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는 바닥인데 세수만 호황?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8월까지 지난해보다 20조8000억원 더 거둬… 제도적 요인 덕분 내년도 증가세 전망

‘세수 풍년’이다. 올해 들어 8월까지 정부가 거둬들인 국세수입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조원가량 늘었다. 지난해에도 세수가 예산안보다 많이 걷히며 4년 만에 세수 결손에서 벗어났다. 만성적인 ‘세수 펑크’에 시달려온 정부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다. 경기는 바닥인데 세수만 대박이다.

보통 경제가 좋아지면 기업 실적이 개선되고 가계소비도 증가하면서 세수가 늘어난다. 하지만 최근의 세수 증가는 이보다는 다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담배소비세 인상, 국세청의 징세행정 강화, 자산시장 부양에 따른 거래세 증가 등 제도적 요인에 의한 효과가 큰 것으로 분석된다. 정부는 내년에도 세수 확충에 자신감을 보인다. 그러나 세수 대박 행진이 지속가능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저출산·고령화와 일자리 감소 등 구조적 변화를 앞두고 재정지출 수요가 점점 많아지는 상황에서 이 정도의 세수 증대로는 충분치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이 6월 1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유일호 경제부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2016 공공기관장 워크숍’을 주재하며 이마에 손을 대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6월 1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유일호 경제부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2016 공공기관장 워크숍’을 주재하며 이마에 손을 대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담배소비세 인상, 징세 강화 등 힘입어

기획재정부의 ‘월간 재정동향’ 10월호를 보면 올 1~8월 국세수입은 172조400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조8000억원이 더 걷혔다. 국세수입이 증가하면서 정부가 올해 걷기로 한 목표 세금(232조7000억원) 대비 실제 걷힌 세금의 비율을 뜻하는 세수 진도율은 74.1%로 1년 전보다 3.8%포인트 상승했다.

관세를 제외한 모든 세목에서 지난해보다 세금이 많이 걷혔다. 법인세의 경우 기업 실적이 개선되고 비과세·감면 조항 정비 효과가 나타나면서 1년 전보다 7조1000억원 많은 39조7000억원이 걷혔다. 부가가치세도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어진 정부의 내수진작책에 힘입어 1년 전보다 6조9000억원 증거한 44조9000억원이 걷혔다. 소득세(46조7000억원)의 경우 부동산 거래 활성화, 자영업자 종합소득세 신고실적 개선 및 명목임금 상승 등으로 지난해보다 5조1000억원이 더 걷혔다고 기재부는 밝혔다. 지난해에도 총 국세수입 실적(217조9000억원)은 추가경정예산안(215조7000억원)을 뛰어넘으며 4년 만에 세수 결손에서 벗어났다. 세금 들어오는 것만 놓고 보면 경기가 좋아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바닥 경기는 딴판이다. 경기가 좋아지기는커녕 소득은 제자리이고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가계 빚만 늘고 있다. 실제 지표도 나아진 게 없다. 9월 수출은 한 달 만에 다시 감소세(-5.9%)로 돌아섰고, 제조업 평균 가동률(70.4%)은 7년 5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기업 구조조정의 여파로 취업자 증가폭은 갈수록 둔화되고 있다. 지난달 실업률(3.6%)은 9월 기준으로 11년 만에 가장 높았다. 이런 가운데 가계부채는 연말이면 13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의 세수 증가가 경기와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제도적 요인이 세수를 끌어올렸다고 평가한다. 우선 저금리로 시중에 풀린 돈이 주식과 부동산시장으로 흘러가면서 자산시장의 거래량이 증가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양도소득세는 2014년에 비해 47.3%, 증권거래세도 같은 기간 49.6% 급증했다. 담뱃값 인상 효과도 크다. 지난해 담배소비세 인상으로 인한 세수 증가액은 3조6000억원으로 정부 전망치(2조8000억원)를 웃돌았다. 담배 판매량이 담뱃세 인상 전의 87% 수준까지 회복되면서 올해 담배 세수도 담뱃세 인상 전보다 6조1820억원이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국세청의 적극적인 징세행정도 한몫 했다. 현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를 국정과제로 표방하면서 전산망을 통한 국세청의 세원 관리가 한층 치밀해졌다. 굳이 세무조사에 나서지 않더라도 납세자들이 의식적으로 자진신고하는 경향이 높아졌다. 하지만 무리한 징세활동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2015회계연도 총수입 결산 분석’ 보고서에서 “경기적 요인으로 세입 여건이 악화됐음에도 불구하고 과대편성된 세입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한 무리한 징세행정이 경기위축을 심화시켰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며 “징세 노력은 세입여건과 무관하게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함에도 정치적 고려 등으로 징세행정의 강도를 조절하는 것은 오히려 조세형평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의 ‘증세 불가’ 지침에 따라 정부가 증세 카드는 꺼낼 수 없고 돈 쓸 곳은 많은 상황에서, 국세청의 징세행정 강화에 기댄 세수 확충이 오히려 경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다.

경기는 바닥인데 세수만 호황?

근본적 재정확충 대책 마련해야

정부는 세수 증가세가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내년도 예산안에서 총수입은 414조5000억원으로 올해보다 6.0%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이 가운데 국세가 241조8000억원 걷힐 것으로 추정했다. 올해 추경예산안(232조7000억원)보다도 9조원(3.9%) 많은 규모다. 이 같은 세수 전망은 정부가 내년 경상성장률 전망치를 4.1%(실질성장률 3.0%+물가상승률 1.1%)로 잡고 짠 것이다. 내년도 한국의 실질성장률을 2%대 초반으로 보는 해외 투자은행이나 민간 연구기관에 비해 낙관적인 전망치다. 정부는 2016~2020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도 2016~2020년 연평균 재정수입 증가율을 5.0%로, 2015~2019년 계획(4.0%)보다 높게 잡았다.

김유찬 홍익대 교수는 “당장 세수 펑크는 안 나고 있지만 매년 추경 예산을 편성하고 있고, 이조차도 기업 구조조정 등에 쏟아붓느라 저출산·고령화와 일자리 감소 등 경제 변화의 큰 흐름에는 전혀 대응을 못하고 있다”며 “앞으로 정부 돈을 써야 할 곳이 굉장히 많은데 지금 들어오는 세수 수준으로는 감당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복지지출은 늘어나고 있지만 정부가 증세를 통한 재정 확충은 외면하다 보니 나랏빚은 계속 불어나고 있다. 올 8월 말 기준으로 중앙정부 채무는 607조1000억원으로 지난해보다 50조5000억원 늘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내년 40.4%로, 사상 처음 40%를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116.0%)에 비하면 아직은 여유가 있는 듯하지만 내년부터 생산가능인구가 감소세로 꺾이고 잠재성장률은 떨어지는 상황에서 복지지출의 증가는 재정건전성을 급격히 악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정부가 발표한 올해 세법 개정안은 여전히 미시조정 수준에 그친다. 소득세 면세자 비율 축소, 법인세율 인상 등 굵직한 개편 없이 대부분 기존 제도의 적용범위를 조정하거나 일몰기간을 연장하는 등 소극적 개정에 머물렀다. 세법 개정을 통한 연간 세수효과도 3171억원(정부 추계치)으로, 2011~2015년 평균치(1조6600억원)에 크게 미달한다. 이명박 정부의 감세정책으로 17.9%까지 떨어졌던 조세부담률은 지난해 18.5%까지 올랐지만 OECD 평균치(26.1%)와 비교하면 여전히 낮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2016년 세법 개정안 분석’ 보고서에서 “세계 경제의 중장기적 저성장과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인구 구조의 변화로 성장잠재력이 약화되고 경제성장률은 갈수록 하락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며 “매년 반복적이고 연례적인 세법 개정이 아닌 중장기적 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세제개편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주영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young78@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