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

<복학왕>-있는 그대로 우리 세대 이야기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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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안84는 동세대가 겪고 있는 현실의 밑바닥을 포착해 가장 섬세하게 그려내는 능력을 가진 작가다. ‘있는 척’이 아니라, 자신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할 줄 안다.

내가 아는 작가 ‘기안84’는 웹툰 <노병가>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의경 기동대에서 벌어지는 구타 및 가혹행위를 여과 없이 그려낸 이 작품은 20대 남성들 사이에서 꽤나 화제가 되었다. 과장된 것이다 아니다, 하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은 “우리의 (군대)이야기이다”라고 여론이 모아졌다. <노병가>만큼 사실적으로 그 시기 대한민국 남성들이 겪었을 법한 군 내무반 생활을 그려낸 작품은 그동안 없었다. 그러면서 기안84는 몇 편의 단편을 함께 발표했다. 나이트 부킹, 아르바이트, 싸이월드 미니홈피 등을 소재로 한 그 작품들 역시 “우리의 (사랑)이야기이다”라는 반응을 이끌어 냈다. 그의 그림은 투박했고, 서사는 치밀하지 않았고, 심지어 맞춤법마저도 여기저기가 틀렸다. 그러나 그만큼 자신의 세대를 있는 그대로 내어 보인 작가는 드물었다. 그저 암울하거나 반짝이거나,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게 치부되던 자신들의 세계를 담담히 드러내 보였다.

자신의 세대를 있는 그대로 내어 보인 작가

기안84는 네이버 웹툰 <패션왕>으로 돌아왔다. 고등학생들이 ‘패션’으로 대결을 한다는 그간 없었던 독특한 소재의 학창물이었다. 평범한 고등학생 우기명이 패션왕이 될 것을 선언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십대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주인공 우기명과 그를 둘러싼 여러 등장인물들은 그들·우리의 모습 그대로였다. 많은 학창물이 점멸하는 동안 ‘찐따’와 ‘일진’의 모습을 그만큼 섬세하게 그려낸 작가는 없었다. 그것이 많은 십대를, 그리고 그 향수를 기억하고 있는 이십대와 삼십대까지를 모두 독자로 불러냈다. <패션왕>은 기안84가 얼마나 한 세대의 감수성을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작가인가를 증명한, 그러한 작품이었다.

기안84 작가의 만화 <복학왕>의 한 장면. / 네이버 웹툰

기안84 작가의 만화 <복학왕>의 한 장면. / 네이버 웹툰

다만, 그는 여전히 서툴렀다. 작화 실력뿐 아니라 검수되지 않은 맞춤법도 여전히 비판 받았다. 업데이트는 항상 늦었다. 무엇보다도 <패션왕>을 연재할 때의 기안84는 장편 서사를 이끌어 갈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은 작가였다. 그래서 그에 대한 찬사는 어느 지점을 지나며 악평으로 바뀌었고 작품 역시 급히 마무리하게 된다. 패션 대결을 펼치던 우기명이 갑자기 ‘늑대’나 ‘닭’으로 변한다거나, 학생들이 모두 식물이 된다거나, 하는 개연성을 무시한 전개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작업실을 썼던 웹툰 작가 이말년은 “인류 역사상 핵폭탄 이후로 나와서는 안 되는 게 나오고 말았다”고 우기명이 늑대로 변하던 순간을 회상하기도 했다.

<패션왕> 이후 기안84의 그 다음을 기대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굳이 평론하자면, 그는 바닥을 드러낼 만큼 드러낸 작가였다. 그런데 그는 <복학왕>이라는 작품으로 1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제목에 ‘~왕’이라는 접미사를 붙이고는 대학생이 된 우기명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갈 것을 선언했다. 고등학교가 아닌 대학으로 그 공간을 확장한 그는, 그간 자신이 해 왔던 방식을 여전히 고수한다. “있는 그대로 우리 세대의 이야기를 한다”는 원칙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다른 작가들이 쉽게 흉내낼 수 없는, 기안84가 가진 최대의 자산이다. 그는 명문대나, 인서울 대학이나, 거점국립대가 아닌, ‘지방의 잡스러운 대학교’의 줄임말인 ‘지잡대’의 학생들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졸업한 선배가 철가방을 들고 학교에 배달을 온다거나, 워드 1급 합격을 현수막에 기재한다거나, 동거하는 커플들 간에 생긴 아기의 울음소리로 캠퍼스가 시끄럽다거나, 그러한 현실이 우기명과 봉지은의 눈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거기에 절망하고 벗어나고자 하지만 자신들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하고,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그 일원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기안84는 기안대학교라는 가상공간을 통해 지방대학교의 현실을 무리하게 과장해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지방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확장시킨 것이기도 하다. ‘지잡대’는 이미 지방대를 대신하는 새로운 용어로 자리 잡았다. 패배, 잉여, 루저와 같은 단어의 상징 공간이 되어 버렸고, 좌절과 자기 검열, 무력감의 재생산이 그 구성원들을 깊이 감싸고 있다.

‘취업왕’, ‘퇴직왕’, ‘창업왕’ 도전에 나설 것

그런데 기안84는 그 공간으로 들어가서 결국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어 나왔다. 기안대의 학생들이 겪는 고민은 평범한 대학생·청년들의 그것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었다. 그들의 술자리가, 연애가, 취업에 대한 고민이, 다시 한 번 모두의 마음을 울렸다. 특히 졸업 이후를 상상하면서는 그 누구도 더 이상 팔짱끼고 ‘못난 집 불구경’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써울대’와 ‘욘세대’ 명찰을 단 패스트푸드점 매니저는 기안대학교 졸업장을 보며 “감자 튀기는 건 힘들다고요, 이런 스펙으로는” 하고 말한다. 물론 감자를 튀기는 최저시급의 노동에 스펙이 필요하지는 않겠으나, 역설적으로 스펙이 있어도 취업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그러한 현실에 대한 자조는 서울대생이든 연세대생이든 모두에게 가서 닿을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방학 동안 각종 육체노동을 하며 등록금을 마련하는 우기명과 친구들이, 공무원시험 합격을 위해 노량진에서 분투하는 04학번 누군가가, 밤늦게까지 대학가에서 술을 마시며 인생을 한탄하는 우리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패션왕이 되기를 선언하고 지방대에 진학한 우기명은 경쟁을 거부한 잉여인간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그 역시 시대의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남과 다르지 않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다. 기안84는 우기명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청춘임을 내어보였다. 경쟁에 내몰리며 동시에 왕이 되기를 꿈꾸고 다시 좌절하는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다.

기안84는 동세대가 겪고 있는 현실의 밑바닥을 포착해 가장 섬세하게 그려내는 능력을 가진 작가다. ‘있는 척’이 아니라, 자신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할 줄 안다. 이처럼 담담하게 자기 세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그가 계속해서 80·90세대의 르포르타주 연작을 구성해 주기를 바란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세계가 이제는 그 바깥으로도 확장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대학 졸업을 앞둔 우기명은 이제 고작 23세가 되었다. 기안84는 2016년 봄에 <나 혼자 산다>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우기명을 30세까지 쭉 그리고 싶다. 우기명이 장가갈 때까지 독자와 함께 커 가는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자신의 꿈을 밝혔다. 고등학생 우기명은 패션왕이 되는 데 실패했고 대학생 우기명도 복학왕이 되지 못할 확률이 크다. 그러나 그는 다시금 ‘취업왕’이나 ‘퇴직왕’, ‘창업왕’이 되기 위한 그 어떤 도전에 나설 것이다. <복학왕>을 연재하며 <체육왕>과 <보세왕>이라는 기획 작품을 짧게 연재하기도 한 기안84는, 이제 ‘~왕’ 시리즈로 자신의 브랜드를 굳혔다. 기안84가 밑바닥에서부터 섬세하게, 2017년에도 다시 한 번 우리의 이야기를 훑어나가 주리라 믿는다. 그는 이제 장편을 연재할 준비가 된 작가다.

<김민섭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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