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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교훈 되도록 제대로 반성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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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학자 안병욱 교수 “박정희 집권 18년 냉철한 성찰 한 번도 못해”

선거로 대표를 뽑는 체제에서 대표가 얻은 표의 숫자는 권력의 정당성과 비례한다. 2012년 열린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체 유권자 수는 4050만7842명. 투표율 75.84%에 득표율 51.6%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가장 권위 있는 대통령이었다. 4년이 지난 현재 박 대통령은 헌정체제를 위협하는 대통령으로 거론되며 퇴진 요구를 받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총체적 역설을 초래한 비극은 언제부터 발생했을까. 박 대통령이 1970년대 최태민 일가를 만났을 때부터일까. 2000년대 중반 박 대통령이 대구지역 정치인에서 당내 권력을 장악한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했을 때부터였을까. 한국 현대사 연구자이자 유신시대를 직접 겪은 원로 역사학자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68)는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집권기간 18년에 대해 한국 사회가 냉철한 성찰을 한 번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2007~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가 11월 2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갖고 박정희 신드롬이 형성된 역사적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가 11월 2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갖고 박정희 신드롬이 형성된 역사적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우선 창피스럽다. 해방 이후 늘 지향해왔던 정상적인 정치가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훗날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을 수 있도록 반성과 성찰을 해야 한다.”

박 대통령은 선거과정에서 가장 뜨거운 지지로 당선됐다. 이 점에서 역설적이다.

“박 대통령은 노인세대의 열광적 지지로 당선됐다. 전 국민적인 인기를 끄는 아이돌 연예인도 초기에는 10대 팬덤이 인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박 대통령의 경우 박정희 향수에 젖었던 세대가 그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은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를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대부분의 생애를 서울에서 보낸 박 대통령에게 사실상 연고가 없는 지역이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아버지에 대한 사람들의 연모에 기대 정치에 출마했다는 것은 본인 역시 정치에 대한 자신감이나 확신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치권에 발을 들이고 나서 ‘박정희 신드롬’이 박 대통령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하지만 1990년대 박정희 신드롬 자체가 우발적이고 비합리적인 방향을 거쳐 만들어졌다.”

박정희 신드롬은 어떻게 탄생했나.

“1980년대에는 누구도 박정희 이야기를 당당하게 꺼내지 못했다. 오히려 박정희를 찬양하면 허무맹랑하다는 평을 들었다. 1996년 영국에서 복제양 돌리가 탄생하고 생명복제, 인간복제 논란이 일면서 <고대신문>에서 ‘인간도 복제할 수 있다면 누가 좋겠느냐’는 설문조사를 했다. 김구 선생, 테레사 수녀에 이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3위에 올랐다. 역사를 잘 모르는 대학생들이 반장난 삼아 한 설문조사가 반향을 일으켰다. 숨어 있으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다 튀어나왔다. 박정희 사망 10년이 넘었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이 상당히 아름답게 미화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람들에게 ‘비련의 퍼스트레이디’로 기억돼 있었다. 부모가 시차를 두고 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비극이다. 박 대통령은 10살 무렵부터 절대왕조보다도 권위적이었던 청와대에서 공주처럼 자랐기 때문에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면모도 있었다. 이런 호기심과 우연적 분위기를 유신시대 기득권들이 적극 활용해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근본적으로 박정희 18년에 대해 우리 사회가 냉철한 평가와 성찰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성장의 공이 있되, 독재의 과가 있는 인물로 기억된다. 독재를 했지만 딴주머니는 차지 않은 청렴한 인물로도 기억된다.

“역사적 팩트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다.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이 이뤄졌지만 전적으로 공로를 박정희 1인에게 돌리면 성립이 안 된다. 당시가 전 세계적 고도성장기였으며, 4·19를 통해 드러난 민족의 잠재적 역량이 있었고, 그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동원한 것이 경제성장의 비결이었다. 성장의 내용도 들여다봐야 한다. 10·26이 일어난 1979년에는 물가가 20%씩이나 폭등했다. 1970년대 봉급쟁이들은 인플레이션 때문에 살 수가 없었다. 경제개발 시기 당시 일본에서 대일청구권 자금, 월남파병 전투수당, 그리고 세계의 넘치는 대외 차관이 들어왔다. 경제규모 대비 엄청난 외자가 들어와 경제적인 지표가 확대된 것은 사실인데, 외자 들어온 것이 정상적·합리적으로 산업화나 경제개발에 투여된 것보다 옆으로 샌 돈이 더 많다. 정권의 정치자금과 재벌들의 비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 기업이 이익을 내 외자의 원금을 갚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 투기와 사채시장 등으로 흘러들어가고, 부실기업이 양산되고 다시 외자를 빌려야 하는 일이 반복됐다. 정경유착의 뿌리도 당대에 형성됐다.

박 전 대통령이 마지막까지 나라를 걱정했다면 분명 200억 달러나 되는 외자와 물가 문제였어야 한다. 전두환 정권 때 들어서야 인플레이션과 외자 문제 해결에 성공한다. 1980년대 신문에 ‘물가, 꿈의 한 자릿수 진입’이라고 보도될 정도였다. 이 역시 1983년부터 세계 경제의 ‘3저호황’(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의 영향으로 (2배로 늘어) 400억 달러나 되는 외자를 갚아나갈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이 1980년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인식으로서 오히려 정상적인 것이었다.”

2000년대 중반 뉴라이트 진영을 중심으로 박정희 미화작업이 재개됐다.

“신드롬 자체는 <고대신문>의 앙케트와 박근혜의 정치입문 등으로 우발적으로 생겨났다. 반공주의를 이용해 사회의 기득권을 유지하던 보수세력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공산주의 세력을 위협적 존재로 보는) 반공이념이란 전 세계적 냉전체제가 배경이 돼야 유지될 수 있다. 1990년대 세계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한반도에서의 반공 이념도 지탱하기 어렵게 됐다.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 반공이라기보다 반북주의의 논리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없었으면 북한의 침략으로 인해 현재 대한민국은 북한과 같은 사회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주입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남북을 분단시켰고 북한을 퇴치했고, 그 과정에 다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이 필요했고, 결과적으로 경제적으로 먹고 살게 된 것은 박 전 대통령이 18년 동안 경제를 성장시켰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1990년대의 박정희 돌풍이 먼저 일어나고 학자들이 이론화 작업을 나중에 한 것이다. 그것이 현재 보수세력이 유지하고자 하는 자기 조상에 대한 미화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를 고정된 사실로 확정하려는 시도가 국정교과서 서술이라고 본다.”

신드롬에 기반한 정치인이 이렇게 결국은 집권까지 하게 됐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탈락한 것을 보고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언론의 책임도 크다. 정윤회 게이트 등도 끊임없이 밀착해 보도했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는 등 두려움에 기반한 통치술을 펼쳐 왔다. 권력이 고갈되는 시점이 짧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방선거가 있는 2014년이면 레임덕이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늦었다. 새누리당 내부의 합리적 견제를 예상했지만, 스스로 권력을 박 대통령에게 반납하고 맹목적인 권력을 몰아준 여당의 자멸이다.”

박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국민들의 상실감과 허탈감이 크다. 이보다 더 비극적으로 쫓겨나기 전에 선택할 수 있을 때 선택하라는 게 충고다. 시간을 2012년으로 돌릴 수는 없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지금의 상처와 허탈감을 극복하고 후손을 위해 의미있게 쓸 수 있다. 이번 기회에 한국 민주주의가 어떠해야 하는지, 정치인들은 왜 필요한지, 어떤 사람을 정치인으로 선택해야 하는지 국민들이 좀 더 투철하게 유념할 필요가 있다. 국정공백이니 권력공백이니 하는 혼란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4·19 직후가 혼란기라고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 규범들은 대부분 당시 마련됐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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