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B 부활, 친위대 강화 ‘푸틴의 철권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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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B 2.0’이라고 불리는 국가보안부와 ‘푸틴 근위대’의 등장은 러시아인들을 더욱 옥죄는 수단일 뿐이다. 푸틴이 자신의 권위적 통치를 안보주의와 애국주의를 구실로 정당화하면서 소수자 권리와 표현의 자유는 갈수록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러시아 크렘린궁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측근 숙청과 KGB(옛 국가보안위원회)를 꼭 닮은 거대 정보기관의 등장, 수십만에 달하는 근위대 창설까지…. 9월 19일 국가두마(하원) 총선에서 현 여당 통합러시아당이 압승한 이후 푸틴은 장기집권의 포석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다. 신세대 친위세력과 정보·보안기관들이 푸틴을 향한 충성심을 기준으로 ‘헤쳐모여’ 하는 가운데, 러시아가 스탈린 시절에 버금가는 철권통치로 회귀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번지고 있다.

2018년 대선 앞두고 장기집권 발판 다져
9월 20일 러시아 일간 <코메르산트>는 푸틴 대통령이 연방보안국(FSB)과 해외정보국(SVR), 연방경호국(FSO)을 합쳐 국가보안부(MGB)라는 새 행정조직을 만드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옛 소련 시절을 기억하는 러시아인들의 뇌리에는 비밀경찰의 악몽이 스쳤다. 국내·해외 첩보와 요인 경호, 수사권까지 거머쥔 거대 정보기관의 출현. “푸틴이 KGB를 부활시키려 한다”는 우려가 러시아 안팎에서 나왔다. 1917년 볼셰비키의 비밀경찰기구 ‘체카’를 모태로 하는 이 기관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피의 숙청’을 주도했던 NKVD를 거쳐 1954년 KGB로 개칭됐다. 냉전시대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치열한 첩보전을 벌인 라이벌이었고, 국내로는 수백만의 협력자를 거느리고 반체제 인사에 대한 납치와 고문, 암살을 서슴지 않았다. 소련 붕괴 후 보리스 옐친은 KGB를 연방보안국과 해외정보국, 연방통신정보국(FAPSI) 등으로 해체시켰다. 1975년부터 소련 붕괴 직전까지 KGB 요원으로 근무했던 푸틴은 종종 “전직 KGB 요원 같은 건 없다”는 농담을 했다. 그런 푸틴이 이제 KGB와 맞먹는 강력한 정보기관을 수족으로 부릴 수 있게 된 셈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오른쪽)이 2011년 5월 당시 대통령 행정실 제1부실장이던 뱌체슬라프 볼로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오른쪽)이 2011년 5월 당시 대통령 행정실 제1부실장이던 뱌체슬라프 볼로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AP연합뉴스

물론 이번 통·폐합 계획에는 조직 운용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분이 붙었다. 하지만 그 속내는 2018년 대선을 앞두고 장기집권을 꾀하는 푸틴의 권력 다지기라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 4월 푸틴은 내무군과 대테러 부대를 통합한 국가근위대를 창설했다. 직원 수만 40만명에 달하는 이 거대 치안기관은 대테러 목적으로 세워졌으나 사실상 반정부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푸틴 근위대’로 불린다. <코메르산트>에 따르면 국가보안부 신설 계획도 국가근위대 창설과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푸틴은 친위세력의 세대교체도 추진 중이다. 9월 23일 푸틴은 국가두마 의장으로 대통령 행정실 제1부실장을 지냈던 뱌체슬라프 볼로딘을 지명했다. 볼로딘은 올해 52세로, 전임 의장인 세르게이 나리슈킨보다 10살 이상 어리다. 그는 전면에 나서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2011년 총선이 부정선거 의혹으로 얼룩진 것과 달리 이번 총선에서는 잡음을 최소화했다는 평가를 받아 전격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푸틴의 KGB 재직 시절부터 측근이었던 나리슈킨은 해외정보국 국장으로 밀려났다. 해외정보국이 2018년 이전까지 국가보안부로 통·폐합될 예정이라는 것으로 볼 때 이번 인사는 좌천이나 다름없다.

푸틴은 2000년 집권한 뒤 자신이 KGB 요원과 FSB 국장으로 재직할 당시의 동료들을 요직으로 끌어올렸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처럼 푸틴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일부 인맥을 제외하면 정부 내 주요 직위는 이 실로비키(제복 입은 남자들)들이 독점해 왔다. 하지만 올 초부터 푸틴은 실로비키 측근에 대한 숙청작업에 들어갔다. 나리슈킨의 좌천은 가장 최근의 일이다. 지난 8월에는 세르게이 이바노프 대통령 행정실장을 경질하고 외교관 출신의 비교적 젊은 안톤 바이노를 임명했다. 연방경호국, 연방세관국 등에 포진하고 있던 실로비키들도 해임되거나 한직으로 밀려났다. 노회하고 야망에 찬 측근들을 내치고 젊고 온순한 테크노크라트로 주변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대선을 앞두고 후계 경쟁을 막으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푸틴이 한창 올리가르히(신흥재벌)들을 숙청할 당시, 노련함과 실용주의로 무장한 실로비키는 훌륭한 전위대 노릇을 했다. 하지만 푸틴이 최근 기용하고 있는 신진세력은 경험은 적지만 애국·보수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이들이 주를 이룬다. 지난 4월 국가인권옴부즈만으로 임명된 타티아나 모스칼코바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로, 여성·성소수자 인권운동에 강한 반대의견을 내 왔다. 지난 8월 교육장관으로 취임한 올가 바실리예바는 스탈린에 대한 재평가를 주장하는 강경 보수주의자로 알려졌다.

대테러 훈련을 하고 있는 러시아 국가근위대 소속 군인들. / 타스연합뉴스

대테러 훈련을 하고 있는 러시아 국가근위대 소속 군인들. / 타스연합뉴스

애국적·보수적 신인들 기용 늘려
이런 상황에서 국가보안부 신설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국내외 첩보를 담당하는 FSB와 SVR, 그리고 ‘러시아의 FBI’라고 불리는 연방수사위원회 등은 각각의 수사권과 정보력을 쥐고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뤄왔다. 하지만 지난 6월 FSB가 연방수사위원회 고위 간부들을 범죄조직으로부터 거액을 챙긴 혐의로 잡아들이는 등, 이들의 패권경쟁이 푸틴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신호음이 들리고 있다. 프라하 국제관계연구소의 마크 갈레오티 연구원은 “집권 초기 푸틴은 비슷한 성격과 권한을 지닌 기관들을 상호 견제하게 하는 ‘관료적 다원주의’를 신뢰했다”며 “하지만 엘리트에 대한 불신이 커진 지금은 한 줌의 믿을 만한 사람들로만 정권을 구성하는 통치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자유유럽라디오(RFE)에 말했다. 정보기관을 일원화한 뒤 자신이 가장 믿는 사람을 수장으로 앉혀 장기집권의 초석을 닦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미 장관급에 해당하는 국가근위대장에 푸틴은 10년 동안 곁을 지켰던 경호실장 빅토르 졸로토프를 앉혔다.

거대 스파이 기관과 근위대를 통한 권력의 집중. 이들 양대 기구는 막강한 동시에, 외부 견제가 없어 훗날 권력자의 손을 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미국 온라인매체 <복스>는 “푸틴은 언젠가 이 결정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까지 했다. 때문에 푸틴의 이런 선택 이면에는 위기의식이 도사리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저유가에 따른 재정 악화와 경제난, 크림반도 합병으로 인한 서방의 제재 때문에 민심이 이반하고 있다는 불안감이다. 아직까지 푸틴 지지율은 80% 정도로 높지만, 최근 총선 투표율이 50%도 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언제든 거품이 꺼질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크렘린의 사정이야 어떻든, ‘KGB 2.0’이라고 불리는 국가보안부와 ‘푸틴 근위대’의 등장은 러시아인들을 더욱 옥죄는 수단일 뿐이다. 푸틴이 자신의 권위적 통치를 안보주의와 애국주의를 구실로 정당화하면서 소수자 권리와 표현의 자유는 갈수록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소련 시절 ‘반동분자’라 불렸던 반정부 인사들은 이제 ‘극단주의자’로 불리며 탄압당하는 실정이다. ‘반극단주의법’이 등장하고 인터넷 검열이 강화됐다. 이전까지 형식상으로나마 민주적인 형태로 정권을 유지해온 푸틴이 이제는 행정기관을 사조직화해 사회 장악에 나섰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제 러시아는 권위주의 국가에서 전체주의 국가가 됐다”는 야당 정치인 겐나디 구스코프의 탄식을 새겨들을 만하다.

<김상범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ksb123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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