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책사’ 손 안에 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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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넘나들며 종횡무진… 시대 꿰뚫어보는 전략으로 정치판 ‘쥐락펴락’

책사는 사전적 의미로 ‘어떤 일이 잘 이루어지도록 꾀를 내어 돕는 사람’이다. 정가에서는 책사가 당대표나 후보, 지도자들 옆에서 전략을 짜는 참모를 말한다. 최근 이들 책사의 행보는 독특했다. 예전의 책사는 여당이면 여당, 야당이면 야당에 소속돼 활약했지만 최근 선거에서는 여당과 야당을 넘나드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과거 한나라당 책사에서 2012년 대선 때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책사로 변신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올해 총선에서는 역시 여당 쪽 책사였던 김종인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의 비대위원장이 되면서 책사들의 ‘크로스 오버’ 현상이 두드러졌다. 4월 총선에서 윤여준 전 장관은 국민의당을 창당한 안철수 전 대표의 책사가 돼 총선에 참여했다. 2012년 대선에서 김종인 의원과 함께 새누리당 박근혜 캠프에 있었던 이상돈 의원은 총선에서 야당인 국민의당을 선택했다. 마치 고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제자백가가 한 나라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을 제대로 평가해주는 국가를 위해 일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20대 총선서 김종인·윤여준 활약
대표적인 책사로 손꼽히는 김종인 의원과 윤여준 전 장관은 총선 내내 특유의 행보로 유권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김 의원은 대표 겸 비대위원장으로 직접 선거를 진두지휘하면서 더민주의 제1당 위치 확보라는 뜻밖의 성과를 거뒀다. 한 야당 인사는 “김종인 의원을 보면, 되는 곳에 책사로서 올인(all-in)해 성공하는 케이스”라고 말했다. 윤 전 장관은 건강 때문에 선거판에 직접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국민의당이 제3당으로 약진하면서 그의 선택이 유권자의 바닥 민심을 제대로 읽었다는 사실을 입증시켰다. 반면 원래 여당에 둥지를 틀었던 관록의 책사들이 야당으로 가버린 후 새누리당은 총선에서 참패를 맞게 됐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평화재단 창립 8주년 기념 대토론회’에서 재단 이사장인 법륜 스님, 김종인 새누리당 선대위 국민행복추진위원장, 윤여준 민주통합당 선대위 국민통합추진위원장, 무소속 안철수 대선 후보 캠프 외교안보 정책 브레인인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오른쪽부터)가 토론회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 경향신문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평화재단 창립 8주년 기념 대토론회’에서 재단 이사장인 법륜 스님, 김종인 새누리당 선대위 국민행복추진위원장, 윤여준 민주통합당 선대위 국민통합추진위원장, 무소속 안철수 대선 후보 캠프 외교안보 정책 브레인인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오른쪽부터)가 토론회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 경향신문

정가에서는 김종인 의원, 윤여준 전 장관과 함께 이영작 서경대 석좌교수를 원로급 책사로 보고 있다. 이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처조카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1997년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이 당선될 때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이 교수는 2007년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에도 전략을 조언했다. 미국의 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한 이 교수는 최근 종편에서 정치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인사는 “이 교수는 자료와 사례를 바탕으로 한 통찰을 하는 반면, 김 의원과 윤 전 장관은 과거 정부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직관적인 통찰을 한다”고 분류했다. 윤 전 장관의 의원 시절 보좌진이었던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대표는 “윤 전 장관은 독서와 젊은 층과의 소통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눈이 있다”면서 “얕은 수를 쓰지 않고 정도와 원칙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전략에 깊이가 있다”고 평가했다.

최근 이들 원로급 책사의 행보도 눈길을 끌고 있다. 윤여준 전 의원은 비박·비노 후보들의 제3지대 결집에 이름이 오르내린다. 김종인 의원 역시 제3지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월 총선에서 활약한 이들 책사가 과연 내년 대선에서도 의도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더민주에서는 이해찬 의원과 김한길·이강래 전 의원이 책사로 손꼽혔다. 이들은 1997년 대선(김대중 대통령 당선)과 2002년 대선(노무현 대통령 당선)에서 연거푸 승리하는 데 일조를 했다. 뛰어난 판단력과 재빠른 선택, 인터넷 네트워크를 이용한 전략 등이 이들 책사의 장점으로 평가된다. 이들 외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옆에서는 이광재 전 강원지사가 책사 역할을 했다.

당시 민주당은 야당이 된 한나라당에 비해 전략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한길 전 의원은 여당 원내대표이던 당시에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에 비해 민주당에는 뛰어난 전략가들이 많아 대선 같은 큰 선거에서 능히 이길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야당의 책사들은 2007년과 2012년 대선에서 야당이 잇따라 패하면서 이들이 풍미했던 시절이 이미 지나갔다는 평가를 들어야만 했다. 특히 여당 측에서는 이들 책사에 대한 평가가 후하지 못하다. 한 여당 쪽 인사는 “이들 책사는 시대적 흐름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흐름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길게 못 가는 한계를 노출했다”고 평가했다.

선거는 ‘책사’ 손 안에 있소이다

2000년 이후 여론조사 전문가들 부각
새누리당에서는 2007년 대선후보를 뽑는 당내 경선에서 새로운 책사들이 대거 등장했다. 박근혜 후보 측에서는 2002년 대선에서 여의도연구소장을 역임했던 유승민 의원이 책사 역할을 했다. 여기에 이혜훈 의원과 김재원 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이 박 캠프의 전략을 맡았다. 이 캠프에 참석했던 인사는 “여러 의원들이 많았지만 실제로 전략을 짜고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참모들은 몇 명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이명박 후보 측에서는 최시중 전 갤럽 대표(전 방송통신위원장)와 정두언 전 의원이 책사로 활약했다. 최 전 대표는 <동아일보> 정치부장 출신으로,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의 대표를 맡아 여론 분석에 뛰어났다. 현재 국민의당 의원인 이태규 의원은 2007년 대선 당시 선대위 전략기획팀장으로 정두언 전 의원과 함께 활약했다. 박형준 전 의원도 정책 쪽을 맡은 전략가였다.

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측에는 김종인·이상돈 의원이 합류했다. 친박 측 한 관계자는 “김·이 의원은 경제민주화 정책을 입안했을 뿐, 당시의 역할로 봐서는 엄밀한 의미의 책사라고 보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박 후보 측에서는 안병훈 <조선일보> 전 부사장과 최병렬 전 대표 등의 7인회 멤버들이 전략에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적인 당내 전략은 ‘문고리 3인방’ 중의 한 명인 정호성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맡았다고 한다.

야당 측에서는 얼마 전 민주정책연구원장에서 물러난 민병두 의원이 전략가로 통한다. 이외에도 박선숙 의원(현 국민의당 의원), 최재천 더민주 전 정책위 의장, 이목희 전 의원 등이 전략에 밝은 인사로 손꼽혔다. 친노·친문 쪽에서는 이번 총선에서 김종인 비대위원장에게 대표직을 물려주기 전까지 진성준 전 의원이 전략 쪽을 맡았다.

2000년 이후 대선과 총선에서는 여론조사 분석을 바탕으로 한 책사들이 한두 명씩 부각됐다. 야당 측 인사로는 김헌태 전 더민주 정세분석본부장과 이철희 의원이 활약했다. 두 전략가는 손학규 전 대표가 대표로 활동하던 당시 손 전 대표 밑에서 전략을 맡았다. 이번 총선에서도 김종인 비대위원장 체제 아래에서도 총선전략을 맡아 총선 승리를 이끌어낸 인물로 평가받았다. 이철희 의원은 민주당 책사로 손꼽히는 김한길 전 의원의 보좌관 출신으로, ‘책사가 낳은 책사’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이와 비슷한 유형으로 이태규 의원이 있다. 이 의원 역시 윤여준 전 장관의 의원 시절 보좌관으로 활동해 ‘책사가 낳은 책사’로 평가된다.

정치지도자들 중 책사에 의존하는 인사가 있는 반면, 책사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인사도 있다. <정치의 귀환>의 저자인 유창오씨는 “지지층이 견고한 지도자일 경우 사실 책사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면서 “지지층이 견고하지 않거나 중도 노선을 견지하는 정치지도자일 경우에는 그때그때마다 전략을 잘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책사에게 많이 의존하게 된다”고 말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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