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연령 18세 하향 방아쇠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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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청소년들 거리로 거리로… 정치적 의사 표현 줄이어

“투표권이 있어도 대통령을 잘못 뽑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뽑지 않는 사람도 있잖아요. 표가 없으니 촛불을 들고 나오지만, (청소년들에게도) 투표로 나라를 바꿀 기회가 있다면 얼마든지 자기 뜻을 표현하겠죠.”

한 손에는 촛불, 다른 한 손에는 손팻말을 들었다. 고등학생 이희정양(17)은 학원 대신 역앞 광장으로 향했다. 11월 9일 저녁 경기 고양시 화정역 광장에서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이양도 친구들과 함께 참석했다. “지난주 가족이랑 서울 광화문에서 있었던 집회에 갔었거든요. 거기서 청소년단체 사람들 나온 것도 보고, SNS에서 중·고등학생들이 나서서 활동하고 시국선언하는 것도 보니, 나도 기회 될 때마다 참석만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양과 친구들의 대화에는 세상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국민들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계속 버틸 순 없지 않을까?” “감옥에 전화해서 물어보겠지, ‘나 물러나, 말아?’ 하고. 하하.” 친구 박모양(17)은 학교나 주변에서 만나는 또래 청소년들의 분위기를 전했다. “대통령이나 고위층 사람들의 비리가 익숙한 어른들도 이런 막장은 처음이라고 그러잖아요. 근데 그걸 어려서부터 보게 된 우리는 얼마나 더 황당하겠어요. 이 나라가 정말 쪽팔린다고 분해 하는 애들이 많아요.”

청소년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다. 최순실씨의 비선실세 국정농단에 분노한 청소년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도심 집회의 무시할 수 없는 한 축으로 떠올랐다. 11월 5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2차 범국민행동’ 집회에 앞서 중·고생연대, 중·고생혁명 등 청소년단체는 시국선언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최준호 중·고생혁명 임시대표는 “최순실의 딸 정유라는 돈이 부족하면 부러운 척이라도 하라고 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것인가”라며 “3·15 부정선거 때문에 4·19혁명이 일어났다. 박근혜의 부정으로 인해 지금 우리들이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밝혔다.

11월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범국민대회에 참석한 청소년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서성일 기자

11월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범국민대회에 참석한 청소년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서성일 기자

4800여만원 모금해 청소년 버스 운영

시위의 일선에 나선 청소년들이 보다 원활히 집결할 수 있게 지원하는 움직임도 생겼다. 11월 12일의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석하려는 전국의 청소년들에게 서울로의 교통수단을 제공하는 모금활동에 4800여만원이 걷혔다. 청소년단체인 21세기청소년공동체희망은 5일 범국민행동 집회 현장에서 모금한 금액으로 12일 오후 3시로 예정된 청소년 시국대회 참가용 청소년 버스를 운영한다. 부산·대구·광주·대전·울산·청주·전주·창원 등 청소년 버스를 타고 오는 청소년을 비롯해 수도권에서 집결하는 청소년까지 더하면 청소년 시위대의 규모만 1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국의 각 지역마다 시국선언을 발표하거나 각 학교에서 대자보를 붙이는 등 청소년들의 정치적 의사 표현은 줄을 잇고 있다. 11월 5일 대구에서 열린 시국대회에서 “평범한 고등학생이지만 부당하고 처참한 현실을 보며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에 살아있는 역사책 속에 나오게 됐다”고 발언해 주목을 받은 고등학생 조성해양이 대표적이다. 조양은 따로 연설문도 보지 않은 채 자유발언대에 올라 “저희의 노력이 그리고 이 사건의 본질이 언제나 그랬듯이 다른 사건들처럼 점차 희미해지고 변질되어 잊힐까봐, 그래서 또다시 이런 제정일치 사회 속에 몸담아야 할까봐 두렵다”며 “청소년들이 꿈꾸는 내일을 위하여 부디 본질을 잊지 말아달라”고 한 발언을 담은 영상은 SNS에서 퍼지며 주목을 받았다. 조양의 발언이 퍼진 것처럼 청소년과 청소년단체, 각 학교 학생회 등도 자유롭게 SNS를 활용해 의견을 알리고 있다. 학교와 길거리에서 벌인 정치적 활동이 청소년세대 내에서는 물론 사회 전반으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분위기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청소년들의 정치참여 목소리가 높아지며 정치권에서도 선거연령을 현재의 19세에서 18세로 낮추는 방안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윤소하 정의당 의원과 김관영 국민의당 의원,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선거연령을 18세로 낮추는 한편 투표시간도 연장하는 내용이 담긴 ‘공직선거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앞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선거연령 하향 내용이 담긴 공직선거법 등 관련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OECD 국가 중 선거연령 19세 유일

국내의 선거연령은 2005년 당시 선거법에서의 선거연령을 20세에서 19세로 1살 하향한 이래 대선과 총선 등 주요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18세로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34개 회원국 중 선거연령이 19세 이상인 나라는 한국뿐이다. 오스트리아가 16세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32개 회원국은 선거연령을 18세로 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147개국이 18세부터 선거권을 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청소년들의 정치참여 제한이 더 심각한 셈이다. 김신기 중앙선관위위원회 선거정책실장은 “정치·사회의 민주화, 교육수준의 향상 및 인터넷 등 다양한 대중매체를 이용한 정보교류가 활발해진 사회환경 등으로 18세에 도달한 청소년은 이미 독자적인 신념과 정치적 판단에 기초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과 소양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게다가 공무원 임용, 운전면허 취득 등이 가능한 연령이 18세 이상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유독 선거권만 19세 이상에게 부여되는 것은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김희삼 연구위원은 “미래세대의 의견에 보다 가까운 목소리를 의정에 반영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선거의 유·불리를 떠나 초당적인 합의로 선거연령 하향을 추진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선거연령이 내려가면 대다수가 고등학생인 18세 유권자의 여론이 반영돼 교육 관련 정책공약 역시 보다 수요자 중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 김 연구위원의 설명이다.

선거연령 하향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야권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여당을 압박하려 준비하고 있다. 국민의당의 한 관계자는 “선거연령 18세 하향은 이미 당론으로 정해져 있고, 다른 야당들도 의견일치를 보고 있어 다음 선거 전까지 확실하게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반면 여당으로서는 이미 예측가능한 공세지만 그에 맞설 대안이 옹색한 실정이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여당 의원들은 일방적으로 불리해질 게 뻔하니까 반대 입장일 수밖에 없는데, 고등학생까지 정치에 휘말리게 하는 게 필요한 일이냐고 반대 근거를 대면 오히려 더 큰 반발이 생길 수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거리에서 나오는 청소년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교육분야 정책을 넘어 ‘헬조선’의 현실을 고발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 어느 세대보다 교육현장에서 영향을 받는 문제인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에도 비판이 쏟아진다. 여기에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가 “부모의 돈도 능력”이라고 올린 글로 대표되는, ‘금수저’와 ‘흙수저’ 계층 사이의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현실도 청소년 세대가 우려하고 반발하는 지점이었다. 한 청소년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등학생 김영휘군(16)은 “정당하게 돈을 번 것도 아니고, 그저 권력을 이용해 부정하게 돈을 번 부모 덕을 봐서 혼자서 잘난 듯이 ‘실력’을 얘기하는 금수저를 보면 미래는 어떻게 될까 더 불안해진다”며 “이런 어두운 현실이 가득한 나라를 제대로 바꾸지는 않고 과거를 미화시켜 ‘국뽕’(국수주의적 자부심)만 늘리면 된다는 식의 국정교과서도 거부하려 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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