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국을 일깨운 말 한마디 “아빠 골 넣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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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그의 아들이었다. “더 많은 경기에 출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아들의 말 한마디에 정조국은 광주 이적을 결심했다. 정조국은 “당당한 아빠가 되고 싶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자고 마음먹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아빠는 왜 경기에 안 뛰어?”

2015년 어느 날. 아들 정태하(6)의 한마디가 아버지 정조국(32)의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그해 프로축구 FC서울 소속이었던 공격수 정조국은 주전 경쟁에서 밀렸다. 고작 11경기에 출전해 단 1골에 그쳤다. 경기장을 찾은 아들에게 벤치에 앉아 있는 아빠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정조국은 아들 태하에게 당당한 아빠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올 시즌을 앞두고 시민구단 광주FC로 이적하는 모험을 택했다.

정조국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K리그 클래식에서 20골을 터트리며 프로데뷔 14년 만에 생애 첫 득점왕에 올랐다. 또 시민구단 광주의 1부리그 잔류를 이끌었다. 정조국은 지난 8일 2016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했다. 기자단 투표 109표 중 46표를 받아 오스마르(서울)를 7표 차로 제쳤다. 정조국은 득점왕과 베스트11 공격수상까지 받으면서 3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우승과 준우승이 아닌 팀에서 MVP가 나온 건 K리그 사상 처음이다. 정조국의 드라마틱한 축구인생에 기자단 표심이 움직였다.

11월 8일 서울 서대문구 그랜드힐튼호텔에선 열린 '2016 현대오일뱅크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MVP 광주FC 정조국이 수상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11월 8일 서울 서대문구 그랜드힐튼호텔에선 열린 '2016 현대오일뱅크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MVP 광주FC 정조국이 수상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잊혀진 왕년의 스타 화려한 부활

정조국은 감정이 북받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정말 많이 힘들었는데, 이 상을 받으려고 그랬나 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에게 더욱 떳떳한 아빠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일찌감치 꽃봉오리가 맺혔었는데, 14년이 걸려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2003년 프로 데뷔 때부터 정조국의 에이전트를 맡고 있는 류택형 지쎈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정조국에게는 늘 ‘차세대 스트라이커’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는 17세, 20세, 23세 연령별 대표팀을 두루 거쳤다. 2002년에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에 훈련생으로 합류했다. 2003년 서울 전신인 안양에 입단해 12골을 터트리며 신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경쟁자였던 박주영(31), 데얀(35·몬테네그로)의 그늘에 가렸다. 8골→3골→6골→5골→9골→7골. 정조국은 6시즌 동안 한 자릿수 득점에 그쳤다.

2009년 소개팅으로 만난 탤런트 김성은씨(33)와 결혼한 정조국은 이듬해 아들 태하를 얻었다. 책임감이 커진 정조국은 2010년 K리그에서 13골을 터트리며 서울의 우승을 이끌었다. 서울팬들은 정조국을 ‘분유캄프’라 불렀다. 아이의 분윳값을 벌기 위해 네덜란드 전설적인 공격수 베르캄프로 변신했다는 의미다. 정조국은 2010년 프랑스 프로축구에 진출해 2시즌간 프랑스 오세르와 낭시에서 활약했다.

정조국은 병역을 해결하기 위해 국내로 유턴했고, 경찰청에서 2년간 군복무를 했다. 그러나 2014년 서울에 복귀한 정조국은 2015년 축구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을 맞았다. 주전경쟁에서 밀리며 ‘한물간 공격수’라는 혹평을 들었다.

정조국을 일깨운 말 한마디 “아빠 골 넣어야지”

무너진 정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그의 아들이었다. “더 많은 경기에 출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태하의 말 한마디에 정조국은 광주 이적을 결심했다. 정조국은 “2015년은 축구인생에서 가장 힘든 한 해였다. 아들의 말을 듣고 가슴이 찢어졌다”며 “당당한 아빠가 되고 싶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자고 마음먹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남기일 광주 감독은 “정조국이 꼭 필요하다”고 러브콜을 보냈다. 정조국은 11시즌이나 뛴 친정팀 서울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라운드에 나서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정조국은 연봉 삭감도 불사하고 광주로 향했다.

지난 3월 K리그 개막 미디어데이에서 정조국은 어색한 광주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다. 정조국은 행사 중 거짓말탐지기 실험에 응했다. “올해 득점왕은 정조국입니까?”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정조국은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거짓’ 신호가 울렸다. 정조국은 당황해 하며 “20골 정도 넣고 싶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정조국의 ‘20골 발언’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조국은 포항과의 개막전부터 2골을 몰아쳤다. 정조국은 “개막전 골을 터트린 뒤 ‘그래. 난 다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내겐 20골 이상의 가치가 있는 골이었다”고 회상했다.

시즌 중 주춤할 때마다 승부욕을 일깨워준 것도 아들 태하였다. 득점왕 경쟁을 펼치던 아드리아노(서울·17골)가 턱밑까지 추격하자 태하는 “아빠 뭐해? 골 넣어야지”라고 말했다. 정조국은 “그래. 아빠가 분발할게”라고 약속했다. 그리곤 정말로 20골을 터트렸다. 광주는 8위에 오르며 1부리그 잔류에 성공했다.

해결사 필요한 슈틸리케호 승선할까

정조국은 태극마크에 한이 맺혀 있다. 2008년 10월 4일. 서울 소속이었던 정조국은 인천과 K리그 경기에서 공중볼을 다투다가 상대선수 팔꿈치에 얼굴을 맞았다. 오른쪽 광대뼈가 함몰되는 큰 부상을 당했다. 당시 정조국은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2차전에 나설 30명 대표팀 예비명단에 포함된 상황이었다. 부상 전까지 정조국은 4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올리며 컨디션이 절정이었다. 하지만 불의의 부상에 발목을 잡혔다. 정조국은 “축구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이었다. 당시 몸상태가 정말 좋았는데…”라고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2006년 A대표팀에 뽑힌 정조국은 A매치 13경기에 출전해 4골을 넣은 것이 전부다. 2011년 6월 세르비아와의 경기 이후 태극마크와의 인연은 아예 끊겼다. 가슴 한편에는 태극마크에 대한 꿈이 계속 남아 있었다. 정조국은 포항과의 K리그 클래식 37라운드에서 헤딩골을 터트렸다. 광대뼈 수술로 트라우마가 남아있던 정조국이 헤딩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정조국 지인들은 “정조국이 정말 간절해졌구나”라고 말했다.

정조국이 대표팀에 재승선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쏟아졌다. 11월 우즈베키스탄과의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5차전을 앞두고 골가뭄을 해결해 줄 공격수가 필요했다. 하지만 울리 슈틸리케 대표팀 감독은 25명 엔트리에 정조국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축구팬들은 “K리그 득점왕을 왜 안 뽑느냐”고 슈틸리케 감독을 비난했다. 정조국은 “내가 태극마크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게 먼저다. 더 노력해야 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정조국은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국가대표가 목표다. 축구화를 벗는 순간까지 대표팀 꿈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정조국의 별명은 ‘패트리어트’다. 미사일처럼 빠른 슈팅을 지녔기 때문이다. K리그 골키퍼들은 “정조국의 슛은 뱀처럼 살아 움직인다. 야구로 치면 무브먼트가 좋다”고 말한다. 프랑스 오세르 시절 구단 관계자들도 정조국의 빨랫줄 같은 슛에 찬사를 보냈다.

이동국(37)의 발리슛처럼 정조국의 전매특허는 터닝슛이다. 정조국의 카카오톡 대화명은 ‘환상의 터닝슛’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앞에서 ‘환상의 터닝슛’을 선보일 때 정조국은 가장 행복하다. 정조국은 이렇게 말했다. “오래 걸렸고, 오래 돌아서 왔다. 포기하고 싶을 때면 아내와 아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내게 무슨 일이 닥쳐도 지지해줬다. 가족들은 내가 계속 달려야만 하는 이유다. 대한민국 모든 아빠들의 마음이 그럴 것이다.”

<박린 일간스포츠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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