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대학진학 그리고 취업-벅찬 등록금 때문에 혹독했던 대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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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집, 치킨 배달, 건설장 노가다, 촬영 엑스트라, 일식당, 전단 알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지금도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있는 것은 수업이 끝난 후 도서관으로 가는 친구들을 보며 홀로 일터로 가야 했던 내 모습이다.

공부만이 살 길임을 깨달은 후 일하는 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대입학원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대학 준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일터 동료들이 탈북자가 무슨 대학이냐며 빈정과 면박을 주기도 했는데, 그러한 그들의 태도를 사갈시한 나머지 오기를 부려 월급의 절반을 떼어내 학원에 등록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후회가 밀려왔다. 영어와 수학은 물론이고 대학입학을 위한 논술의 기본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남북한의 이질적인 커리큘럼을 탓하기 전에 북한에서도 열심히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던 자신을 먼저 탓할 수밖에 없었다.

월급의 절반을 떼어내 과감히 학원 등록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학창시절 일찌감치 직업군인으로 살려는 꿈을 가지고 체육소조(동아리)에 가입하여 수영, 마라톤, 총검술과 같은 국방체육에 몰두했고, 학교와 집을 떠나 경기와 대회에 전전하기를 좋아했다. 학교를 졸업하던 만 16살에 곧바로 군에 입대하여 DMZ 안에서 근무하다가 왔으니 학업의 공백은 클 수밖에 없었다. 학교시절에 담임은 아니었지만 각별하게 나를 챙겨주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공부는 뒷전인 천방지축의 일상을 걱정하며 훗날 공부하지 않았던 시간을 뼈아프게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신 적이 있었다. 그분 앞에서는 꽤나 경청하는 표정이었지만 평생을 직업군인으로 살아갈 나에게 그런 날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은 속 아래로부터 꽉 차 올랐다. 그때 그분의 생생한 표정과 말씀이 서울의 대입학원에서 뼈아픈 후회로 고여 올라올 줄은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대학에서 직업군인으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강의시간에 그날 선생님이 내게 하셨던 말씀을 비슷이 전하다보면 감정이 절로 묘해지는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학원을 다닐수록 후회가 밀려왔지만 손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하루 네댓 시간 자고 일터와 학원을 오갔고, 쉬는 날이면 학교들을 찾아다니며 입학에 관련한 자료를 모았다. 누구도 알려주는 이가 없었던 시절이기에 홀로 불비한 조건들을 극복해야 했다. 여러 대학을 찾아다니며 학교 입학을 문의했고, 각박한 담당자를 만난 경우는 낭패 보기가 일쑤지만, 친절하게 정보를 얻는 날이면 손으로 자기소개서를 써서 독수리타법으로 컴퓨터로 옮겨 지원서류를 준비해 갔다. 마침내 그해 가을에 대학 입학원서를 냈고, 필기와 면접 등의 단계를 거쳐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 합격했다. 입학할 때 나보다 공부를 잘해 보이던 다른 탈북민이 고배를 마신 것을 보면 필기전형 외에도 자기소개서나 면접 등도 중요한 부분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은 대학 진학을 선택하는 탈북민이 많아지고 오래된 고충도 알려지면서 입시를 위한 상담과 정보를 제공해주는 기관·단체도 여럿이다. 뿐만 아니라 입학예정자를 위한 예비대학 운영과 멘토링 사업, 기초학력과 학업보충을 위한 글쓰기를 비롯한 외국어 습득 프로그램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입국 전부터 한국에서의 학업을 계획하거나 입국 후 바로 대학 입학을 목표하는 탈북민이 증가하면서 자료 공유와 정보 습득은 과거에 비해 원활하다고 할 수 있다.

함경북도 무산군 출신의 청년 탈북자의 삶을 다룬 영화 <무산일기>(박정범 감독. 2011년 개봉)의 한 장면. / 세컨드윈드필름 제공

함경북도 무산군 출신의 청년 탈북자의 삶을 다룬 영화 <무산일기>(박정범 감독. 2011년 개봉)의 한 장면. / 세컨드윈드필름 제공

탈북민은 대체로 정원 외 특별전형으로 학교를 지원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오해도 적지 않다. 우선 탈북민의 입학으로 다른 한국 출신들이 피해가 있다는 오해인데, 정원 외로 선발하는 까닭에 실력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말 그대로 ‘정원 외’이므로 일반 지원자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는다. 등록금 문제도 지원이 절실한 저소득층에 대한 등록금 지원이 적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저소득층에 해당할 수밖에 없는 탈북민 지원도 이에 준하여 생각해보면 오해를 풀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일정한 점수를 받지 못하면 등록금 지원은 중단된다. 좋은 대학으로의 진입도 과거처럼 수월하지 않다. 그동안 대학 안에서의 적응과 졸업이 쉽지 않았던 까닭에 탈북민의 입학을 제한하는 대학이 많아졌고, 때문에 탈북민 서로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최근 들어 북한에서부터 엘리트교육과 좋은 대학에 다녔던 경험자의 상당수가 대학공부를 원하고, 특히 한국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탈북민도 적지 않기에, 소수의 인원만을 선발하려는 풍토에서 점점 어려운 일이 됐다. 오죽하면 원하는 대학으로 가기 위해 재수·삼수의 특별전형을 준비하는 탈북민도 있고, 특별전형이 더 어렵다며 수능을 치르고 원하는 학교로 간 탈북민도 생겼을까. 작년에는 서너 명밖에 뽑지 않는 어느 대학에 가려고 100명 가까운 탈북민이 경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특별전형이라는 제도가 있어 대학입학에서 탈북민이 좀 더 기회를 갖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회적 배려이다.

결국은 대학을 제대로 졸업하느냐와 졸업 후 취업의 문제이다. 탈북민의 경우 대학 입학은 가능하나 졸업은 쉽지 않다는 말이 나돈다는 사실을 입학 후에야 알게 됐다. 내 경우에도 전국적으로 수십 명의 탈북민이 입학했지만 졸업한 이는 몇 안 됐다. 지금은 전체 입학자 중 상당수가 졸업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때 여러 대학에 모두 합격한 것은 어쩌면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다. 경영학과, 정치외교학과, 신문방송학과 등 대학마다 서로 다른 과를 지원했는데, 그때까지도 전공뿐만 아니라 진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경영학과가 있는 대학이 집에서 가까웠지만 집에서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한 학교의 정치외교학과를 최종 선택했다. 얼마 안 되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고달프기도 하고 자신이 처한 형편이 고약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낯선 곳에서의 어려움이 아닌, 조난자의 그물이 나를 옥죄고 있음을 1년도 안 되는 정착과정에서 체감했다. 경영학을 공부하여 좋은 기업에서 돈 많이 벌려는 목표도 가질 수 있었지만 정치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끊임없이 속박하고 있는 분단환경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정원 외 선발’로 일반 지원자 피해 안 가

입학 전 들떴던 마음과 달리 대학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남북한의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그 시절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취미는 고사하고 요령조차 없었다. 경제적 어려움도 컸다. 생계지원금으로 집세며 온갖 종류의 공과금을 내고 나면 교통비나 식비도 남지 않았다. 의지할 가족도, 도움 받을 이웃도 남쪽 하늘 아래에는 없었다. 입학과 동시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했는데, 첫 학기 성적이 최악이었다. 탈북민의 경우 사립대학 등록금은 국가와 학교에서 반반씩 지원하는데, 성적이 나쁘면 수업료를 지원받을 수가 없다. 등록금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나는 한 가지 아르바이트로는 쌔빠지게 고생해도 도저히 등록금을 마련할 수가 없어 여러 일을 해야 했다. 호프집, 치킨 배달, 가이드, 건설장 노가다, 촬영 엑스트라, 일식당, 전단 알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것은 수업이 끝난 후 도서관으로 가는 친구들을 보며 쓸쓸히 일터로 가야 했던 내 모습이다.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현재 전국에 있는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2000명이 넘는 탈북민이 신경 쓰이는 이유도 그 시절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학업은 포기할 수 없었다. 교재 살 돈이 없어서 다른 학교 도서관들을 전전하며 책을 빌려 공부를 했고, 대형서점에 가서는 하루 종일 선 채로 눈치를 보며 책을 읽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기초학문이나 전공과목의 어려움이 컸지만 인내와 끈기로 버텼다. 시험기간에는 아예 학교 도서관 의자에서 자면서 일주일이나 열흘씩을 공부했는데, 군 시절에 얻은 체력과 정신력이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어느 탈북민 친구는 영어로 진행하는 강의실을 박차고 나온 것이 자퇴의 원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은 나도 여러 번 뛰쳐나왔다. 그럼에도 자퇴를 하지 않았던 결정적 부분은 자신을 추스른 후 다시 강의실에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온갖 일을 해 두 학기 등록금을 직접 냈고, 성적도 조금씩 올랐다. 더 이상 등록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서야 캠퍼스의 낭만도 눈에 들어왔다. 산악동아리, 기타동아리에 가입하여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즐겼고, 3학년 때부터는 아예 친구들과 민속문화반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친구들도 두루 생겼고, 날밤을 까면서 신촌에서의 온갖 추억도 쌓아갔다. 내게 관심을 주시던 교수님의 배려로 학부생 신분으로 연구실에 소속돼 한국 정치를 전공으로 공부했는데, 분단문제에 접근하게 된 토대가 됐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휴학 한 번 없이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요즘은 휴학 없이 졸업하는 탈북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지만 그때는 내가 첫 사례라고 했다. 대학에 입학하였지만 실제로 졸업하는 사람은 그만큼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힘들 때마다 휴학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그때마다 휴학만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되뇌곤 했다. 주변에서는 어학연수나 인턴 등 스펙 관리나 취업준비를 위해 휴학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내 경우에는 오로지 두려움 때문에 휴학할 수 없었다. 휴학을 한다면 어쩌면 학교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졸업 후 어학연수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는 언필칭 학문에 욕심을 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학부과정이 공부에 대한 재미뿐만 아니라 미련도 남겼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도 한 번의 휴학 없이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쳤는데, 오로지 학부시절의 경험에서 도움을 받았다. 귀순하여 대학생활을 시작한 후 10년 만에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지만 그 과정은 혹독할 만큼 시리고 궁핍했다.

장학재단 많지만 탈북대학원생 서류는 외면

학부시절 내가 제일 당황한 것은 혼자서 감당하기 벅찬 등록금이었다. 북한에 있을 때 당국의 선전에서 ‘남조선’의 대학생들이 등록금을 낼 돈이 없어서 자신의 피를 뽑아 학비를 마련한다는 교육을 밥 먹듯이 받아왔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한국에서 등록금을 마련할 수만 있다면 내 몸 안의 피를 다 뽑아 마련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절박한 순간을 여러 차례 겪은 것이다. 정작 문제는 내 몸 안의 피를 다 뽑아도 등록금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대학원도 마찬가지였다. 수백 개도 넘는 장학재단이 존재하지만 공부하고 싶어하는 탈북대학원생의 서류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였다가 학업을 포기하는 탈북민 중에는 등록금의 문제로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게 어려운 학업과 사회적응과정을 마친 이들이 졸업 후 마주한 상황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취직은 이곳 출신의 취업준비생들과 매한가지로 탈북민에게도 돌파하기 어려운 ‘전선’이다.

같은 시기 같은 대학에 다녔던 2명의 고향사람이 있었다. <무산일기>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국제영화제를 휩쓴 영화 속 주인공이기도 한 함경북도 무산군 출신의 형과 북한에서 엘리트 대학으로 꼽히는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와서 경영학과를 선택한 고향선배다. 무산군 출신의 형은 나와 같은 시기에 하나원에 있었고 함께 대학에 온 입학동기이기도 하다. 입학 후 각자의 삶 때문에 여유가 없었지만 우리는 틈틈이 서로의 안부를 챙겼다. 그러나 <무산일기>의 주인공인 그는 위암 투병 끝에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나중에 그의 학과 친구가 영화감독이 되어 형의 삶을 픽션으로 그려 내놓은 영화가 바로 <무산일기>이다. 영화를 보면서 암울하고도 잔인했던 서울 적응기를 보낸 그의 생애에 비통함이 더해졌다. 눈을 감는 날까지 창백한 미소로 그간의 사연을 덮고 있었기에 더 슬펐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고향선배는 북한에서 명문대학을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그쪽 졸업장이 무용지물이다. 그는 나와 같은 대학에서 취업에 유리할 것 같은 경영학에 다시 도전했고, 어렵게 졸업했지만 이후 번번이 취업에 실패했다. 어느 날 고향출신의 배우자마저도 그를 떠났고, 선배는 작은 임대아파트 화장실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학부를 졸업한 내가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이에 생긴 일이었다.

<주승현(전주 기전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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