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아르테미지아 젠틸레스키 <자화상>-여성 화가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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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지아는 그리기에 몰두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정숙한 숙녀로 자신을 묘사하지 않는다. 팔을 걷고 캔버스에 얼굴이 닿을 듯이 바짝 다가가 그리기에 몰두하는 화가로 자신을 소개할 뿐이다.

독일의 화가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는 <슈피겔>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자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진 못한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00년 전의 사람이 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인터뷰는 2013년에 있었던 이야기다. 바젤리츠의 요지는 간단하다. 여성 미술가들은 미술시장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존재들이다. 시장의 선택은 항상 옳았기 때문에 여성 미술가들이 미술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것은 화가로서 그들의 한계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마냥 한 개인의 돌발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시장의 선택, 미술대학의 절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작가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학생들, 좋은 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있지만 위대한 작가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 바젤리츠가 “여자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진 못한다”라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한 예시들은 미술가를 꿈꾸는 여성들,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는 여성들이 극복해야 할 벽처럼 느껴진다. 바젤리츠의 이야기는 서구에서 조롱거리로 회자되었지만,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떨어진다”는 말들이 교육현장 어딘가에서 여전히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남편의 적극적 후원 받아

이 그림의 주인공, 17세기 피렌체의 화가 아르테미지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는 더 큰 편견과 장벽 속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그는 피렌체 아카데미아의 첫 번째 여성 화가였고, 카라바조(Caravaggio)와 함께 우리가 ‘바로크 시대’라고 이름 붙인 한 시절을 살았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르테미지아가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미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교육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거의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그림을 그리는 여성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교회에 필요한 서적에 삽화를 그리는 수도자가 되거나, 태어나고 보니 아버지의 직업이 미술가인 경우들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직업이 결정되곤 했던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남자 미술가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여성에게는 딸의 교육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이 전제조건으로 하나 더 따라 붙는다. 미술가가 되기도 어려웠지만, 미술가가 되더라도 미술가로서의 삶은 그리 길지 못했다. 16세기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카타리나 판 헤메센(Catharina van Hemessen)의 경우처럼 결혼과 동시에 미술가로서의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쩌면 잠시만이라도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남편과 함께 작업장을 운영하던 여성이 남편이 사망하고 작업장과 함께 새로 개업을 준비하는 장인에게 팔려가듯 재혼을 해야 하는 상황도 적지 않았다.

아르테미지아 젠틸레스키, <자화상>(1638~1639), 96.5 cm × 73.7 cm, 영국 왕실컬렉션 / 권혁빈 제공

아르테미지아 젠틸레스키, <자화상>(1638~1639), 96.5 cm × 73.7 cm, 영국 왕실컬렉션 / 권혁빈 제공

여러 면에서 아르테미지아는 이례적인 존재였다. 그의 아버지는 딸의 교육에 적극적이었다. 아버지 스스로 그의 스승이 되었고, 더 나은 교육을 위한 스승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동료화가 피에란토니오 스티아테시(Pierantonio Stiattesi)와 결혼을 하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활동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피에란토니오는 아르테미지아에 비해 별 볼일 없는 화가였고, 경제적으로 무능했다. 자연스레 아르테미지아가 혼자 자식을 키우며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아르테미지아는 로마와 베네치아, 나폴리, 그리고 영국을 오가며 자녀들을 키웠고, 미술가로 활동했다. 그림을 계속 그려나갈 수 있는 자유로운 여건이 어느 정도 마련되었다. 능력을 인정받았고, 많은 주문을 받았지만 여유롭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주문을 받고 그림을 그려도 그가 기대한 만큼의 대가를 받지는 못했다. 아르테미지아는 “회화를 아는 유일한 여성”이라는 칭송을 받았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여자 치고는 곧잘 그린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이 자화상은 아르테미지아가 영국에서 활동했을 무렵에 그린 것이다. 화가의 자화상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자신의 눈에 비치는 본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화가 개인에 다가가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화가는 자화상에 자신이 욕망하는 모습, 내가 기억되고 싶은 나의 모습을 담는다. 어떤 화가는 자신을 성모와 아기예수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렸다고 전해지는 성 루카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신분상승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화가는 호화로운 옷을 걸친 상류층 남성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소개하곤 했다. 아르테미지아는 그리기에 몰두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정숙한 숙녀로 자신을 묘사하지 않는다. 팔을 걷고 캔버스에 얼굴이 닿을 듯이 바짝 다가가 그리기에 몰두하는 화가로 자신을 소개할 뿐이다.

지금의 여성 화가들의 삶은 나아졌나?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아르테미지아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17세기만큼의 제약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 교육의 기회와 독립적인 생활은 법과 제도로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여성 미술가가 생존할 수 있을까? 여성 미술가의 삶은 노동과 가사를 병행하도록 요구 받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 온종일 노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밀린 가사가 기다리고 있다. 직업적 성취를 추구하는 여성을 이기적이며 가정에 소홀한 여성으로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도 여전하다. 경제적 어려움도 뒤따른다. 단순히 금전상의 어려움을 넘어 주거와 복지의 문제가 장벽처럼 굳세게 서 있다. 미술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작업을 지속할 만한 충분한 공간이 필요하고, 육아의 부담을 덜 수 있는 보육시설과 남편의 육아분담도 필요하다. 물론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는 사회가 평등한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폭력의 문제도 계속되고 있다. 아르테미지아의 시절에서부터 지금까지 줄어들고는 있지만, 사라지지 않고 있는 문제다. 아르테미지아는 아버지의 소개로 만나게 된 스승에게 성폭행 피해를 당했는데, 그는 피해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고문까지 받아야 했다. 고문을 받고도 일관된 증언을 할 수 있다면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당시의 믿음 때문이었다. 최근 문화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폭로 릴레이는 그간 문화예술계가 성폭력 문제에 무관심했음을 보여주었지만, 한편으로 어렵게 용기를 내어 피해를 고백한 사람들을 관음하고 증언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공격하는 모습들이 여전하다는 사실도 새삼 재확인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폭력은 마땅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며, 약자에 대한 폭력이라면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대단한 여성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기본원칙일 것이다. 유독 그 대상이 여성이 되었을 때 연애감정이나 ‘남자라서 어쩔 수 없는’ 성욕이 핑계가 되고 용인되는지 알 수 없으며, 동등한 동료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많은 직업현장에서 그랬듯, 폭력은 피해자를 쉬이 지치게 만들고 조용히 그 현장을 떠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테미지아의 자화상에 눈이 갈 수밖에 없다. 이 자화상은 한 사람의 여성이 단순히 살아가는 것 이상의 노력을 통해서만 자아를 실현해나갈 수 있었던 시절의 초상이다. 남편이나 가족이 아닌 한 사람의 개인으로 사는 것, 그 자체만으로 시대에 저항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던 이의 초상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그 자체로 저항이다. 조금씩 다른 얼굴로 현실이 반복된다.

<권혁빈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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