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프로젝트팀 ‘생색’의 <엉뚱한 사진관>-평범한 정물사진, 또 다른 가족사진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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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곡차곡 모인 포도즙 봉지들은 어머니가 보내준 달갑지 않은 선물이다. 포도즙 봉지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사물이라면, 여권지갑은 떨어져 지내는 자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다.

세 명의 청년 작가 김진의, 이현우, 조혜영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팀 ‘생색’은 조금은 엉뚱한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들 또래의 청년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인터뷰 대상에게 가족을 떠올리게 만드는 물건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고 그 물건들을 가지런히 모아 사진을 찍고 가족사진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들은 이 평범한 정물사진이 또 다른 가족사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엉뚱한 사진관’이었지만, 사실 너무나 당연한 아이디어였다. 무의미하게 소비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갖고 있는 물건에는 크고 작은 각자의 추억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물건에 담긴 아주 작고 사소한 이야기

사실 정물화라는 장르 자체가 사물 그 자체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 사물에 담긴 의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물질, 세속적 욕망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던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는 정물 하나 하나가 은유하는 바가 중요했다. 물론 ‘엉뚱한 사진관’ 프로젝트에서 담은 가족사진, 즉 정물사진들은 종교적 메시지를 간직한 바니타스 정물화처럼 보편적인 서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들에 의해 선택된 사물과 그 사물에 담긴 추억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정물사진-포도즙, 여권케이스., 사진, 2016

정물사진-포도즙, 여권케이스., 사진, 2016

하지만 ‘엉뚱한 사진관’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개인의 이야기들은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잔뜩 쌓여 있는 포도즙 봉지와 여권 지갑으로 구성한 이 사진을 보자. 건강원에서 으레 볼 수 있는 약봉지, 여권, 그리고 그 뒤로 어렴풋하게 보이는 자취방의 풍경은 어느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모습들이다. 사물에 얽힌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특히 수능시험이나 각종 고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체력이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으레 번들번들한 레토르트 약 봉지를 받게 마련일 것이다.

문제는 그 선물이 나의 취향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에 있다. 특히 건강식품이 그럴 것이다. 자식 건강에 대한 부모님의 걱정에 자식의 기호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입에 쓴 것이 몸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먹기 싫은 것도 억지로 먹어야하는 고역, 그 역시도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일이다. 여기 이 사진에 차곡차곡 모인 포도즙 봉지들도 어머니가 보내준 달갑지 않은 선물이다. 봉지에는 포도즙이라고 쓰여 있지만, 그 중 일부는 홍삼즙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 사진의 주인공은 홍삼을 먹지 않는다. 봉지를 열고 입에 가져갔을 때, 달콤한 포도즙 대신 씁쓸한 홍삼 액기스가 입 안으로 밀려들어올 때의 당혹감은 적지 않을 것이다. 홍삼을 먹지 않는 자식에게 억지로 홍삼을 먹이려는 어머니의 아이디어였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홍삼즙과 포도즙을 짜낸 건강원이 포도즙 봉지만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지극히 사소하고 사적인 이야기가 가진 힘

포도즙 봉지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사물이라면, 여권지갑은 떨어져 지내는 자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다. 이 여권지갑은 주인공이 낡은 바지를 가지고 직접 만든 것이다. 같은 지갑 2개를 만들어 동생과 나누어 가졌다. 언니가 만들어 준 선물에 동생은 뛸 듯이 기뻐했고, 지금은 다른 나라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서로 다른 시간에서, 서로 다른 하늘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어쩌다 한 번 여권지갑을 보는 순간만큼이라도 서로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물사진 - 손수건과 마스크, 사진, 2016

정물사진 - 손수건과 마스크, 사진, 2016

‘생색’이 찍은 가족사진은 그리 거창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 작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나 아이디어, 만들어낸 이미지는 너무나 익숙하며, 참신함과는 거리가 멀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세 명의 작가는 무의미한 활동을 한 것이며, 이 작업도 그저 무의미한 사진 한 장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역사에 남은 수많은 미술품들은 타인을 압도하는 새로운 발견들,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통찰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는 것처럼 지극히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생각과 행동들로 구성된 작품들로 이루어진 것 또한 적지 않았다. 사실 우리 사회나 인간의 삶도 수없이 반복되는 평범함 속에서 선과 악, 참신함과 진부함이 수없이 엇갈리고 있다. 창작 역시 마찬가지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이야기들이 힘 있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작업에 담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온다. 다시 이 사진과 주인공의 이야기를 돌아보자. 사진 속 풍경은 너무나 친숙하여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고, 주인공의 이야기는 학교나 학원을 같이 다니는 친구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기숙사나 자취방 룸메이트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니, 이 사진을 보는 나 자신이 주인공과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필자의 경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기에 유사한 경험을 하다 보니 이 작업을 떠올렸다.

한 해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참 많은 다짐을 하게 된다. 올해에는 반드시 졸업을 하겠다. 반드시 취업을 하겠다. 반드시 시험에 합격하겠다. 몸무게를 얼마 줄이겠다. 늦잠 덜자고 건강관리, 시간관리를 잘 해야겠다. 그렇게 한 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다.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자취를 하는 사람이라면 새해와 함께 집에서 보내온 응원의 선물을 받을지도 모른다. 아니, 가족들과 함께 살더라도 받을 수 있겠다. 원치 않는 선물에 사랑과 응원의 마음이 가득 담겨올 때의 난처함은 내년 이맘때에 매년 같은 다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 배가 될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약봉지처럼, 구입한 며칠만 부지런히 챙겨먹고 쌓아둔 건강식품처럼.

<권혁빈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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