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구국의 영웅’ 그 이면에는 현대사의 질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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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동상은 오랜 시간 동안 자유의 상징이었고, 반공·안보교육의 장소였다. 그러나 동상을 둘러싼 논쟁은 2004년에 재점화되었고, 2015년 9월에는 철거와 수호를 주장하는 이들의 물리적 충돌까지 발생했다.

1957년 9월 15일, 일제히 울려대는 기적소리 속에서 동상 하나가 세워진다.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자리한 더글러스 맥아더의 동상이다. 어딘가 찌그러진 듯한 정모, 옥수숫대 파이프, 잘 다려진 근무복 위에 느슨하게 풀어헤쳐진 점퍼를 걸친 맥아더의 모습이 동상이 되어 한국인들의 기억에 깊게 박히는 순간이었다. 1957년 한국인들에게 이 동상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1957년 당시 한국인들에게 맥아더와 그의 동상은 하나의 우상이었다. 생존 인물의 동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뜻밖의 일이다. 요즘이야 그런 불문율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기념물을 세우는 것은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맥아더 동상보다 1년 앞서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 김영삼이 “독재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 일이 있었다.

인천 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 동상/경향신문 자료사진

인천 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 동상/경향신문 자료사진

신화적 존재에서 신앙으로 변해

동상 건립은 그해 4월 국무회의에서 급하게 결정된 것이었고, 그 재원은 정부 예산이 아닌 공무원 급여에서 1인당 100환씩을 공제해서 마련했다. 반대여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성사되지 못했지만 정부는 미국에 거주 중인 맥아더 본인과 가족들을 제막식에 초청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웠다. 전후(戰後) 한국 사회에서 더글러스 맥아더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맥아더, 그리고 그의 동상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힌트는 제막식에서 최규남 문교부 장관이 한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두 분의 맥아더 장군을 가지고 있으니, 즉 한 분은 미주(美州)에 살아계신 그분이요. 다른 한 분은 움직이지 않는 이 동상인데, 우리는 영원히 이 땅에 머무르는 이 맥아더 장군을 존경하고 싶다. 외면으로는 움직이지 않지만 실상 영원히 우리들의 가슴속에 움직이고 있는 이 분의 정의와 자유의 정신을 우리는 길이 추앙하는 것이다.’(<경향신문> 1957년 9월 16일 기사)

1950년대 한국에서 더글러스 맥아더는 그 자체로 정의와 자유의 상징이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한국전쟁에서는 부산까지 밀려났던 절망적인 전황을 뒤집었다. 그 당시를 살던 한국인에게 맥아더는 살아있는 신화였다. 그와 그의 동상은 ‘자유를 위한 영구적 투쟁의 표상’(<경향신문> 1957년 9월 15일 사설)이 되어 한국인들의 우상이 되었다. 맥아더 신화는 이승만 정부와 사회지도층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깊숙하게 침투했다. 4·19혁명과 함께 독재자 이승만의 동상은 시위대의 손에 무너졌지만, 인천 시민들은 맥아더 동상에 꽃다발을 걸어주며 혁명의 성공을 축하했다. 맥아더 동상에 걸린 꽃다발은 ‘빨갱이의 선동’을 운운하며 시민혁명을 폄하하려는 시도들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었고, 동상은 ‘반공·반독재의 4월혁명 정신의 선양’ ‘자유혁명의 꽃다발’(<경향신문>, 1960년 4월 30일)이 되는 장소가 되었다. 1964년에 맥아더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맥아더 장군을 모시는 무당들이 등장했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신화적 존재가 신으로 변한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고스란히 복사한 듯한 인물 묘사, 동상의 시선이 상륙작전이 이루어진 인천 앞바다를 향하게끔 계획되면서 기념물로서의 의미를 극대화한 점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동상이 기념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기념물을 통해 기억하고자 했던 역사가 모두에게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기념물이 자리할 장소와 그 역사가 함께 맞물리는지를 따져보았을 때 맥아더 동상은 현대를 대표할 만한 기념물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가 없다. 물론 이는 맥아더 동상의 ‘작품성’이 압도적으로 훌륭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넘어설 만한 기념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싶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은 굳이 기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기념하는 기념물들을 쏟아내 왔다.(가장 안 좋은 사례로 ‘강남 스타일’ 조각을 들 수 있겠다.)

맥아더 동상은 오랜 시간 동안 자유의 상징이었고, 반공·안보교육의 장소였다. 수학여행으로 인천을 다녀온 어린 학생이 맥아더 동상을 ‘우리나라에 공을 많이 바치신 거룩한 분의 동상’(<동아일보>, 1958년 5월 26일 박재용의 ‘수학여행’)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적잖은 사람들이 맥아더 동상에 큰 의미를 부여해 왔다. 30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서야 변화가 감지되었다. 당시 민중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의 기획전 <한반도는 미국을 본다>의 부대행사로 열린 토론회에서 소개된 맥아더 동상은 ‘자유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아닌, ‘위압적이고 영웅주의적인 미술’ ‘한반도는 미국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한겨레신문> 1988년 12월 7일)의 한 사례로 소개된 것이다.

맥아더에 대한 재해석, 동상 논란 재점화

이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면서 생긴 일이다. 전쟁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등장했고, 지식인층에 광범위하게 소개되면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던 고정관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구국의 영웅’ 맥아더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들이 소개되며 맥아더에 대한 단선적 평가가 복잡다단하게 변화한다. 특출난 군인, 전쟁영웅이라는 단선적 평가에 끊임없이 정치적 입지를 위해 만주에 원자탄을 던져 전쟁을 더 크게 키우려 했던 사욕 넘치는 인물이었다는 점이 점차 더해진 것이다. 지금은 음모론으로 격하되었지만 ‘정치적 야심이 컸던 맥아더, 본토 회복을 꿈꾼 장제스, 그리고 국내 정치세력의 만회를 꿈꾼 이승만이 내심으로 전쟁을 원하지 않았겠는가’ ‘6·25전쟁 재해석 열기’(<한겨레신문> 1988년 6월 24일)라는 ‘3자 공모설’이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진지하게 제기되기도 했던 시절의 일이다. 분단이라는 현실과 우리 사회에 깊숙하게 개입하는 미국에 대한 의문들이 강하게 쏟아졌던 시절 말이다.

그렇게 맥아더라는 인물에 대한 시각과 함께 동상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균열이 일어났다. 누군가 위풍당당하게 느꼈을 맥아더 동상의 모습에서 다른 누군가는 권위주의를 느꼈다. 그리고 그 이면에 자리한 전쟁의 역사, 현대사의 질곡을 떠올렸다. 마치 점령군인 양 우월적 지위를 누리며 횡포를 부렸던 주한미군을 떠올렸다. 그리고 패권국가 미국을 생각했다. 1992년 인하대 총학생회는 맥아더 동상의 이전을 주장했다. 1993년에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동상에 빨간 페인트를 뿌렸다. 동상을 둘러싼 논쟁은 2004년에 재점화되었고, 2015년 9월에는 철거와 수호를 주장하는 이들의 물리적 충돌까지 발생했다. 맥아더 동상은 여전히 자유공원에 서 있고,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맥아더 신앙은 어느덧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희미하게 사라져가지만, 빈 자리를 또 다른 신앙이 채우기 시작했다. 바로 박정희 신앙이다. 온 나라가 최순실의 이름으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는 신앙이다. 그 신앙은 광화문 광장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겠다는 당찬 포부를 내놓았다. 하지만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을 그 자리에 올려놓은 그 신앙을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박정희 동상이라는 상징을 통해 보여줄 그 신앙의 가치는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와 민주공화국에 걸맞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짚어볼 때다.

<권혁빈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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