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에스텔 레온티예프 부부-경제학도 시도 지향하는 것은 바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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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타운 정을 나누는 피아니스트와 수학자 부부가 있다. 각자의 분야만을 오래 전공한 사람들인지라, 둘 사이의 대화가 자못 궁금했다. 일상적인 일화 외에도 일(?) 이야기도 나눌 텐데…. 각자의 일에 관련된 이야기에서는, 서로의 용어는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 속뜻이 무엇인지는 다 공감할 수 있다고 답해 주었다. 그러니까 ‘각론’은 전혀 같지 않더라도 그 ‘본질’은 직관적으로 다 통한다고 설명하는데, 일이관지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이 글이 읽히고 있을 때에는 노벨 문학상과 경제학상의 수상자가 알려질 터라 은근히 가슴이 설렌다. 그런데 시인과 경제학자인 부부가 있기도 했을까? 이념적으로 편향됐다는 (신고전파와 수리-통계적 기술에만 초점을 있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래도 부부 중 한 사람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라면?

그 내외 중 한 사람은 미국의 경제학계를 풍미했던 바실리 레온티예프다. 그는 1973년도에 경제학상을 받았다. 시인 에스텔 막스(결혼 후에는 성을 레온티예프로)는 평생을 그와 부부로 같이 살며 함께 늙었다.

(왼쪽)바실리 레온티예프, 에스텔 레온티예프

(왼쪽)바실리 레온티예프, 에스텔 레온티예프

바실리 레온티예프는 경제학 교수의 아들로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유태계 러시아인인 그는 아버지를 따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열아홉의 나이로 러시아를 떠나 (사실 러시아혁명을 피해) 베를린으로 갔다. 지도교수였던 베르너 좀바르트는 역사주의 경제학자로 초기에는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바실리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의 그늘 아래 있던 때 ‘잇따라 도는 흐름의 경제’라는 연구로 박사학위를 얻었다. 독일, 중국을 거쳐 1932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 자리를 잡았고, 그해에 시인 에스텔 막스와 결혼했다.

태생부터 미국인인 에스텔은 4권의 책을 냈다. 남편을 통해서 러시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1939년 소련으로부터 망명 온 시댁 식구들 덕에 라는 책을 썼는데, 기질적으로 다른 러시아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의 삶 속 갈등을 담고 있다. 오랜 간호 일과 여러 다툼이 녹진하게 옮겨져 있다. 한 대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피곤함 속에 담긴 ‘삶’을 말하고 있다.

에스텔은 24권 이상 시집을 펴내고 기독신앙을 바탕으로 에머슨·소로 등 초월주의에도 영향을 받은 시인 데니스 레버토프와도 가깝게 지냈다. 에스텔의 시에서도 그러한 영향이 읽힌다. ‘버몬트 들판’의 마지막 연을 “파리와 비가 지나간 8월에/ 많은 친구들이 다녀가고 나서/ 나는 들판에서 수영풀 패드를 찾고/ 탁 트인 곳에 나를 숨기”면서 마무리한다.

그런 틈바구니 속 바실리는 선형계획법을 발전시켰다. 경제 운용을 선형문제로 단순화시켜 수리적으로 (비교적) 간단히 해결하자는 것이다. 본래 그는 계량경제학 중 ‘투입-산출 분석’을 주창해 노벨상을 수상했다.

여러 산업부문의 거래관계를 격자의 표로 나타낸 산업연관표를 이용해 각 부문 사이의 원료 조달·제품 판매 등을 요연하게 분석한다. 거시 요소인 정부·소비자·외국을 추가하면 국민경제 안의 재화와 용역의 잇따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는 또 미국에서는 노동이 자본보다 덜 희소한 생산요소라고 분석했다(‘레온티예프 역설’). 왜냐하면 당시 자본이 더 많았음에도 실제로는 노동을 요하는 상품을 더 많이 수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우창 선생의 말대로 시는 “삶의 공통적 근거로 돌아가기를 호소하는 행위”이다. 빗대어 말하자면 경제학은 개개의 삶이 만드는 사회의 공통적 근본을 돌아보는 행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수리-통계적 기법을 차용하고 있지만, 경제학은 결국 시가 지향하고 있는 바로 그 본령인 ‘사람’에게 렌즈를 들이대야만 제대로 된 이론을 내놓을 수 있다.

아, 이 두 시인과 경제학자의 융합은 한 사람의 걸출한 학자를 세상에 내어놓았다. 외동딸 스베틀라나 (레온티예프) 알퍼스라는 미술사학자이자 작가를.

<김연 (시인·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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