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테러 이후 독일, 어디로 가나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독일은 과연 오늘날의 테러에 대응할 능력이 있는 것인지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난민 정책 전반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허술한 대테러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도 이어진다.

베를린 트럭 테러 용의자 아니스 아므리(24)가 사건 4일 만인 12월 23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사살됐다. 추가 테러 공포는 일단 잦아들었지만 논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독일 수사당국은 부실한 초기 대응과 허술한 수사로 도마 위에 올랐다. 경찰은 사건 직후 엉뚱한 사람을 용의자로 체포해 시간을 허비했다. 사건 후 이틀이 지난 21일에야 용의자로 아므리를 지목하고 현상수배를 걸었다. 튀니지 출신인 아므리가 난민 심사과정에서 수감 이력 등이 드러나 부적격자로 분류됐지만 송환되지 않고 남았던 것도 문제가 됐다. 이탈리아 경찰이 밀라노에서 아므리를 사살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독일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은 ‘여러분(이탈리아)에게 대단히 감사드린다(Grazie mille, Signori)’는 이탈리아어 제목으로 독일 경찰의 무능을 조롱하듯 질타했다.

위험인물 리스트에 올라 있던 아므리가 어떻게 당국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테러를 일으킬 수 있었는지, 독일은 과연 오늘날의 테러에 대응할 능력이 있는 것인지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난민정책 전반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허술한 대테러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도 이어진다.

무장한 독일 경찰들이 베를린 테러 직후인 12월 23일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오버하우젠의 센트로 상점가를 순찰하고 있다. 독일 경찰은 전날 이곳에서 테러 모의 혐의로 코소보인 2명을 체포했다. / AFP연합뉴스

무장한 독일 경찰들이 베를린 테러 직후인 12월 23일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오버하우젠의 센트로 상점가를 순찰하고 있다. 독일 경찰은 전날 이곳에서 테러 모의 혐의로 코소보인 2명을 체포했다. / AFP연합뉴스

CCTV·전자발찌 확대 등 쏟아지는 주장들

독일 정부는 12월 21일 공공장소에서 폐쇄회로(CC)TV 설치를 확대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베를린 테러를 계기로 만들어진 법이 아니라 지난 7월 뮌헨 총격사고와 안스바흐 야외 음악축제장 자폭테러 이후 초안이 만들어진 법안이 승인된 것이다. 새 법은 경기장과 쇼핑센터, 버스 터미널 등 공공장소에서 CCTV를 늘리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CCTV 설치를 강제하지 않아 테러 위협에 대응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베를린 테러 직후인 26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는 설문 대상 응답자 60%가 공공장소에 더 많은 CCTV를 설치해야 한다고 답했다.

당국이 테러 의심자로 감시하고 있는 사람 중 일부에게 전자발찌를 채우거나 이슬람 사원에 대한 감시를 확대해야 한다는 보다 과격한 주장도 나오고 있다. 아므리는 2015년 7월 독일로 넘어온 뒤 전국 15개 이슬람 사원을 방문했고, 이슬람 극단 원리주의 세력인 살라피스트와 접촉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난민을 철저히 관리하고 보다 엄격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난민 심사과정에서 테러 위험인물을 가려내기 위해 사진촬영, 지문 채취, 홍채인식 스캐닝 등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메르켈의 기독민주연합(CDU)과 자매 정당인 기독사회연합(CSU)은 1월 중으로 ‘자유를 위한 안보’라는 제목의 결의문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일간 <쥐트도이체자이퉁>은 결의문에 연방 헌법수호청의 감시 대상 인물 허용 연령을 14세까지 낮추자는 내용이 포함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외에 위험인물로 분류돼 추방 대상자가 된 인물을 감금할 수 있는 기간을 기존 4일에서 4주로 늘리는 방안도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극우정당 ‘독일을위한대안(AfD)’은 더 강도 높은 비난을 쏟아냈다. 프라우케 페트리 AfD 대표는 “테러가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이 부주의하게 만들어졌다”며 “우리 영토의 무조건적인 통제를 요구한다”고 했고, 이 당 소속 마르쿠스 프레젤 의원은 “메르켈이 죽어야 저주가 끝날 것”이라는 ‘막말’까지 퍼부었다.

당장 독일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지는 않을 것 같다. 독일은 연방제 국가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권한이 분리돼 있어 전국적으로 일거에 변화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CCTV 같은 경우에도 연방정부가 의무설치와 같은 보다 강한 법안을 밀어붙이려 해도 주정부가 반대하면 강제하기가 어렵다.

베를린 시민들이 트럭 테로 다음날인 12월 20일 브라이트 샤이트플라츠 테러 현장을 찾아 촛불을 밝히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베를린 시민들이 트럭 테로 다음날인 12월 20일 브라이트 샤이트플라츠 테러 현장을 찾아 촛불을 밝히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독일 사회의 뿌리 깊은 ‘나치 트라우마’도 일종의 제어장치로 작용한다. 나치의 게슈타포나 동독 시절 슈타지 같은 감시조직에 의해 심각한 사생활 침해를 겪었던 독일은 엄격한 사생활보호법을 운용하고 있다.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적 시각이 강해 독일이 사회통제적인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에 대한 반감도 강하다. 안병억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독일은 여전히 과거의 업보를 짊어지고 있는 데다가, 연방제 국가라는 현실적인 제약도 있다”면서 “급진적인 주장들이 나오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소수의 목소리로 그칠 공산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어 “변화가 생긴다면 16개주 경찰 사이의 정보공유를 보다 활발하게 하는 정도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독일은 그동안 정보기관이나 경찰조직까지 주별로 분산적으로 운용해 왔기 때문에 테러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번 베를린 테러 때 문제가 여실히 드러났다.

다만 메르켈의 난민정책이 변화할 가능성은 있다. 2017년은 메르켈의 총리 4기 연임이 걸린 선거가 있는 해다.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그의 난민정책을 향해 제기되는 비판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다. <슈피겔>은 “2017년은 메르켈에게 운명의 해가 될 것”이라며 “베를린 테러 이후 그는 가장 어려운 시험을 마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럽 통합 상징하는 ‘솅겐 조약’도 흔들

유럽연합(EU)과 터키가 지난해 3월 맺은 난민협정은 중요한 변수다. EU와 터키 간의 갈등 때문에 지금도 불안한 협정이 최악의 경우 깨져버린다면 독일로 쏟아지는 난민 숫자는 다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고, 메르켈의 난민정책도 전에 없던 위기에 처할 것이다. 안 교수는 “만약 난민협정 파기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 메르켈로서도 별달리 선택할 방법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EU 역내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는 솅겐 조약도 베를린 테러 이후 흔들리고 있다. 아므리가 밀라노에서 사살되기 전 프랑스 리옹의 CCTV에 포착된 사실이 드러난 데다 네덜란드까지 거쳤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어서다. 유럽 전역에 수배령이 떨어진 테러 용의자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각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닌 것으로 추정되면서 국경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프랑스 민족전선(FN), 영국 독립당(UKIP), 네덜란드 자유당(PVV) 등 유럽 각국 극우정당들은 앞다퉈 국경을 걸어 잠가야 한다며 솅겐 조약 폐기를 촉구하고 나섰다. 반EU 성향의 이탈리아 포퓰리스트 정당 오성운동의 베페 그릴로 대표도 “솅겐 조약 때문에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테러리스트들이 이탈리아를 통로 삼아 이동하고 있다”며 조약 재검토를 주장했다.

유럽 26개국이 가입한 솅겐 조약은 유럽 통합을 상징한다. 조약 가입국끼리는 국경 통과 시 별다른 비자나 여권 검사 등을 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 각국 극우·포퓰리스트 정당을 중심으로 반EU·반유로존 정서가 확산되는 가운데 솅겐 조약마저 흔들린다면 유럽공동체에서 빠져나가려는 각국의 원심력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벌어지고 나서 EU 각국은 솅겐 조약의 효력을 2년간 잠정 중단시키는 긴급조치를 검토한 바 있다. 마누엘 발스 당시 프랑스 총리는 “하나의 유럽을 위한 EU의 프로젝트가 ‘매우 중대한 위험’에 놓여 있다”면서 “난민 유입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다면 유럽은 다시 찢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솅겐 조약이 훼손될 경우 이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도 크다. 지난해 독일 싱크탱크 베르텔스만 재단은 솅겐 조약이 무너지면 향후 10년간 프랑스는 2440억 유로(약 309조원), 독일은 2350억 유로의 경제적 손실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심진용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sim@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