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박불똥의 <경찰의보호아래…>-권력이 조성한 감시사회 충실히 재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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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는 정부에 비판적인(혹은 비판적일 것이라고 추측되는) 예술인들의 명단을 만들었다. 그 명단에는 박불똥도 포함되어 있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는 감시의 대상이다.

어두운 배경 너머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지어 다가온다. 잘 정돈된 침실을 지나 화면 밖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아침을 맞아 일터로 향하는 주민들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다. 화면 양 옆으로 주민들을 내려다보는 경찰들의 모습을 빼놓고 본다면 말이다. 작품의 제목은 <경찰의보호(감시)아래강서구목동주민들이이른아침일터로향하다>(이하 <경찰의보호아래…>). 1985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일상으로 스며들어간 국가의 감시를 보여준다.

박불똥, <경찰의보호(감시)아래서울강서구목동주민들이른아침일터로향하다>, 피그먼트 프린트, 48x80cm, 1985.

박불똥, <경찰의보호(감시)아래서울강서구목동주민들이른아침일터로향하다>, 피그먼트 프린트, 48x80cm, 1985.

블랙리스트 작가가 되다

작품을 제작한 박불똥은 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고, 이제는 손주가 있는 할아버지가 된 작가다. 30년 만에 역사가 반복되는 것인지, 광장 위의 민주주의가 부활한 지금, 그는 젊은 시절에 그러했듯 그의 선후배와 함께 아스팔트를 걷고 있다. 하지만 30년 전과 지금은 너무나 다르다. 한때의 영애가 대통령이 되어 돌아왔고, 이제 그는 더 이상 패기 넘치는 젊은 작가가 아니라 교과서에도 그림이 실리는 중견 작가가 되었다.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다. 1985년에 그가 묘사한 권력의 속성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다. 1989년 교원노조 설립을 앞두고 내무부는 반상회를 통해 학부모들에게 교사들에 대한 감시를 독려했다.(<한겨레신문>, 1989년 5월 26일) 같은 해 11월에는 가짜 대학생들이 경찰과 정보기관의 사주를 받고 학내에서 ‘프락치’로 활동하기 때문에 학생사회 내에서 학생들끼리 서로를 의심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같은 신문, 11월 3일) 그렇다면 오늘날의 사례는 어떨까? 코레일은 철도노조 파업에 대응하여 대체인력들에게 열차에 피켓을 붙이고 운행하는 기관사들의 사진을 찍게 했다.(<경향신문>, 2016년 11월 8일) 문화체육관광부는 정부에 비판적인(혹은 비판적일 것이라고 추측되는) 예술인들의 명단을 만들었다. 그 명단에는 박불똥도 포함되어 있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는 감시의 대상이다. 작년에 필자와 함께 준비한 전시를 두고, 김종덕 전 장관이 “나랏돈으로 운영되는 학교가 왜 박불똥의 전시를 허락한 것이냐”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던 적도 있었다. 대학에서 운영하는 작은 전시장과 200만원이라는 작은 예산이 어떻게 장관의 관심거리가 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가 ‘민중미술’이라고 불리는 카테고리에 속한 작가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았다.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을 함께하던 선배들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교수로 안정된 삶을 살거나, 민중미술에서 벗어나 화랑과 미술관이라는 보다 넓은 영역에서 활동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그는 남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의지로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가지 못해 남아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이 곳’도 아닌, ‘저 곳’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서 경계인처럼 놓인 작가가 되었다. 안규철과 같이 이제는 ‘민중미술’에서 벗어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의 전시를 연출하는 선배는 박불똥을 보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부채감을 드러내고, 여전히 그와 인사동 언저리에서 어울리는 동료 선후배들 중에는 그가 ‘으리으리’한 작업실을 가진 성공한 작가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박불똥 스스로 자신이 경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오래전에 있었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운동장에 혼자 서성이며 외로움에 사무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작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박불똥이 어디에도 확실히 걸치지 못했던 사람이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민중미술에서 벗어나 제도권에서 큰 성공을 맛본 이들에게 박불똥의 작품은 너무나 직설적이다. 비속어, 자극적인 표현들을 동원한 언어유희들을 작업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그의 성향은 ‘인텔리’한 취향과는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 있는, 지극히 범속한 작품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반대로 미술의 가장 외곽, 그리고 투쟁의 한가운데에 발을 담그고 있는 작가들에게 박불똥의 작업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리얼리즘적이지도 않으며, 추상적인 개념이나 가치에 몰두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리처드 해밀턴, <인테리어>, 혼합매체, 49.5x63.8cm, 1964~1965.

리처드 해밀턴, <인테리어>, 혼합매체, 49.5x63.8cm, 1964~1965.

나의 삶이 곧 나의 현장이다

<경찰의보호아래…>를 돌아보자. 이 작품은 잡지에서 찾은 사진들을 오려서 조합하고, 붙여 만들었다. 나치를 비판하던 선전물을 만들던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 팝 아트(Pop art)를 개척한 영국의 화가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의 작품들과 비교해볼 만하다. 한편으로 방대한 양의 이미지를 조합하고 쌓아올리는 작업방식에서는 신학철의 영향 또한 읽을 수 있었다. ‘강서구 목동’(당시에는 목동이 강서구에 속해 있었다)이라는 실재하는 지명이 제목에 들어갔지만, 그의 화면이 실제로 목동을 재현한 것인지는 별다른 고민 없이 작품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작품은 당시 민중미술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현장’과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박불똥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기층의 도시빈민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고 항변한다. 굳이 위장취업이나 투쟁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뛰어들지 않더라도 삶 자체가 민중이니, 심신이 서 있는 곳이 바로 그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그의 항변은 옳다. 민중의 삶은 참으로 다양하고, 그가 가진 삶의 양식 또한 민중의 삶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특정한 삶의 양식과 유형을 ‘민중’으로 호명하는 것이야말로 민중을 자신과 구별되는 타인으로 생각하는 그릇된 관념에 빠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박불똥은 있는 그대로를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리얼(real)함이 아닌, 다른 의미에서의 리얼함을 추구한다. 그것은 인간 박불똥이라는 여과장치를 거쳐 나온 현실의 단면을 재현하는 것이다. <경찰의보호아래…>는 1985년 박불똥이 목도한 국가권력과 그 권력이 조성한 감시사회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경찰의보호아래…>라는 이름의 거울에 비친 상(像)은 우리 사회를 눈에 보이는 것과 똑같지는 않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그의 다른 동료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박불똥은 그가 만드는 이미지가 그 자신과 현실의 거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권혁빈 미술평론가>

이미지는 거울이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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