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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후퇴 부른 ‘법질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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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정권의 ‘법질서 확립’ 강조… 공공안전보다는 공권력 남용 초래

“구속영장이 발부된 민주노총 위원장이 시위현장에 나타나서 ‘나라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며 폭력집회를 주도했다. 대한민국의 법치를 부정하고 정부를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복면 시위는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IS도 그렇게 지금 하고 있지 않나.” 2015년 12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 자리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폭력집회’는 40일 전인 11월 14일에 있었던 민중총궐기 집회다. 고 백남기 농민이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던 집회다.

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법질서를 강조했다. 물론 법질서의 유지는 국가의 임무다. 그러나 법질서가 국가의 임무를 벗어나 집권세력의 정치적 구호로 쓰일 때 법질서는 임무가 아닌 정치가 된다. 김한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원은 법질서 정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무질서와 위험을 구실삼아 질서와 안전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정작 자신이 법질서를 위태롭게 하고 갈등과 불안을 가중시키는 정치를 법질서 정치라고 한다. 법질서 정치는 질서와 안전을 내세우면서 실상은 법질서를 흔들고 사회를 불안케 한다.” 집회 참가자들을 테러집단인 이슬람국가(IS)에 빗댄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법질서를 강조하기 위해 갈등과 불안을 가중시킨다는 점에서 ‘법질서 정치’와 맞닿아 있다.

2013년 25개 노동시민단체가 주최한 비상시국대회 준비위원회 대표자들이 청와대로 향하자 경찰들이 폴리스라인을 설치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2013년 25개 노동시민단체가 주최한 비상시국대회 준비위원회 대표자들이 청와대로 향하자 경찰들이 폴리스라인을 설치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무관용, 엄정 단속, 엄격한 법 적용 내세워
법질서를 강조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만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법질서를 강조했다. 김한균 연구원은 ‘법질서와 안전사회 담론의 법적 고찰’이라는 글에서 박근혜 정부와 이명박 정부는 ‘법질서 정치’를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은꼴이라고 말한다. 이들 정권에서 법질서와 안전 문제는 정치의 문제가 됐고, 정부와 정당 및 보수언론의 연합으로 이는 최우선의 공공 정책사안이 됐다. 위법행위에 대한 무관용, 질서 위반에 대한 엄정단속, 법 집행 공무원에 대한 공무방해 엄단, 집회·시위와 노동쟁의 행위에 대한 엄격한 법 적용이 대표적이다. 이명박 정부는 경미한 공무집행 방해사범에 대한 무관용 원칙, 불법시위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와 즉결심판 회부, 불법시위단체에 대한 정부 보조금 지원 제한 등의 정책을 내세웠다. 박근혜 정부는 4대악 근절, 21개 중점 국민안전대책, 4대 교통 무질서 집중단속, 범칙금 대폭 인상, 불법시위 강력 대응, 쌍용차 사태 희생자 분향소 강제 철거, 밀양 송전탑 공사 강행, 전교조 불법화 등의 정책을 내세웠다.

이들 정책이 법질서 확립으로 이어질까. ‘법질서 정치’를 내세우는 정치세력은 선거 때마다 자신들이 치안과 범죄율을 개선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제임스 길리건·교양인)는 ‘법질서 정치’가 범죄율 완화의 해법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분석한다. 이 책은 법질서와 안전을 내세운 미국 공화당 집권 시기에 왜 살인율과 자살률이 급증하는지를 분석한다. 공화당은 규제를 풀어 일자리를 늘리고 법질서를 세워 범죄를 엄단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집권하지만 공화당 집권기에는 실업률과 동시에 범죄율이 함께 치솟았다. 수치심과 폭력치사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실업률을 올리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등 기득권 이익에만 집중한 공화당의 정책은 수치심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결국 ‘법질서 정치’가 향하는 곳은 ‘법질서의 확립’이 아니라 공권력 남용에 따른 ‘민주주의의 후퇴’다. 김한균 연구원은 “이들이 겨냥하는 바는 법치국가 질서보다는 정치적 장악력의 확보다. 위험이냐 안전이냐 혼란이냐 질서냐를 선택해야 하는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형법 권력의 강화를 용인하게 마련이다. 사회적 지지를 구실로 형법 체계의 비합리성과 권력 남용이 증가하게 되면 그 폐해는 장기간 계속되며 회복하기가 어렵다. 법질서 정치는 민주적 통제장치를 무시하고 공권력을 동원하는 변형된 방식의 권력 남용이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남기 농민의 사망, 용산참사, 쌍용차 강제진압 등의 사건은 공권력 남용의 다른 이름인 ‘법질서 정치’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후퇴시켰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법질서 정치’로 갑들의 기득권 보호
보수정부가 ‘법질서 정치’를 내세우는 이유는 민주주의 후퇴라는 비용을 치르고 지켜내야 할 ‘기득권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법질서를 내세워 공권력을 남용하고 국가 폭력을 자행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 성격은 조금씩 다르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등 정통성을 상실한 권위주의 정권은 ‘체제유지’를 하기 위해 폭력적인 공권력을 동원했다. 반면 선거를 통해 집권한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가 ‘법질서’를 내세우며 폭력적인 공권력을 동원하는 이유는 다르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교 교수는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가 폭력적인 공권력을 동원해 지키려고 하는 것은 ‘갑’들의 기득권 질서라고 말했다. 특히 고 백남기 농민이 사망했던 민중총궐기는 ‘갑’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법질서 정치’를 이행했다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들 보수정부는 모든 국가경영의 기본틀을 복지나 불평등 완화 이런 것에 맞추기보다는 질서유지에만 맞춘다. 그리고 여기에 법질서를 내세운 국가 폭력을 집중시킨다. 반면 나머지 부분은 신자유주의 틀에 맞춰 다 민영화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상당 부분 포기하고 민간에 이양한다. 그리고 오직 질서만을 강조하면서 다른 목소리들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정치를 비즈니스로 만든 우파의 탄생>(토마스 프랭크 지음·어마마마)은 미국 공화당 정부가 자신의 책임을 민간으로 ‘아웃소싱’해 버리고 민간에게 책임도 묻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정부 업무를 민간기업에 맡기는 것이야말로 목표했던 과업을 완수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은 보수주의의 핵심 기본 원칙이다. 사실상 우파의 아웃소싱 시스템은 정부의 전체 업무 중에서 너무 방대한 부분을 차지했다…. 민간 부문에 속한 계약업체들은 어떤 일에 대해 책임지지도 정부 기관의 감시를 받지도 않았다. 우파가 가장 즐겨 사용하던 전술은 아웃소싱한 업무를 감독하는 기관을 아예 폐쇄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보수주의 정권에 유일한 유권자는 국민이 아니라 기업이라고 말한다.

박근혜 정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박근혜 정부는 노동4법, 성과연봉제, 경제활성화법, 민영화 등 정부의 역할을 민간에 이양하고 기업의 이득을 강화하는 법안들을 추진 중이다. 지난 민중총궐기에서 집회 참가자들이 주장했던 내용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쌀 직불금 공약을 지키라는 것과 1대 99의 불평등한 구조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상희 교수의 설명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민간에 이양하다 보니 과거에 공적으로 해결됐던 문제들에서 갑을관계가 형성되고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시민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졌다. 그래서 이를 고쳐 달라고 시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해 국가 폭력으로 이를 누른다. 그 결과 시민들의 목소리는 억눌리고 시민들이 집회를 한 원인이었던 ‘갑’에게 더욱 힘이 실리게 된다.” 박근혜 정부의 ‘법질서 정치’의 결론은 ‘법질서 확립’이 아니라, ‘불평등의 심화’, ‘갑을 질서의 공고화’였던 셈이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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