 서류전형이 취업의 관문이자 취업 당락의 바로미터임을 생각하면 걷어내야 할 장막은 깊고도 큰 것임을 그 대화를 통해 확인했다.

탈북자 흔적을 없애고 지원하고 나서야 결국 대기업 건설사에서 최종합격 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고, 정치외교학 전공자를 모집하는 국회 보좌진 채용에도 합격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국회를 선택했다. 이미 학부시절 짧은 인턴생활도 국회에서 해봤고, 무엇보다도 캠퍼스 안에서만 배웠던 정치학을 현실정치에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로 봤기 때문이다. 탈북민 출신이어서 신원조사가 다른 사람에 비해 갑절로 길다는 통보가 온 후 함께 일하게 될 동료들에게 미안했지만 그게 내 탓은 아니지 않는가. 이런 시스템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된 탈북민을 아웃사이더로 내모는 차별적인 장치이다. 학부시절 동기들과 함께 판문점을 관광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탈북민은 불가한다는 통보가 내려와 당황한 적이 있었다. 친구들을 보기도 창피했지만 주민등록번호 하나로 탈북자인 것을 구별해낸 것도 신기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어느 탈북민은 북한에서처럼 강가에서 자동차를 세차하다가 주변의 신고로 파출소로 끌려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던 경찰이 바로 북에서 온 사람이냐고 소리쳐 당혹스러웠고 범죄자가 아님에도 수배자처럼 탈북민이 전산시스템에서 바로 확인된다는 그 경험적 편린이 훗날 탈남을 결심한 계기였다고 고백했다. 일반국민과 탈북민을 이중적 공간에 분리하고 특수집단으로 경계하는 제도와 시스템이 당당하게 존재하는 한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전혀 당당해질 수가 없으며 무시와 경시 또한 개선될 수 없을 것이다. 출신성분이 띠고 있는 배제와 구분의 공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차별 없이 보장받을 수 있는 행복추구권이나 평등한 기본권의 헌법적 권리에도 위배될 소지가 있다.

탈북 흔적 없애고 국회 보좌진 채용 합격

국회에서는 바빴지만 재미도 있었다. 대선과 총선의 뜻도 모른 채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국회 근무기간 대선과 총선을 연달아 치르면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입법발의와 입법활동들을 보면서 배움에 대한 갈증이 커졌다. 돈 쓸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통장에 월급이 고스란히 모아졌고, 대학원에서 합격통지를 받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학부 때와 달리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다. 수업 외의 시간은 도서관에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어 오로지 책 속에 파묻혀서 살았다. 그러나 점점 돈이 부족해지면서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학위과정을 빨리 마치고 기업에 취직해 돈을 벌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물론 학위과정 중에 논문도 준비해야 했다. 남보다 일찍 석사과정을 마친 나는 다시 기업의 신입사원 공채에 지원 서류를 냈다. 이미 노하우(?)가 있어서인지 입사과정은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익숙해졌고, 공채 준비생들과도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아 곧 두 기업에서 합격통지가 왔다. 모두 대기업의 금융관련 계열사를 지원했는데, 금융 쪽이 계열사 안에서도 상대적으로 연봉이 높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욕심을 부려 증권사가 있는 계열을 선택해 신입사원 연수를 받았는데, 수준이 꽤 높았다. 금융 쪽은 전공이 달라 문외한이기도 했지만 높은 업무강도 때문에 학위논문을 들여다볼 시간조차 없었다. 마침 다른 기업 금융계열사의 관리팀에도 합격돼 퇴사 후 다시 그곳 연수원으로 들어갔다. 앞선 회사에 비해 업무강도는 괜찮았지만 업무 후 술자리는 매일처럼 새벽까지 이어졌다. 신입사원이어서 빠져나갈 구실도 많지 않았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기에 그곳에 순치되는 길을 택하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박사과정에 입학하던 날에 사표를 냈다.

어떤 것이든 처음보단 그 후가 낫다. 박사과정에서 무엇을 공부할지에 대한 목표가 이미 있었기에 연구 분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석사과정 때와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학위과정을 마쳤고, 안정적으로 논문을 쓰기 위해 다시 기업으로 취직을 선택했다. 입사해 발령받은 부서가 인사팀이었는데,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복리후생도 좋았고 또 안정적이기도 했는데, 주변에서 취업으로 인한 고통과 몸부림을 볼 때마다 그곳에 안주하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면 주유소 아르바이트 자리마저 퇴짜당하기 일쑤였고 탈북민이란 이유로 노동과 대가의 비례성에서조차 차별을 당해야 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대기업에서의 일자리는 출세였다. 박사논문과 박사학위 취득 후도 기약하기 힘들었고, 무엇보다도 다시 공채로 입사할 수 있는 신입사원 나이의 마지노선을 넘어섰다. 회사에 적응할수록 약간의 돈만 벌면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애초의 생각은 마구 흔들렸다. 고민은 무거웠고 결국 무거운 마음으로 학교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직장생활을 통해 사회를 배우고 경력도 쌓았던 그 시절은 유익했다. 그러나 그때의 결정에 대한 후회는 지금도 가끔 한다.

<주승현(전주 기전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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