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 구국봉사단-방문규차관

박근혜의 구국봉사단 3백만 단원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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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규 복지차관 구국여성봉사단 기관지 37년 전 기고 “박 총재님 격려사 보고 깨달았다”

최태민 일가의 40년에 걸친 전횡을 취재하다 보면 의문이 남는다. 전국적으로 300만명이나 있었다고 하는 구국여성봉사단과 구국십자군으로 조직되었던 사람들,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무리 30~40년이 흘렀다고 하지만 그때를 기억하고 증언해줄 사람을 이토록 찾기 쉽지 않은 걸까.

‘박 총재’ 노골적 찬양 기고 글 실리기도

“큰 영애는 부속실에 출근하시면 국민들로부터 온 편지와 진정서, 그리고 건의, 요망사항, 구국여성봉사단의 업무와 많은 서류들을 접하시어 이 모든 것들을 보고 차근차근 분석하시고, 명석한 판단과 선택을 대통령 각하께 보고하기도 한다.” 구국여성봉사단의 기관지 <새마음> 2호(1978년 8월호)에 실린 ‘기자가 본 큰 영애’라는 제목의 기고문이다. 유신 말기, 고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던 박근혜 당시 ‘큰 영애’의 일상을 기록한 글이다. ‘접하시어’, ‘분석하시고’와 같은 극존칭도 그렇지만 ‘명석한 판단과 선택’ 등의 어휘 선택은 수령과 당 중앙의 활동을 선전하는 북한 매체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게도 한다. 글의 저자는 당시 <한국일보> 정치부장 대우 송효빈으로 되어 있다. <새마음> 잡지에서 송효빈 기자의 기고 글은 이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송 기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일보> 논설위원·기자협회장(제6대)을 역임하고, 원로기자들의 모임인 대한언론인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포털에서 뉴스를 검색해보면 2014년 고 성유보 선생의 <한겨레신문> 기고문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일보의 송효빈 기자는 (1980년) 8월 9일 ‘요미우리, 아사히 등 일본 5대 신문은 미국이 한국의 국보위 상임위원장인 전두환 대장을 지지할 용의가 있다는 의향을 분명히 했다고 8일 보도했다’는 뉴스를 타전했다.” 기고의 제목은 ‘1980년대 전두환 칭송했던 언론들 지금은…’이다. 그러니까 <새마음>에 글을 기고한 2년 뒤 송 기자의 ‘취재대상’은 신군부 권력 핵심실세로 옮겨갔다.

“…당시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직업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야학 선생을 했었다. 교사들도 학생들도 순수했었다. 학생들에게 상업부기도 가르치고, 주산도 가르쳤다. 정치적 색채가 있었으면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마음> 잡지에 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 간부로 소개된 인사의 최근 회고담이다. 그는 당시 자신이 가르치던 야학교실이 당시 충정로 인근(정확히 말해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775번지)에 자리 잡은 경로한방병원 옆 건물 사무실 건물의 방 2개를 빌려 운영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이 인사는 최근의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당시에는 최태민이나 최씨 일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며 “지금 알려진 것처럼 사이비교와 관련된 어떤 활동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1977년 3월 2일, 구국여성봉사단이 주최한 불우노인 의부모 결연식 및 서울시 12개 지부 결단대회장에서 박근혜 명예총재가 연설을 하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1977년 3월 2일, 구국여성봉사단이 주최한 불우노인 의부모 결연식 및 서울시 12개 지부 결단대회장에서 박근혜 명예총재가 연설을 하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새마음>지를 보다 보면 현재 대한민국의 뉴스메이커인 최순실씨의 활동과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 잡지의 3호(1978년 12월호)에 실린 글에 따르면 ‘단국대 4학년’이라고 되어 있는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 최순실 회장은 전국 중·고·대학생 총연합회라는 상부조직을 만들어 회장이 되기도 한다. 이 발대식의 참관기에 기록된 최 회장의 ‘제 일성(一聲)’은 다음과 같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보람을 느낍니다. 전국의 학생조직과 총화로서 이룩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학원의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여 학생 본분을 찾아 타의 모범이 되겠습니다. 앞으로 지방조직 육성을 더욱 가속하겠습니다. 우리의 목적 사업과 특히 새마음학교에 정열을 바치겠습니다.” 최씨는 1979년 1월호에 ‘새마음의 대하(大河): 우리 함께 뭉치자 일하자 믿자’는 기명 기고를 하기도 한다. <주간경향>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이 잡지에 실린 최씨의 활동사진을 담은 사진을 여럿 발굴했다. 학생연합회 임원들 앞에서 연설하거나, 구국여성봉사단 활동의 일환으로 물품을 전달하는 기념사진에 일원으로 참여한 최씨의 사진이다.(사진 참조) 최씨가 한때 언론사 취업을 꿈꾼 것으로 추정되는 기고 글도 발견할 수 있었다. “…올해 D대학을 졸업한다는 C양은 ‘모집요강에 남녀제한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어느 신문사에 원서를 내러 갔더니 아예 받지 않는다는 거예요. 남자들은 시험도 치르지 않고 무더기로 채용이 되는데, 충분히 능력이 있는 여성들도 여자라는 이유로 거절된다니 정말 어처구니 없어요’라고 불만을 토로한다.” 이 주장 글의 앞뒤 문맥을 보면 D대학 C양은 단국대 최순실씨로 추정된다. (단국대 측은 최근 최순실씨의 학적을 확인해본 결과 “정식으로 학위를 취득한 졸업생이 아니라 청강생”이라고 주장했다.)

40년 전 학생연합회장 ‘최순실’

박근혜 정부 현역 고위 관료의 37년 전 글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 새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 새마음이라면 헌마음이란 것도 있을 터인데 어떻게 다른 마음일까? 하고 의문을 가졌었고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새마음>지를 읽으면서 새마음에 관한 많은 것을 깨우쳐 갔습니다. 특히 매달 게재되는 박 총재님의 격려사는 새마음 교육의 지표가 되어 주었습니다.” <새마음> 1979년 7월호에 실린 당시 수원 수성고 2학년 방문규 학생의 ‘우리에게 새마음 교육의 길잡이가 되어’라는 제목의 글이다. 방문규 학생은 서울대 영문과에 진학해 1984년 행정고시 28회에 합격했으며, 이듬해 졸업과 동시에 총무처 수습행정관(5급)으로 들어간다. 재무부, 기획예산처, 재정기획실 등을 거쳐 2009년에는 농수산부 식품산업정책단장, 식품유통정책관을 거쳐 다시 기획재정부로 돌아가 2014년 기재부 제2차관을 역임한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방 차관은 보건복지부 차관으로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안팎에서 방 차관은 ‘실세 차관’으로 불린다. “이 정부 들어 복지부가 성적도 안 좋고 지적도 많이 받았다. 사실 나도 (방 차관) 부임 이후에 같이 밥도 먹고 했지만 기재부 차관이 복지부 차관으로 다시 왔다는 것은 뭔가 굉장한 미션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 보건복지부 산하 한 기관장의 말이다. 방 차관이 부여받았다는 그 ‘미션’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언론 보도 기사를 검색해보면 방 차관이 지난 7월 박 대통령의 몽골 순방에 동행해 ‘정보통신기술기반 의료기술협력’ 양해각서(MOU), 다시 말해 원격의료 MOU를 체결하고 돌아왔다는 ‘성과’ 보도가 있었다. 당시 정부 측 보도자료를 보면 ‘몽골에 의료한류를 전파한다’며 이 순방을 선전하고 있다.

구국여성봉사단(나중에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 기관지 <새마음>에 실린 최순실씨의 사진들. /<새마음>

구국여성봉사단(나중에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 기관지 <새마음>에 실린 최순실씨의 사진들. /<새마음>

다시 올해 8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은 서산 효담요양원을 방문해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참관한다. 그로부터 5일 후 방 차관은 페루와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가천대길병원을 방문해 원격협진 진행상황을 점검한다. 방 차관에게 주어진 미션은 ‘원격의료’ 관철일까.

박근혜 정부 들어 보건복지분야에서 ‘이해할 수 없는 프로세스의 전개과정’을 보여줬던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 보건의료 관련 단체 인사의 증언이다. “이 정부 들어서 복지부가 필사적으로 통과시키려고 했던 법 가운데 국제의료지원법이라고 있다. 제목만 있고 내용은 사실상 없는 법인데,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여당 의원에게 ‘왜 그렇게 기를 쓰고 통과시키려고 하느냐’고 물어보면 여당 의원이 대답하길 ‘복지부도 VIP의 뜻이라고만 답을 한다. 다른 것 상관 없고 국제의료라는 이름만 들어가면 된다’고만 말했다. 일단 국제의료법이라는 이름의 법이 통과되면 그쪽에 예산이 배정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인사는 보건복지부 인사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추진한 영리병원 등의 문제에 대해 보건복지부가 매우 미온적인 입장을 갖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박근혜 정부는 결국 이게 복지부의 문제라고 봤다. 복지부에 아예 기재부 사람(방 차관)을 갖다 앉혔는데, 그것으로도 안 되니 나중에는 과장까지 날린 것이 아닌가. 국장이라면 또 몰라도 비선실세가 과장까지 날린다는 거, 이거 상식적으로 이해 가는 이야기인가.” 이 인사가 말하는 ‘비선 과장 교체’는 최근 박 대통령과 유착 의혹이 불거진 차병원의 줄기세포 비동결난자 활용에 대해 반대입장을 밝힌 보건복지부 주무과장 교체 의혹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방 차관이 고등학생 때부터 그들(최씨 일가)과 뭔가 관련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실세 차관으로 그가 떠오른 배경에는 ‘과거 고등학교 시절에 <새마음>지에 기고한 적이 있었다’는 ‘인연’을 방 차관이 적극 어필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주간경향>에 현 정부 현직 고위 인사의 기고글이 그 잡지에 실렸다고 제보한 인사의 ‘추정’이다.

구국여성봉사단(나중에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 기관지 <새마음>에 실린 최순실씨의 사진들. /<새마음>

구국여성봉사단(나중에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 기관지 <새마음>에 실린 최순실씨의 사진들. /<새마음>

“기고 여부 기억나지 않는다”는 차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설령 썼다고 하더라도 고등학생이 뭘 알고 썼겠느냐.”

11월 17일 <주간경향>과 통화한 방 차관의 말이다. 기자는 방 차관의 ‘기억’을 돕기 위해 휴대폰으로 방 차관이 기고한 것으로 되어 있는 글을 사진찍어 보냈다. 글을 본 뒤에도 그는 여전히 “기억 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존댓말로 글을 쓴 것도 그렇고, 고등학생의 글 치고 글이 논리적이고 문장이 매끄럽지 않으냐.” 다시 말해, 자신이 쓴 글이 아니라 당시 학교 선생님 등이 자신의 명의를 빌려 ‘투고’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는 의미다. 글이 논리적인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방 차관의 주변 증언에 따르면 그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야생초’라는 문학서클을 하고 있었으며 여러 매체에 글을 투고했을 뿐 아니라 관련해서 문학상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방 차관은 “당시 그런 모임을 했었고, 상을 받은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주로 문학과 관련된 내용을 썼지 비문학지에 글을 쓴 기억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여러 차례의 통화에서 방 차관은 “의료민영화는 추진하지 않는 것이 복지부의 방침이며, 원격의료는 의료민영화와 무관한 격·오지 등에서 의료 공공성을 확장시키기 위해 추진하는 것”이라며 “대통령의 해외순방에 동행하는 것은 장관과 차관이 번갈아 가는 것이 원칙이라 몽골 방문은 순차적으로 차례가 되어 방문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장관님(정진엽 보건복지부 장관)과 우리끼리 이야기이긴 하지만 최순실 비선 논란이 불거지는 것을 보고 ‘복지부는 그렇게 각광을 못 받냐’고 농담삼아 말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다시 말해 최순실과 같은 비선실세를 만난 적도 없고, 어떤 지시를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실세 차관이었으면 기재부에서 더 위로 갔지 뭐하러 보건복지부에 왔겠느냐”며 억울하다는 심정을 여러 차례 밝혀오기도 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관이면 공무원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지위다. 장관은 정무직이다. 장관 이상은 정치적으로 발탁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무원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전혀 다른 부서에서 왔다는 것은 기재부가 자신의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파견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매우 이례적인 인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인사는 ‘정권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의 말이다. 그는 박 대통령과 최순실이 차움병원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게 드러나면서 이 정부가 추진해온 ‘맞춤형 의료민영화’의 실상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보건복지부는 국내 영리병원을 허용하지 않는다까지만 이야기하는데, 회원권 1억5000만원짜리 병원을 버젓이 허용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에 드러나지 않았는가. 차움병원에 과연 누가 갔겠느냐. 사실상 편법적으로 1%의 영리병원을 허용하고 있었고, 대통령으로부터 최상위 1%만 다니고 있었다는 것이 이번에 밝혀지게 된 것이다. 편법적으로 운영되는 1%의 영리법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보건복지부는 과연 무엇을 했나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다시 처음의 의문으로 돌아가자. 구국여성봉사단 300만 회원들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기관지 <새마음>에 반영된 그들의 활동만 놓고 보면 편집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1979년까지 ‘박근혜 총재’의 활동은 매우 바빴다. 창간호 기고 글을 제외하면 나머지 권두언은 직접 기고 형태가 아니라 구국여성봉사단 지역발대식 등에서 연설문 내용을 요약해놓은 것이었다. 대학교수, 언론인, 수필가, 화가 등 각계 저명인사의 기고도 박 총재의 연설 내용을 인용하는 등 경직된 것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기조는 크게 달라진다. 시대와 경제를 걱정하는 권두언은 박근혜의 연설문 대신 기고 글이다. 대신 필자가 누군지 밝혀놓고 있지 않다. 기사의 편집방향도 ‘생활상식’이라든가 기업체 대표가 ‘내가 사원이라면’ 식으로 보다 순화된 내용으로 바뀌었다.

1978년과 1979년에 지면에서 자주 보였던 필자 중에는 1980년에 발간된 <새마음> 잡지에서는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다수였다. 그해 3월 22일, 최순실씨도 대학생총연합회 회장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이 되었다. 새로 회장으로 선출된 이는 당시 연세대 생물학과에 재학 중이던 지석진씨였다. 구국여성봉사단은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구국여성봉사단(나중에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 기관지 <새마음>에 실린 최순실씨의 사진들. /<새마음>

구국여성봉사단(나중에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 기관지 <새마음>에 실린 최순실씨의 사진들. /<새마음>

새마음봉사단, 권력 향한 ‘부나방’

“저희 새마음 연예인봉사대는 그동안 박 총재님의 따뜻한 배려와 각계의 적극적인 협조로 여러 가지 뜻 있는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고….” 이해 3월, 전국새마음연예인봉사대 송해 대장(코미디언)이 밝힌 ‘금년도 주요 행사계획’이다. 새마음연예인봉사대는 새마음봉사단의 부문 조직이다. 어찌된 일인지, 이해 이 조직은 자주 임원이 변경되었다. 7월 1일 코미디언 고 구봉서씨를 명예단장으로 추대했고, 다시 10월 6일 대장은 상임부대장을 맡았었던 코미디언 고 이대성씨가 맡았다. 송해 전 대장은 지도위원장으로 자리를 바꿨다. 국회도서관 등에 보관된 <새마음> 기관지는 1980년을 끝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소리소문 없이 발간된 책이 한 권 있다. <태자마마와 유신공주>라는 제목의 책이다. 최태민과 박근혜 관계를 그동안 언론 보도 등의 자료를 통해 정리한 책이다. 책의 저자는 현재 미국으로 이민을 간 김수길씨다. 11월 17일 <주간경향>과 통화에서 김수길씨는 ‘부나방’이라는 표현을 썼다.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최씨 일가와 그에 부화뇌동해 온 사람들이 이권을 노려 권력 주위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신군부의 등장으로 권력의 중심축이 이동하니 자연스럽게 떠난 것이죠.” 그리고 40년. 다시 비선실세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부나방들’. 우석균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미 알려진 것만 하더라도 황당한데, 앞으로도 (최씨 일가 비선의 국정농단 케이스가) 더 나올 것이라는 것이 기가 막힐 따름이죠.”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na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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