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없인 못 살아, 정말 못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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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김치가 없었더라면 무슨 맛으로 밥을 먹을까.
진수성찬 산해진미 날 유혹해도 김치 없으면 왠지 허전해.
김치 없인 못 살아, 정말 못 살아.
나는 나는 너를 못 잊어.
맛으로 보나 향기로 보나 빠질 수 없지.
입맛을 바꿀 수 있나.”

‘독도는 우리 땅’으로 유명한 대중가수 정광태의 노래, ‘김치 주제가’다. 옛날만큼 김치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 노래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밥상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음식이 김치이기 때문이다. 조상들은 상에 오른 김치를 반찬 가짓수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국과 마찬가지였다. 김치는 당연히 밥상에 올라야 할 음식이라는 의미다. 역설적으로 김치 없는 상차림은 밥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의 음식에서 김치가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은 높다.

그것은 온 세상을 얼어붙게 만드는 한겨울이라고 달라지지 않는다. 저장김치인 김장김치를 먹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이 김장을 ‘겨울농사’ 혹은 ‘절반의 겨울양식’이라고 한 이유다. 그만큼 중요한 가정사였다. 당연히 모든 가족이 나서 겨울채비를 했다.

김기덕 우정사업본부장(왼쪽 첫 번째)과 우체국 직원들이 11월 25일 서울 KBS 아레나 제2체육관에서 열린 김장나눔대축제에서 김장김치를 담그고 있다. / 우정사업본부 제공

김기덕 우정사업본부장(왼쪽 첫 번째)과 우체국 직원들이 11월 25일 서울 KBS 아레나 제2체육관에서 열린 김장나눔대축제에서 김장김치를 담그고 있다. / 우정사업본부 제공

뿐만 아니다. 김장 담그는 무렵에는 마을이 온통 잔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하는 소설 무렵에 온 동네가 김장을 담갔기 때문이다. 마을 아낙네들은 서로 돌아가면 이웃의 김장을 담갔다. 한 집안의 3~4달치 김치를 한꺼번에 담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을의 여인들이 힘을 보태 김장담그기를 했다. ‘김장 때에는 아홉 방 부녀가 다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규방의 아낙들도 김장 담그기를 위해 소매를 걷어 올렸다는 얘기다. 일제강점기 때는 김장 때가 되면 여학생들에게 ‘김장방학’을 줬을 정도였다. 김장 담그기는 일종의 품앗이였던 것이다.

품앗이의 대가는 당연히 따른다. 김장김치 담그기에 일손을 도운 이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식사를 대접하고 김장김치를 나눠줬다. 특히 잘 사는 사대부에게 김장김치는 부의 분배 수단이기도 했다. 생계가 어려운 이웃에게 김장김치를 나눠줬다.

김장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더욱 더 중요한 양식이었다. ‘풍년이면 김장을 늦게 담그고 흉년이면 일찍 담가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 흉년의 고통은 가난한 이에게 더욱 큰 법이다. 김장김치가 더욱 중요한 영양 공급원이 된다는 의미다. 먹을 것이 흔하지 않은 한겨울, ‘채소의 황제’라는 배추와 ‘채소의 제후’라는 무, 그리고 갖은 양념과 젓갈로 버무린 김장김치는 건강하게 겨울을 날 수 있는 근원이었다.

시대가 달라진 만큼 김장 풍경도 적지 않게 변했다. 핵가족화와 다른 먹을거리가 넘쳐나면서 김치 담그는 양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 당연히 마을축제의 의미는 퇴색됐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게 있다. 김장 문화의 본질이다. 함께 담그고 함께 나눠먹는 공동체의식에 뿌리를 둔 ‘김장정신’은 변하지 않고 있다. 연말연시가 되면 곳곳에서 어려운 이웃을 위한 김장김치 담그는 행사가 벌어진다. 김장김치는 이웃사랑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다.

우정사업본부의 임직원들도 11월 25일 KBS가 주관한 ‘김장나눔대축제’에 참여해 이웃사랑을 실천했다.

<김경은 편집위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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