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의 <테니스 코트의 선서>-혁명 결의하는 평민 의원들 영웅적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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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회의사당 현관에는 충무공 이순신 석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이 국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민주공화국의 국회에 어울리는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남는다.

1789년 6월 20일, 평민들의 대표로 구성된 의원들이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 코트에 모였다. 평민들의 요구에 위협을 느낀 왕당파가 회의장을 폐쇄하자 테니스 코트를 회의장으로 삼아 모인 것이다. 의전장관이 달려와 평민 의원들에게 해산을 요구했지만, 의장 장-실뱅 바이이(Jean-Sylvain Bailly)는 이를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모인 국민은 명령을 따를 수 없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라가 선언했다.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이 의회는 해산되지 않는다고. 테니스 코트에 모인 수많은 의원들이 함께 맹세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Jaque Louis David· 1748~1825)의 <테니스 코트의 선서>는 혁명이 시작되는 순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1790년, 선서 1주년을 맞이하여 자코뱅당에서 다비드에게 주문한 것이다. 당시 다비드는 자코뱅당의 일원으로 혁명정부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화가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 다비드는 혁명 1주년을 기념할 그림을 맡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자코뱅당에 대한 열렬한 당파성을 가지고 있었고, 누구보다 혁명의 순간을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루이 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선서 습작>, 종이에 펜과 잉크, 1790~1792.

루이 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선서 습작>, 종이에 펜과 잉크, 1790~1792.

자코뱅당에서 다비드에게 주문한 작품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다비드는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하여 스케치 작업에 돌입한다. 하지만 다비드는 테니스 코트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다.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 코트는 폭이 좁고 긴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다비드의 그림에서 묘사된 코트는 가로 너비가 보다 넓게 묘사되어 있다. 다비드가 이렇게 그림을 그린 이유는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과는 달리, 화가들에게 있는 그대로를 정확히 재현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림을 통해서 얼마나 극적으로 혁명의 순간을 재현하느냐에 있었다. 테니스 코트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느라 비좁게 느껴지는 화면을 유지하느니, 공간의 가로 비율을 넓게 조정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선택이었다. 화면의 소실점은 바이이의 눈으로 모인다. 그림을 보는 관객은 자연스레 바이이와 눈을 마주치게 될 것이다. 혁명 당시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눈을 마주치는 순간 저항을 결의하며 느낀 감정의 동요가 되살아날 것이다. 바이이의 선언,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이 바이이를 중심으로 팔을 뻗어 맹세를 하는 순간, 맹세를 주저하는 의원을 독려하며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이들, 그 모든 순간의 장면들이 화면 하나에 어우러져 있다.

다비드는 그 당시 테니스 코트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면서 선서가 이루어지던 당시 상황도 마음대로 수정했다. 정면을 바라보고 선서를 하는 바이이의 오른편에는 의자 위에 올라가 바이이를 향해 팔을 내뻗어 맹세하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는 다비드가 이 그림을 그리기에 적임자라고 추천한 뒤보아-크랑세(Dubois-Crance)였다. 뒤보아-크랑세 왼쪽 바로 아래에 두 손을 가슴에 대고 있는 인물은 당시 혁명정부의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Maximilian Robespierre), 화면 왼쪽 구석에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받아 적고 있는 남자는 자코뱅파 언론인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당시 무명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사건을 재현한다면 이 그림에서 그의 존재가 강조될 필요는 없었다. 마라는 다비드와 절친한 관계였다. 그림으로 재현된 선언의 순간만큼이나 현재의 정치상황을 반영한 화면 구성이었다.

이 그림이 흥미로운 지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비드가 그린 스케치다. 스케치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옷을 걸치지 않고 있다. 어차피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옷을 입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비드는 인물 하나하나의 근육을 세세하게 묘사했다. 사실 당시 기준에서 미루어볼 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회화 관습은 인물들의 신체를 근육질과 이상적인 비례로 묘사하여 그려왔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이상적인 신체를 구상해놓는 것은 당연한 과정처럼 여겨졌다. 이는 아름다움과 영웅적인 면모들을 근육질의 이상적인 비례를 가진 신체를 묘사하면서 드러내던 고대 그리스의 관습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다. 당시 그 장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상적인 몸을 가진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들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육체를 이토록 완벽하게 표현한 것은 저항을 결의하는 평민의원들의 영웅적이 면모를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선서>, 잉크와 옅게 칠한 갈색 물감, 연필, 1790~1792.

자크 루이 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선서>, 잉크와 옅게 칠한 갈색 물감, 연필, 1790~1792.

미완성에 그쳐 의사당에 걸리지는 못해

두 번째는 이 그림이 걸리기로 예정된 장소였다. <테니스 코트의 선서>는 헌법 제정을 주장하며 저항을 결의했던 제헌의회의 의사당에 걸릴 예정이었다. 물론 미완성에 그쳐 의사당에 걸리는 것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만약 이 그림이 제헌의회에 걸렸다고 생각해보자. 공화국의 탄생을 준비하며 헌법을 만드는 제헌의회에 어울리는 미술품이었을 것이다. 의사당이라는 공간, 그리고 제헌의회라는 기관이 어떤 성격을 가졌으며, 어떤 연유로 만들어진 것인지, 단 한 점의 그림으로 명쾌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니까. 한편으로 우리 국회를 떠올려본다면 다소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다. 한국 국회의사당 현관에는 충무공 이순신 석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이 국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민주공화국의 국회에 어울리는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남는다. 아마 유독 조선시대의 인물들로 공공조형물을 만드는 한국적인 상황, 그리고 국가주의적 영웅에 대한 숭배가 민주공화국의 가치보다도 우선시되는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다비드의 그림으로 돌아간다. 혁명을 결의하는 순간에서 일렁이는 촛불을 떠올렸다. 오늘날의 혁명은 다비드의 시절만큼 격렬하지 않았고, 왕의 목을 치지도 못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열망은 같은 것이었다. 이 그림이 지금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요즘의 상황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혁명에 준하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 상대는 민주주의 헌정을 훼손한 지도자였다. 언론과 국회, 사법기관을 통해 알려지는 소식들은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어떻게 권력을 사유화했으며, 헌법 이상의 특권을 누려 왔는지 전하고 있다. 박근혜는 왕처럼 군림했고, 최순실은 왕의 옆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현대판 섭정이었다. 삼권분립은 유명무실했고, 민주적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모든 제도들이 무력해졌다. 이에 시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그 열망은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고 시민들의 대표는 대통령의 탄핵을 결정했다. 헌재의 판결을 기다리는 미완의 상황이지만, 이 혁명을 상징할 만한 이미지는 무엇이 되어야 할지 궁금해진다.

<권혁빈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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