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제-쓴 만큼 내는 게 아니라 쓸 만큼 미리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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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전기와 가스는 미리 충전한 후에 쓸 수 있다. 요즘은 은행뿐 아니라 즈푸바오(支付寶·알리페이) 같은 전자결제 시스템으로도 충전할 수 있다.

가스계량기를 통해 남은 가스량을 확인한 후에 은행, 인터넷 사이트, 앱 등을 이용해 가스비를 충전해야 한다. / 박은경

가스계량기를 통해 남은 가스량을 확인한 후에 은행, 인터넷 사이트, 앱 등을 이용해 가스비를 충전해야 한다. / 박은경

한국에서는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가 후불이지만 중국에서는 거의 모든 지불이 선불로 이뤄진다. 전기와 가스는 미리 충전한 후에 쓸 수 있다. 운 좋게도 전에 살던 독일인 지멘스 직원이 전기와 가스를 풍족히 넣어두고 떠났기 때문에 한참 동안 선불제라는 걸 잊고 살았다. 두 달 정도 신나게 ‘공짜전기’를 쓰다가 날씨가 더워져 에어컨을 켤 준비를 하면서 슬슬 불안해졌다. 가스는 안 써도 아쉬울 게 없지만, 온수기도 전기를 사용하는 집에서 전기가 끊기면 당장 생활불능 상태에 빠진다. 충전하려면 복도에 있는 전기계량기를 확인해야 하는데, 계량기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경비실에 전화한 후에야 열쇠꾸러미를 든 경비원이 나타나 문을 열어줬다. 표지판에 긴 숫자와 단위가 나왔지만 얼마나 남은 건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저 정도면 얼마나 쓸 수 있냐”고 열쇠꾸러미를 든 경비원에게 물었다. 그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만 답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알쏭달쏭하다. 아파트 계약도 한참 남았고, 전기가 끊길까 불안한 마음으로 살 수 없어 우선 500위안(약 8만3000원가량)을 충전했다. 여름에 에어컨을 과다하게 틀었을 때 불안해 한 번 더 충전했으니 8개월 동안 1000위안을 충전한 셈이다.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경비실에 전화해 계량기를 확인해봐야 한다.

요즘은 은행뿐 아니라 즈푸바오(支付寶·알리페이) 같은 전자결제 시스템으로도 충전할 수 있다. 전력공급 회사명과 고객번호, 주소 등을 입력하고 원하는 금액만큼 선결제한다.

가스비 계산이 좀 더 복잡한 느낌이다. 싱크대 아래 있는 계량기에 이사올 때 받은 가스카드를 꽂으면 숫자가 나온다. 역시나 그 숫자가 어느 기간만큼 쓸 수 있는 분량인지 감이 안 와 ‘일단 충전해 놓고 마음 편히 살자’는 마음으로 은행에 갔다. 전기는 대부분 시중은행에서 충전할 수 있지만 내가 가진 가스 카드로는 한 군데 은행에서만 가능했다. 은행 직원은 카드로 남은 금액을 확인해보고 “88㎥나 남았으니 안 해도 된다”며 그냥 가라고 했다. 친절은 감사하지만 대체 88㎥는 얼마만큼이란 말인가. 그는 “쓰기에 따라 다르다”고만 일러줬다. 수십년간 후불제 한국에서 살아와서인지 선불제는 감이 잘 안 잡힌다.

사람이 너무 많다는 뜻의 중국어 ‘런타이두어(人太多)’는 몇 해 전 인기를 끈 조정래 작가의 소설 <정글만리> 주인공이 중국의 첫인상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한 말이다. 사람이 많은 중국은 확실히 신뢰심보다는 경계심이 강하다. 신용카드보다는 직불카드가, 후불보다는 선불제가 발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자주 가는 한국 슈퍼 진열대에는 일반가와 회원가가 함께 붙어 있다. 회원가는 회원카드, 바로 충전된 선불카드가 있는 고객에게만 해당된다. 가격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500위안 혹은 1000위안씩 충전해두고 쓴다. 자주 이용하는 차량공유앱인 이다오(易到)는 충전한 금액의 50%를 돌려주는 혜택을 줬다. 할인혜택으로 자연스럽게 선불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불제 사회에서 희한하게도 아파트 수도세만은 후불이다. 월말이 되면 검침원이 계량기를 검사한 후 고지서를 주면 그에 맞춰 수도세를 내면 된다. 한국사람이 많이 사는 아파트라서 중국인인 그 검침원은 ‘수도세’라는 단어만큼은 한국사람 못지 않게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말했다. 웬일인지 이 검침원은 몇 달째 오지 않고 있다. 수도가 끊기지 않을까 걱정돼 주변에 물어보니 그럴 일은 없고, 과태료도 없다고 한다. 걱정되면 전화해 검침 요청을 하라는데, 번거로워 차일피일 미뤄 왔다. 그런데 수도세를 후불로 미뤄둔 지 4개월째 접어들면서 뭔가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고 있다. 불안감도 조금씩 고조된다. 아, 이렇게 중국식 선불제에 적응돼가고 있는 걸까.

<박은경 경향신문 베이징 특파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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