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03

정치적 해결, ‘실력파 동맹’이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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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진보, 여·야, 대권 경쟁 구도와 정치공학적 셈법 넘어서야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의 몰락!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열린 지금의 정세 상황, 즉 ‘촛불혁명’으로 불릴 작금의 상황은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를 주도해 온 한 축, 즉 박근혜 대통령을 앞세운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의 몰락을 의미한다. 박정희 신화와 영남 지역주의에 기댄, 그리고 박정희 개발독재체제에 연원을 둔 지배 엘리트와 기회주의적 출세주의자들의 사익추구 동맹이 파멸을 맞이한 것이다.

박정희 유신보수주의는 결국은 유신체제로 귀결된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성장과 반공이라는 분명한 통치목표와 이념-보다 정확하게는 이념적 요소-을 갖고 있었다. 성장과 반공은 자신의 지지·동맹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저항세력을 억압하고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분단 현실에서 자본주의 국가와 경제질서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즉 박정희 유신보수주의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 조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11월 19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4차 범국민행동 참가자들이 박근혜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다./정지윤 기자

11월 19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4차 범국민행동 참가자들이 박근혜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다./정지윤 기자

사익을 위한 권력의 장악과 유지

박근혜 대통령을 필두로 한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은 그렇지 않다. 박정희 유신보수주의를 따라 창조경제와 헌정질서 수호를 미명으로 성장과 반공을 내세웠으나 이것은 그들의 진짜 목표도, 진짜 이념도 아니다. 설사 진짜라고 해도, 그들이 다시 불러낸 성장과 반공은 지금의 시대 상황에 조응하는 것이 아니다.

은밀했으나 결국 드러난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의 진짜 목표는 사익추구를 위한 권력의 장악과 유지다. 즉 권력을 사유화하는 것이다. 이를 확인시켜준 것이 바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낡은 것에 기댄 사익추구 세력이 권력을 가졌을 때, 또 권력을 사유화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준다. 온 힘을 다해 사익을 추구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의 진짜 면모가 우연처럼 온 천하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은 분배와 다양한 이념의 포용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세계화 이후 강고해진 승자독식 사회에서 성장동력을 다시 마련하고 혁신 역량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것이 삶의 조건을 보다 평등하게 하는 것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개념을 새로이 설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은 이런 시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성장과 반공을 다시 불러냈다. 그들의 진짜 이념이 사실은 ‘무이념’이기 때문이다. 무이념은 양심에 구애받지 않고 더욱 분방하게 사익을 추구하고 권력을 사유화할 수 있게 해준다. 무이념은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 윤리적 준거가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의 진짜 이념이 무이념이라는 것은 그들이 애당초 민주화 이후, 특히 세계화 이후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작금의 시대 현실에 부합하는 이념적 요소를 찾아낼 안목도 의지도 관심도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성장과 반공이라는 낡은 이념에 쉽게 기댄 혹은 기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동시에 박정희 신화에 기대고, 그것을 위해 자질과 능력과 상관 없이 박근혜라는 ‘상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영남 지역주의에 기대고, 개발독재체제에 연원을 둔 지배 엘리트와 기회주의적 사익추구자들로 정권을 채운 이유이기도 하다.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의 정체가 드러나고 몰락에 이르게 된 것은 더 이상 낡은 것에 의존하는 정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낡은 것에 의존하는 정치는 결국 사익추구의 성향을 띨 수밖에 없으며, 민심은 그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촛불혁명을 통해 확인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단지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낡은 것에 의존하는 정치세력은 그들만이 아니다. 야권도 여전히 반독재 민주화를 넘어서는 목표와 이념을, 호남 지역주의와 1980년대 운동권 엘리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야권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는 유신보수주의 세력의 실정에 대한 심판의 결과였지, 새로운 정치를 선보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야권에 대한 불신 역시 여전히 높은 것이다. 이는 촛불집회 현장에서 정치세력 차원에서는 여전히 환영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정치 전체가 낡은 것과 완전하게 결별하고, 목표와 이념, 사회적 기반과 주도세력 등 전반에 있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한국 정치 전체가 낡은 것과 이별을

박근혜 대통령과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은 파멸의 길에 들어섰으나 퇴진을 거부하고 청와대를 점거한 채 버티고 있다. 촛불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이거나 촛불의 힘을 무시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소중하다 여기는 가족과 함께, 특히 아이들과 함께 광장으로 나온 촛불의 결기를 두려워하고 있어 그런 것이다. 그래서 결기가 최대한 누그러질 때를 기다리며 시간을 벌려고 저리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과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이 스스로 물러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정치적 해결이다.

정치적 해결이란 무엇인가? 현실의 역학관계를 고려해 ‘해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과 이해관계가 다른 여러 세력들이 단박에 동의할 정답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정치적 해결은 여러 세력들 간의 토론을 거쳐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방책을 내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또 정치적 해결이란 대표성을 지닌 정치권이 촛불시민의 뜻에 바탕하고, 숙고와 숙의를 통해 도출한 방책을 정당한 절차에 준해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정치적 해결이란 여러 세력들 간의 차이를 존중하며 최소화하는 동시에, 대표성과 정당성을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 역시 바로 시간이다. 조급하게 어느 일방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의 설정이다.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차이를 해소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그리고 대표성과 정당성의 수준이 결정된다. 목표가 당파성과 정치공학적 셈법을 넘어설 때 생각과 이해관계의 다름을 해소할 수 있고, 대표성과 정당성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

야권의 차기 대선주자들이 11월 20일 비상시국정치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손을 맞잡고 있다./김창길 기자

야권의 차기 대선주자들이 11월 20일 비상시국정치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손을 맞잡고 있다./김창길 기자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이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야권을 비롯한 정치권이 아직도 정치적 해결의 목표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사불란하게 ‘권력 인수’의 대오를 꾸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국내각 구성과 책임총리 인선을 수용할 것인지 아닌지, 특검을 어떤 방식으로 추진할 것인지, 퇴진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아닌지, 조기대선을 실시할 것인지 아닌지, 실시한다면 언제 실시할 것인지, 탄핵을 추진할 것인지 아닌지, 촛불시민과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등을 둘러싸고 쓸데없이 논란을 벌여 왔다. 무엇을 할 것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정세 흐름 속에서 어떻게 배열할 것인지가 문제였는데도 그리했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기는 했다. 검찰 수사를 통해 진상이 드러나야 했고, 광장에서 촛불시민의 요구가 무엇이며, 결의가 얼마나 강한지 확인이 필요했다. 야3당 간의 협의와 새누리당의 내부 분열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중에도 정치적 해결의 목표에 대해 논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면서 흘러가는 시간의 유의미성을 제시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현재 정치권은 야당을 중심으로 ‘질서있는 퇴진’을 기치로 특검과 국정조사의 실시, 그리고 탄핵 추진이라는 정치적 프로세스를 밟고 있다. 야당과 새누리당 비박계 간의 공조 분위기도 조성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세스가 과연 의도대로 순조롭게 진행될지 우려를 자아내는 부분이 있다. 특히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의 거부와 버티기를 극복하고 프로세스를 순조롭게 밟아가는 데 필요한 ‘힘의 집중’을 가로막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대선주자들 간의 경쟁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권 일각의 개헌 추진에 따른 쟁점의 분산이다.

해법의 도출과 실행이 지연되는 야권

야권의 대선주자들이 저마다 홀로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대표성과 정당성을 확보한 권위 있는 해법의 도출과 실행이 지연되어 왔다. 그나마 최근 대선주자들이 ‘비상시국정치회의’라는 이름으로 회동을 가져 탄핵 등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아 다행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다. 대선주자들이 경쟁을 지양하고, 힘을 모아 촛불혁명의 기운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틀을 만들어내는 합의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촛불시민들과 어떤 방식으로 연계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모으지 못했다. 이 단위의 향후 일정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일회성에 그칠 것이라는 관측이 내려지고 있다. 하지만 정당에 대한 촛불시민의 불신이 존재함을 고려할 때, 정치권과 시민을 연계하는 주된 고리로서 역할할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이 단위에 참여할 범위와 요건과 의제 등을 촛불시민의 의견에 기초해 정해야 한다.

개헌을 통해 낡은 정치와 결별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있다. 김종인, 손학규, 김무성 같은 인사들이 대표적이다. 개헌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시의적절함이다. 지금 촛불시민들은 헌법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헌법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의 권력 사유화와 사익추구 행태는 헌정질서를 교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정치적 해결의 프로세스도 헌법에 기초해 추진되고 있다. 이런 때에 개헌을 주장하고 추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또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의 문제가 단지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였는지, 그래서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를 도입하면 해결될 성질의 문제인지도 의문이다. 현실적으로도 대선주자들이 개헌을 추진할 가능성도 높지 않다. 개헌 주장이 갖는 바람직함은 헌정체제의 차원에서 정치를 새롭게 재편하자는 데 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재편인지 분명치 않다. 분명하다 해도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정치권만의 권력 분점을 둘러싼 분열 혹은 분화로 몰고가는 것에 머물고 말 공산이 크다. 개헌의 추진 시기와 방식과 내용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다시 문제는 정치적 해결의 목표이다. 대선 경쟁이든 개헌이든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대선주자들의 경쟁이 단지 여야 정권교체를 목표로 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개헌이 권력의 분점을 목표로 한 것이어서도 안 된다. 그것으로는 정치적 프로세스를 원활하게 진행시킬 수도,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의 퇴출 이후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낼 수도 없다. 지금은 어느 대선주자도 폭넓은 지지와 신뢰를 보유하고 있지 못한 데다가, 촛불시민이 원하는 새로운 정치는 권력구조의 개편이 아니라, 승자독식 사회의 혁신이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이 없는 보통사람들도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 삶을 영위할 새로운 나라의 건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선주자들의 경쟁이든 개헌이든 정치적 해결의 목표는 승자독식 사회의 혁신을 위한 좋은 정부의 구성에 맞추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양심적이고 실력을 갖춘 정치세력의 결집, 즉 ‘실력파 동맹’의 구성이 되어야 한다. 보수·진보, 여·야, 대권 경쟁을 둘러싼 진영과 구도와 정치공학적 셈법을 넘어서야만 한다. 그래야 좋은 정부 구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거국내각은 새로이 등장할 정부가 구성할 성질의 내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시민이 신뢰할 수 있고, 폭넓은 관심과 지지를 확보할 수 있으며,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수렴하고, 혁신에 저항하는 기득권 세력을 제어할 수 있다. 그래야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갈 새로운 혁신 주체와 비전과 전략과 실천방식을 벼릴 수 있다. 정치권은 사이비 유신보수주의 세력의 타파를 위한 정치적 프로세스를 밟아가면서, 촛불시민의 의견을 모아 좋은 정부 구성을 위한 실력파 동맹의 길을 모색하길 바란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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