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24는 북파공작원 방송이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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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 노래 틀고, 방송하다 끊기고… 북한 상대 심리전 가능성

“칠백공팔, 육십사. 일백사십오, 칠십팔. 공사십육, 구십이.”(대북 난수방송의 일부)

규칙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숫자를 연달아 불러주는 난수방송은 1차 세계대전 때부터 간첩들에게 지령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유튜브 등지에 올라온 난수방송을 듣다 보면 스스로 공작원이 된 것 같은 착각에 잠시 빠질 수 있다.

지난 7월 15일, 북한의 대남방송인 평양방송은 16년 만에 난수방송을 부활시켰다. 통일부 정준희 대변인은 이에 대해 “북한이 최근 고정간첩들에게 지령을 내리는 난수방송을 시작한 데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 입장에서 통일부의 입장은 어불성설일 수 있다. 단파 난수방송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온 것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난수방송을 재개하기 몇 달 전부터 남한은 난수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지난해 6월부터 잠시 난수방송이 끊겼을 뿐 북한의 난수방송이 중단된 2000년 이후에도 남한의 난수방송은 끊어지지 않았다. 단파 난수방송은 북한 당국보다는 남한 당국에 중요한 통신 수단이다. 양측이 여전히 상대에게 비밀공작원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북한 공작원들의 활동무대는 남한이다. 전국 구석구석에 인터넷이 다 깔려 있는 이곳에서 북한 간첩들이 국정원에 노출돼 있고, 받을 수 있는 정보량도 많지 않은 단파 라디오를 쓸 이유가 없다. 스테가노그래피(필요한 정보를 이미지, 노래 파일에 숨겨서 전달하는 방식) 등 보안이 뛰어난 여타 방식으로 지령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반면 남한의 북파 공작원들 활동무대인 북한에서는 인터넷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다. 단파 난수방송 외에는 보안성 있는 장거리통신을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민간 대북방송) 대표는 “북한에서 대북방송을 들으면 전파 탐지에 걸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북한에서 라디오를 듣다가 처벌되는 사례도 대부분 대북방송에서 들은 이야기를 남에게 섣불리 이야기하다가 걸리는 경우다”라고 말했다. 본인만 조용히 있으면 들킬 염려는 없다는 것이다.

단파수신기로 직접 대북방송을 청취하는 모습./라디오매니아 제공

단파수신기로 직접 대북방송을 청취하는 모습./라디오매니아 제공

‘자유의 소리’ ‘인민의 소리’도 단파 방송

남한의 단파 난수방송은 통칭 V24라 불린다. 유럽의 난수방송 전문 커뮤니티 이니그마2000이 붙여준 이름이다. 평양의 대남 난수방송은 V15, 북한 인민군의 훈련방송으로 보이는 난수방송은 V28이다. 국정원에 V24를 운영하는지 물었으나 “확인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라디오 동호인들의 도움을 받아 V24의 송출지를 확인해봤다. V24 방송은 서울시 북쪽의 한 연구시설에서 송출되고 있었다. 취재 결과 이 연구시설은 국정원과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V24는 라디오 동호인 사이에서 명성이 높은 방송이다. 매일같이 V24 방송을 청취하며 방송이 불러주는 번호를 기록으로 남기는 이들도 있다. 북한의 V15에 비해 방송 횟수도 많다. V15가 짧게는 5일, 길게는 20일 간격으로 방송을 내보낸 데 비해, V24는 거의 매일 방송한다. 동시에 여러 공작원을 대상으로 방송한 적도 있다.

V24 방송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커뮤니티 ‘라디오 매니아’의 운영자 키엘리니씨는 “V24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해외 커뮤니티에서 V24를 오랫동안 모니터링해온 한 미국인이 1978년부터 V24를 수신했다고 밝힌 적은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40년 가까이 방송은 이어왔지만 V24의 큰 틀은 바뀌지 않았다. 일단 방송 시작을 알리는 개시곡이 나온다. 방송의 대상인 공작원의 주제가다. 개시곡 다음에는 방송 대상 공작원을 호출한다. 11월 18일 기준으로 V24를 받는 공작원은 최소 7명으로 보인다. 이후 본격적인 암호(전문)인 5자리 숫자가 연달아 방송된다. 처음엔 3자리씩, 2자리씩 끊어 읽고, 다시 한 번 전체 전문을 5자리씩 읽어준다. 전문 낭독이 끝나면 “이상입니다”라는 멘트로 방송을 마친다.

문제는 V24가 실제 북파 공작원을 대상으로 한 방송이냐는 점이다. 난수방송에는 크게 세 가지 기능이 있다. 공작원을 대상으로 한 지령방송, 예비 공작원을 대상으로 한 훈련방송, 상대를 기만하기 위한 방송(심리전 방송)이다. 단파 난수방송을 오랫동안 청취해온 라디오 동호인들은 V24가 단순 심리전 방송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키엘리니씨는 “4111호 공작원의 경우 첫째 난수가 00577인 경우가 많다. V24가 단순 심리전 방송이라면 아무 숫자나 갖다 붙여도 될 텐데, 일부러 같은 숫자를 앞에 넣은 것을 보면 뭔가 의미가 있는 전문으로 보인다”면서도 “여러 차례 방송사고가 나는 걸 보면 진짜 지령방송인지 의심은 든다”고 말했다.

V24가 지난해 잠시 중단된 이후 바뀐 것이 ‘개시곡’이다. 이전 난수방송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나 ‘반갑습니다’ 등 북한 노래나 남한의 흘러간 가요를 개시곡으로 썼다. 그런데 올해 재개된 V24의 개시곡은 대부분이 최신 가요다. 남한의 최신 가요가 V24를 듣고 있을 북한 당국자들에게 문화충격을 줄 수 있을 거라는 해석도 있다. 예를 들면 2693호 공작원의 개시곡은 아이유의 ‘좋은 날’이다. 3단 고음이 터지고 난 뒤 “2693호, 전문 받으세요”라며 지령이 시작된다. 여자친구의 ‘오늘부터 우리는’, 홍진영의 ‘산다는 건’, 백아연의 ‘이럴거면 그러지 말자’ 등도 올해 V24에 단골로 등장한 개시곡이다.

북한도 16년 만에 대남 난수방송 부활

잦은 방송사고도 V24가 과연 공작원을 대상으로 한 방송이 맞는지 의심을 사게 한다. 11월 13일에는 전문을 부르던 도중 방송이 갑자기 꺼졌다. 7월 8일과 26일에는 전문 낭독이 끝난 뒤 윈도XP 종료음이 들렸다. 7월 16일과 10월 13일에는 이미 다른 공작원에게 방송한 내용과 같은 내용이 나갔다. 10월 19일에는 3명의 공작원에게 똑같은 전문이 방송됐다. 당시 방송을 들은 ‘라디오 매니아’ 회원 무민씨는 “최소한 3명의 공작원이 같은 난수표(암호해독문)를 들고 있다는 걸 알려준 셈 아닌가”라며 방송 내용에 의구심을 표했다.

북한의 대남 난수방송도 실제 공작원 방송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일부 언론에서 북한이 장기 고정간첩을 깨우기 위한 목적으로 난수방송을 재개했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본다. 이미 우리 정보당국은 난수방송을 해독할 수 있는 노하우를 많이 갖고 있다. 지금 나오는 대남 난수방송은 북한 내부의 훈련용이거나 우리 정보당국에 혼란을 주기 위한 기만방송으로 보는 게 더 정확하다”고 말했다.

난수방송 외에도 단파로 방송되는 정부의 대북방송도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방부의 ‘자유의 소리’다. 대북 확성기로 나가는 심리전 방송과 같은 내용을 단파로 송출하는 것이다. KBS 한민족방송도 단파 수신기로 북한에서 들을 수 있다.

국정원이 운영 주체로 추정되는 단파 대북방송으로는 ‘인민의 소리’와 ‘희망의 메아리(VOH)’가 있다. 해외 단파라디오 커뮤니티에서는 이들을 ‘위장방송’이라 부른다. ‘인민의 소리’는 문화어로 방송되며 조선로동자총동맹(위장단체 추정)이 제작하는 것으로 가장하고 있다. 북한 아나운서들과 비슷한 말투의 진행자들이 김정은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게 여타 대북방송과의 차이점이다. 표준어로 방송되는 ‘희망의 메아리’는 해외동포총연합(위장단체 추정)이라는 곳에서 만든다. 북한 고위급 탈북 소식 등 뉴스와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라디오 드라마 등이 방송된다. 이들이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라디오 동호인 커뮤니티에서는 1970~80년대부터 대북방송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경험담이 가끔 올라온다.

실제로 두 방송을 운영하는 주체는 어디일까. 라디오 동호인들의 도움을 받아 두 방송의 송신소 위치를 확인해봤다. ‘인민의 소리’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희망의 메아리’는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에서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2012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의 에너지사용 제한에 관한 공고문을 보면 이들 송신소의 상호명이 나온다. 화성송신소의 경우 ‘제7452부대’, 고양송신소의 경우 ‘사서함 200호’가 상호명이다. 이번에도 국정원 측은 대북방송에 대해 “확인해줄 수 없다”고 밝혔다.

단파방송을 단순 청취하는 행위는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단파 수신기만 구입하면 누구나 대북방송을 들을 수 있다. 다만 비행기 소리 등 북한의 방해전파 소리가 섞여서 들린다. globaltuners.com 등 인터넷으로 단파방송을 들을 수 있는 사이트를 이용할 수도 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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