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수취인분명’ 논란으로 본 뮤지션과 사회참여

그래도 ‘저항의 노래’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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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랄한 가사 도마 위에…공연취소 소동이 되레 새로운 공존의 활로로

11월 25일, 힙합 그룹 DJ DOC는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신곡 ‘수취인분명’을 발표했다. 그동안 DJ DOC는 ‘여름 이야기’, ‘DOC와 춤을’, ‘나 이런 사람이야’ 등 흥겨운 분위기의 곡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편으로 DJ DOC는 한참 전 악동이던 시절 세상에 대한 불만도 곧잘 노래로 표현하는 그룹이었다. 1995년 그들이 발표한 ‘성수대교’는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사망한 무학여고 학생 8명에 대한 추모의 뜻을 담았다. 2년 뒤에는 어지러운 세상은 직접 나서서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삐걱삐걱’을 발표했고, 2000년에는 언론과 경찰, 검열제도에 대한 분노를 담은 노래를 발표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 의견가는 DJ DOC에 대해 “안치환처럼 사회참여적인 성격이 강한 뮤지션과는 다른 느낌이다. 사회참여라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불만을 ‘쌈마이’의 감성으로 솔직하게 말한다는 점이 다른 사회참여 뮤지션과 DJ DOC의 차이점”이라고 설명했다. ‘수취인분명’은 DJ DOC가 오랜만에 세상을 향해 터뜨린 불만의 결과물이었다.

‘수취인분명’ 하루 전엔 힙합 가수 산이(San-E)의 ‘나쁜X’가 화제를 모았다. 겉보기에는 여자친구와 헤어진 남자의 이야기를 담았지만, 가사는 누가 봐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겨냥한 내용이었다. 12월 2일 현재 멜론 등 음원차트 10위 이내에 있을 정도로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뒀다.

11월 2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5차 박근혜 퇴진촉구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무대 주변에 모여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1월 2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5차 박근혜 퇴진촉구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무대 주변에 모여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미스 박’ ‘병신년’ 등 여성성 초점 비판

두 신곡이 발표되고 박근혜 정부에 분노한 시민들은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이 두 곡은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힙합정신을 외치던 래퍼들은 다 어디 갔느냐’며 국정농단 사태에 적극적이지 않은 힙합 뮤지션들을 비난했다. 한편으로는 ‘미스 박’, ‘병신년’ 등 여성성에 초점을 둔 가사에 대한 비판도 일었다.

뮤지션들의 사회참여가 활발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이들은 해외 뮤지션들의 사례를 많이 거론한다. 지난달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마돈나, 비욘세, 레이디 가가 등 미국의 슈퍼스타급 뮤지션들이 공개적으로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지지한 바 있다. 2012년 한국의 대선에서도 가수를 포함한 많은 대중 연예인들이 특정 대선후보를 지지했다. 하지만 슈퍼스타급 뮤지션의 수는 많지 않았다.

대중음악 평론가들은 오버그라운드 뮤지션의 경우 사회참여가 활발한 편은 아니라고 말했다. 나도원 음악평론가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뮤지션들이 공개적으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게 자연스럽다. 한국이 예외적인 환경이다. 오버그라운드 뮤지션의 경우 상업적인 성공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뮤지션들의 ‘자기검열’을 부추기는 요소로 한국의 억압적인 문화정책을 꼽았다. 나 평론가는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는 사회 비판적인 노래가 금지곡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군사정권이 끝난 다음에도 한동안 사전검열제도가 유지됐다. 정부의 문화탄압이 오랫동안 계속되다보니 뮤지션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자기검열하는 문화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서정민갑 의견가는 “최근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파문에서도 볼 수 있듯 사회적 목소리를 내온 대중예술인들은 직·간접적으로 불이익을 받아 왔다. 블랙리스트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생각한다. 뮤지션뿐만 아니라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배우가 극장 대관을 허가받지 못하는 등 알게 모르게 위축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DJ DOC의 ‘수취인분명’/고발뉴스 유튜브 캡쳐화면

DJ DOC의 ‘수취인분명’/고발뉴스 유튜브 캡쳐화면

음악인 시국선언, 이명박 정부 때보다 3배

다만 평론가들은 ‘요즘 뮤지션들은 사회 비판과 담을 쌓고 산다’는 식의 주장에 대해선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서정민갑 의견가는 “1980년대나 1990년대에는 투철한 사회의식을 가지고 활동하는 뮤지션들이 많았다. 한국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주의 의식이 보편화되면서 이젠 다양한 뮤지션들이 자기가 느끼는 선에서 편하게 현실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더 많아졌다. 다만 매체를 통해 소개가 되지 않을 뿐”이라며 “상대적으로 자본이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디 뮤지션들 중심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는 꾸준히 만들어져 왔다”고 설명했다.

뮤지션들의 사회참여 의지가 낮지 않다는 걸 보여준 사례가 11월 8일 음악인들의 시국선언이다. 당시 대중음악, 국악 등 각계에서 활동하는 음악인 2300여명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즉시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2009년 이명박 정부 규탄 시국선언 때보다 3배가 넘는 인원이 참여했다. 이승환, 가리온, 크라잉넛, 노브레인 등 여러 가수들이 매주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서 미니 콘서트를 열고 있다.

DJ DOC와 산이보다 앞서서 국정농단 사태를 다룬 래퍼들도 여럿 있다.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의 대표주자 MC메타는 11월 17일 과거 자신의 곡을 바탕으로 만든 ‘퇴진의 영순위와 도둑놈패’를 발표했다. 10월 말부터 ‘랩 시국선언’에 참여한 래퍼로는 제리케이, 오왼 오바도즈, 디지 등이 있다.

김봉현 힙합음악 평론가는 편견에 기초해 힙합의 본질이나 래퍼들의 행동을 재단하는 분위기에 우려를 표했다. 일각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을 기면서 일부 유명 뮤지션들이 사회 분위기에 숟가락을 얹듯 ‘시국 랩’을 냈다고 지적한다. 특히 몇몇 시민들은 ‘수취인분명’, ‘미친X’의 가사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면서 평소 사회문제에 관심 없던 래퍼들이 갑자기 사회비판을 하다보니 부적절한 가사가 들어간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김 평론가는 “DJ DOC의 리더 이하늘의 경우 평소에도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산이도 사적인 자리에서 시사적인 이야기를 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며 “래퍼들이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록음악은 저항, 힙합은 사회비판’이라는 등식이 딱 맞는 건 아니라고 지적했다. 사회적 쟁점에 관심을 갖던 뮤지션들이 어떤 임계점을 넘으면 작품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 평론가는 “노래에 힘이 있기 때문에 같은 시민으로서 뮤지션들에게 ‘이런 사안에 앞장서 줬으면 좋겠다’고 아쉬움을 토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사회 비판이 뮤지션들의 의무인 것처럼 보는 태도는 옳지 않다”며 “저항정신은 힙합의 중요한 부분이고, 저도 뮤지션들에게 목소리를 내주면 좋겠다고 권하기도 한다. 하지만 힙합은 사회 비판뿐만 아니라 자유, 돈, 여자 등 다양한 이야기가 공존하는 문화”라고 설명했다.

DJ DOC는 11월 26일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수취인분명’을 공연할 예정이었지만 가사 내용에 대한 항의 때문에 공연이 취소됐다. 대신 같은 날 DJ DOC 멤버들은 마이크 대신 촛불을 들었다. 평론가들은 ‘수취인분명’ 공연 취소를 둘러싼 논란이 오히려 힙합과 촛불이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나도원 평론가는 “힙합의 문화와 사회참여의 문화 사이에 다소 상충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뮤지션의 논리와 사회참여의 윤리가 서로 존중하는 차원에서 결론이 지어진 것 같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서로의 문화가 가까워지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봉현 평론가는 “뮤지션들도 점점 새로운 흐름으로 변하고 있다. ‘내가 남자답고 여자를 함부로 대하고’ 이런 걸 강조하는 게 힙합적인 매력이었다면 이제 세상이 바뀌지 않았나. 오히려 양성평등에 대한 감수성을 예술에 잘 녹이는 게 더 쿨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한다”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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