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Ⅱ

용산미군기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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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외국군 주둔지로서의 아픈 역사 치유하는 공간으로 조성해야

“용산공원은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모습으로, 허리가 잘록해진 채 조성될 위기에 있다. 어느 나라 국가공원이 머리와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조성되나?”

8월 23일, 국회에서 열린 ‘용산공원에 묻다’ 토론회에서 성장현 용산구청장이 한 말이다. 용산공원은 경기도 평택시로 이전이 예정된 용산미군기지 부지에 조성될 예정이다.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은 내년 말 용산에 주둔한 미군이 떠날 때에 맞춰 설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공원추진단과 시민단체와의 이견
용산미군기지는 크게 북쪽의 메인 포스트와 남쪽의 사우스 포스트로 나누어진다. 메인 포스트의 북쪽에는 캠프 코이너, 서쪽에는 캠프 킴이 위치하고 있다. 시민단체 쪽에서는 미군기지 부지에 국방부, 전쟁기념관, 국립박물관 등을 더한 357.7만㎡(약 108만평)가 온전히 용산공원 부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군이 들어오기 이전 일본군이 쓰던 부지 전체를 공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용산공원추진단은 현재 정부 시설로 되어 있는 부지를 제외한 265.5만㎡만을 대상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미국대사관이 들어오고 미군의 헬기장, 호텔, 출입·방호시설이 존치되면 용산공원 부지는 더욱 줄어든다. 게다가 한미연합사령부의 존치가 결정되면서 남북으로 나뉜 용산공원의 허리는 더욱 더 얇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온전한 생태공원 조성을 위한 용산시민회의’ 회원들이 8월 2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용산공원 관련 토론회에 참석해 요구사안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다. / 연합뉴스

‘온전한 생태공원 조성을 위한 용산시민회의’ 회원들이 8월 2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용산공원 관련 토론회에 참석해 요구사안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다. / 연합뉴스

토론회를 공동 주최한 용산공원 시민포럼의 공동대표 조명래 단국대 교수는 용산공원 추진과정에서 시민들의 목소리가 담길 여지가 너무 없었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문화연대 공간환경위원장이던 시절부터 20년 가까이 용산공원에 주목해 왔다. 8월 23일 토론회에서 조 교수는 정부 주도의 공원 조성은 또 다른 ‘평범한 공원’을 만들 뿐이라고 말했다.

우선 그는 국가가 혼자서 용산공원을 만들어가는 지금의 방식은 중지되어야 한다고 봤다. 현행 용산공원 특별법에 따르면, 용산공원 조성의 책임은 국가가 지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현실에서는 국토부가 주도하는 공원 조성으로 나타났다. 조 교수는 “주권자인 시민은 관객으로만 설정돼 있고, 국토부 공무원과 국토부에 자문하는 전문가들끼리만 밀실에서 공원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용산공원의 성격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는 지적도 있다. 용산공원추진단은 종합기본계획을 통해 용산공원이 최초의 국가계획으로 만들어지는 공원이며, 역사성·민족성·생태성·문화성을 갖춘 공원의 모습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시민단체 쪽에서는 오히려 용산공원추진단이 추진하는 용산공원은 모든 것을 다 넣으려다가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는 공원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4월 29일 용산공원추진단은 용산공원 콘텐츠 선정과 관련한 공청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미래창조과학부 등 각 부처가 용산공원 내에 입주를 희망한 박물관과 문화시설이 발표됐다.

용산공원 추진이 본격 시작되던 2000년대 초·중반에도 용산공원 안에 이런저런 박물관을 입주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정대협은 일제강점기 위안부 피해자들의 문제를 다룬 박물관을 용산공원 안에 지으려 했다. 2003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1만평 규모의 기념관을 짓고자 했다.

조명래 교수 등 시민단체에서 주장하는 용산공원 부지(왼쪽)와 실제 추진 중인 용산공원 부지(오른쪽). 오른쪽 그림의 경우 허리 부분이 잘록하게 보인다. 또한 한미연합사령부가 추가로 용산기지에 남게 되어, 용산공원의 허리는 더욱 잘록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조명래 교수 등 시민단체에서 주장하는 용산공원 부지(왼쪽)와 실제 추진 중인 용산공원 부지(오른쪽). 오른쪽 그림의 경우 허리 부분이 잘록하게 보인다. 또한 한미연합사령부가 추가로 용산기지에 남게 되어, 용산공원의 허리는 더욱 잘록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과학관, 아트센터 추진에 비판 여론
그나마 이들은 역사문제와 관련이 있는 단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엔 미래창조과학부의 경우 1200억원짜리 과학관을, 문화체육관광부의 경우 950억원짜리 아트센터를 짓겠다고 나섰다. 여론의 비판이 계속되자 지난 7월 국토부는 박물관과 문화시설에 대해서는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내년 6~7월에는 국토부가 선정하는 새로운 콘텐츠가 발표될 예정이다.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생각하는 용산공원의 이념과 역사성은 무엇일까. 우선적으로는 용산미군기지에 각인된 아픈 역사를 치유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용산은 일본군이 오기 이전부터 청나라의 주둔기지, 고려시대 몽골군의 병참기지로 활용된 바 있는 땅이다. 미군기지 일부 시설이 잔류하고, 허리가 잘린 형국의 용산공원은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남북분단의 아픔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용산기지의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잔류할 예정인 미군 시설을 하나라도 더 내보내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국토부가 주도하는 상황에서 그게 가능하겠나”라며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정부가 문제제기를 할 수 없다면 시민들이 앞장서서 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현행 용산공원 계획에 ‘메시지’가 부실하다는 지적도 있다.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는 “용산공원은 식민과 분단의 아픔이 녹아 있는 공간이다. 단순히 홍보관 수준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후세인들과 세계인을 향한 메시지를 담은 공간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메시지를 담기 위해서는 용산미군기지라는 공간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신 교수는 국토부가 왜 일본군은 용산에 자리를 잡았는지, 미군기지의 동서와 남북을 가르는 도로는 어떤 취지에서 세워졌는지 등 역사학적인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지 반문한다. 그는 “미군기지라는 특성 때문에 현장조사를 하기는 어렵지만, 현장에 가지 않더라도 조사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며 “과거 일본군 시설을 지은 건설회사를 찾아서 설계도라도 얻어 온다든지, 해외에 있는 일본군·미군 시설과 현재의 용산기지를 비교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신 교수는 “용산기지 이전 문제가 처음 불거진 때만 해도 미군기지의 초기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존해 있었다. 20여년이 흘러오는 동안 정부에서 문헌 조사나 구술 조사를 해뒀으면 지금쯤이면 용산공원을 짓는 데 큰 자산이 됐을 것”이라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자료조사를 철저히 해야 ‘그저 그런 공원’이 아닌 국가공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집Ⅱ]용산미군기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올까

더민주, 용산공원 특별법 개정안 준비
신 교수의 말처럼 용산미군기지의 이전문제가 처음 불거져 나온 것은 26년 전이다.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대선 공약이었던 용산미군기지 이전 방침에 따라 미군과 용산기지 이전에 대한 기본합의서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한동안 용산기지 이전문제에 대한 논의가 없다가 참여정부 시기인 2003년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용산기지 이전이 합의됐다. 이듬해 국회는 용산기지 이전에 대한 비준을 통과시켰으며, 2005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국가 주도의 공원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용산공원 조성은 척척 진행됐다. 2007년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이 제정됐고, 이듬해에는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이 설치됐다. 이후 용산미군기지 일대가 정비구역으로 지정되고, 2011년 종합기본계획이 고시됐다. 2012년 10월부터는 설계가 시작됐다. 한편, 평택 미군기지는 2007년 12월에 기공식에 들어가 올해 5월부터 용산기지 미군들의 이주가 시작됐다. 내년 말에는 미군이 모두 평택기지로 이전할 예정이며 이에 맞춰서 용산공원 설계도 완성될 예정이다.

조명래 교수는 정부가 용산공원 조성을 주도하게 되어 있는 특별법을 지금이라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부처들이 갑자기 박물관이나 문화시설을 용산공원에 넣겠다고 나온 게 아니다. 토건개발부서인 국토부가 일을 추진하고 있고, 수 년 전부터 각 부처나 국회에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국토부가 공원을 주도하는 한 각 부처의 ‘시설 밀어넣기’는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용산공원 시민포럼과 함께 8월 23일 국회 토론회를 주최한 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은 용산공원 특별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진 의원실 관계자는 “20대 국회가 출범한 뒤부터 여러 시민단체의 의견을 반영한 용산공원 특별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법안의 정합성 등 문제가 있어 당장은 발의하지 않고 계속해서 의견을 모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말했다.

1990년 용산미군기지의 모습. 가운데 도로를 경계로 위쪽이 메인포스트, 아래쪽이 사우스포스트다.

1990년 용산미군기지의 모습. 가운데 도로를 경계로 위쪽이 메인포스트, 아래쪽이 사우스포스트다.

뉴욕 거버너스 아일랜드 추진 과정 참고
한편, 용산공원을 둘러싼 관계자들이 생각하는 ‘용산공원의 모델’도 읽을 수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용산공원을 미국의 센트럴 파크나 캐나다의 스탠리 파크처럼 오랫동안 후손들이 쓸 수 있는 공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센트럴 파크는 뉴욕시 맨해튼 섬 한가운데에 위치한 공원으로, 면적이 시민단체에서 주장하는 용산기지 전체 부지와 비슷한 314만㎡다. 1850년대에 조성된 센트럴 파크는 ‘도심에서 자연으로 최단 시간에 탈출한다’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캐나다 밴쿠버의 스탠리 파크는 이보다 넓은 약 400만㎡에 달한다. 20여년 정도 군사기지로 쓰이다가 공원으로 만들어진 곳으로, 매년 8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다.

현재 용산공원의 설계를 담당하고 있는 West8의 조경가인 최혜영 팀장은 미국 뉴욕의 거버너스 아일랜드에 주목했다. 올해 4월 최 팀장이 한국조경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거버너스 아일랜드와 용산공원은 닮은 점이 많다. 미국 뉴욕항의 중심에 서 있는 거버너스 아일랜드는 맨해튼 섬 남단의 작은 섬이다. 200년 이상 군사기지 역할을 하다가 1995년 마지막 군인이 섬을 떠났다. 연방정부도 뉴욕시에 섬을 돌려줬다.

거버너스 아일랜드의 경우 연방정부에서 뉴욕시로 섬이 되돌아올 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섬이 사용돼야 하고, 영구적인 주거와 산업시설은 불가능하다는 원칙 정도만 합의를 봤다. 공적 영역에서 섬의 활용방안을 정하지 않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섬이 시민들에게 돌아온 이후인 1996년부터 민간에서 자체적인 공모전을 통해 섬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아이디어가 모였다. 뉴욕시는 2003년부터 시민들에게 섬을 개방했다. 100년 이상 섬에 가보지 못한 시민들에게 갑자기 아이디어를 내라고 하면 한계가 있어 시민들에게 거버너스 아일랜드를 충분히 경험한 뒤에 아이디어를 내달라는 취지였다.

2006년 섬이 완전히 개방된 뒤부터 구체적인 ‘공원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뉴욕시는 2010년까지 공원의 큰 틀을 정하는 마스터플랜을 짰다. 한편으로는 오프라인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워크숍, 전시회, 토론회 등을 통해 아이디어를 받는 과정을 거쳤다. 마스터플랜에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많이 반영됐고, 세부적이고 실무적인 차원은 전문가들의 손에 맡겼다. 2014년 기준 매년 50만명이 방문하는 괜찮은 규모의 공원으로 컸다.

최 팀장은 거버너스 아일랜드 공원 형성과정과 용산공원 프로젝트 추진과정을 비교하며, “실제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개발 방향에 대한 공론이 형성되도록 해야 하며, 개발 대상지를 먼저 개방함으로써 시민들 간의 커뮤니티를 형성시켜주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용산 미군기지의 일본군 시설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예정대로 주한미군이 2017년 말 용산기지를 떠나면 바로 용산공원 조성을 시작할 수 있을까. 본격적으로 공원을 만들기 전에 현재 용산기지 안에 남아 있는 다양한 문화재를 보존하고 새로운 문화재를 발굴해야 한다. 용산기지 내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이 사용했던 시설물이 있다.

용산이 일본군의 병영기지가 된 것은 1904년부터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현재의 용산미군기지 일대를 위수지역으로 선포하고 300만평을 군용지로 수용했다. 1907년 사격장을 시작으로 1908년부터 20사단 보병78연대의 병원, 창고, 형무소 등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914년 용산 일본군 기지는 조선군사령부로 이름을 변경했고, 20사단 외에 추가로 1개 사단이 주둔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총독 관저를 비롯해 사단 사령부, 사단장 관저 등 일제 무력통치의 핵심적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1930년대부터는 중국 침략 및 전시물자 동원의 기지로 역할이 확장됐다. 1945년 광복을 맞은 이후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용산기지의 일본군 시설을 그대로 접수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2009년 국토교통부가 실시한 용산공원 지역 기초조사에 따르면, 미군이 일본군 시설을 양도받을 당시 일본군 건물은 56개동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장조사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일본군 시설의 정확한 규모는 조사마다 차이를 보인다.

정부에서는 최소 세 차례에 걸쳐 용산기지에 대한 현장조사를 벌였다. 2004년 12월 문화관광부 현장조사에 따르면 용산미군기지 내에 30여개의 일본군 시설물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 최소한 16곳은 주한미군이 재활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일본군의 영창 시설은 미군 지원단의 휴게실로 바뀌었고, 일본군 병원 시설은 주한미군 합동군사업무단(JUSMAG-K)이 사용했다. 2009년 기초조사 때도 용산기지 현장조사를 한 것으로 보이나, 일본군 시설에 대해서는 2004년의 결과를 되풀이했을 뿐 추가적인 조사 결과는 발표되지 않았다.

2011년 현장조사에서는 더 많은 건물들이 확인됐다. 문화재청이 2011년 7~8월 사이의 현장조사를 토대로 발표한 용산미군기지 내 근대건축물 보고서에 따르면, 용산기지 내 1245동의 건물 중 일제강점기에 축조되어 현재까지 이르는 것은 132동에 달한다. 일제강점기 건물을 재활용한 것이 용산미군기지 전체 건물의 10%를 넘는다는 의미다. 기지의 북쪽에 해당하는 메인포스트에는 주로 병영시설, 남쪽인 사우스포스트에는 주로 숙소시설이 남아 있다고 한다. 2004년 조사에서는 주한미군 합동군사업무단이 일본군 병원시설을 쓰고 있다고 한 반면, 2011년 조사에선 일본군 장교 숙소를 재활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확한 문헌 조사와 미군 이전 이후 현장조사를 통해 각 일본군 시설의 정확한 역할과 현재 주한미군이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용산공원 조성과정에 시민 참여를 늘리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일본군 시설 보존방안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한 전문가는 “우리 역사의 아픈 모습을 보여주는 시설을 당연히 올바른 방향으로 후세에 전해야 한다”면서도 “현재 용산공원 추진에서 가장 문제되는 점은 용산공원이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장소이기보다 여러 부처의 갖가지 시설로 채워진 시설공원이 되는 것이다. 문화재 보존을 핑계로 시설공원화를 추진하려는 이들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에는 부정적인 입장”이라고 말했다.

용산공원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측에서는 일본군 시설을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고 본다.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는 “근대 건축물을 보존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현재 자리에 놔두는 방법도 있고 다른 곳에 옮기는 방법도 있는데,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에서만 얘기되고 있고 외부와 논의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 문제”라며 “가능하면 건물을 부수지 않은 상태에서 내부 시설을 기념공간 등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신 교수는 용산기지가 일본군의 ‘사령부’로서 활용된 공간인 만큼 다른 일본군 시설과의 연계 속에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나도 직접 조사를 해봤지만 일본군 땅굴이 수백 군데가 넘는다. 일본군 사령부가 한반도의 다른 일본군 군사 연결망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 다른 나라에 남은 일본군 기지와의 관계는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용산공원추진단 관계자는 “과거 일본군 시설의 경우 최대한 보존하는 방향으로 설계를 진행하고 있다”며 “일본군 시설을 모두 보존할지 일부만 남길지, 일본군 시설을 어떻게 재활용할지 등에 대한 방향은 현재로서는 확정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용산공원 부지 내에는 과거 다양한 역사유물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유적으로는 악해독단(嶽海瀆壇)이 있다. 조선시대 국가의 안전과 발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이 외에도 2009년 기초조사 과정에서 추가적인 발굴이 필요한 곳이 10여곳 이상 확인됐다. 악해독단을 비롯한 5곳에는 조선시대의 기왓장이나 고려시대 이후로 보이는 도자기 파편들이 발견됐다. 또한 2009년 기초조사 보고서는 보안 등의 이유로 정확한 현장조사는 하지 못했지만, 공원 내 5곳의 현장에 유물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보고서는 “공사 시행 이전에 문화재 발굴조사를 실시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용산공원추진단 측은 “2009년 기초조사에서 문화재 발굴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받은 장소를 고려해 설계를 하고 있다”며 “공사를 실시할 때는 기초조사를 고려해 발굴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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