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임덕 ‘반정치의 정치’로 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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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 잇단 국회 폄하 발언… 박근혜 대통령의 반정치와 일맥상통

“386조원의 정부 예산을 심의하는 데 정작 예산서를 읽을 줄 아는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다. 솔직히 너무 양심에 찔린다. 내 키의 7~8배 되는 예산서가 임박해서 오면 이거 만화책이라 해도 읽으라면 못 읽는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300명 국회의원 중에 예산서를 읽을 줄 아는 국회의원이 정말 한 명도 없을까. 기재위 소속 전직 국회의원 보좌관의 말이다. “맞다.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국회의원 중에 관료 출신도 있는데 설마 볼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겠나. 국회의원들이 예산 관련해서 가장 욕먹는 게 뭔가. 쪽지예산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예산안을 모른다는 것보다 자신이 알아야 할 부분만 귀신같이 안다는 게 가장 문제일 것이다.”

지역구 의원 중 쪽지예산과 관련해서는 이정현 대표도 자유롭지 않다. 2014년 11월에 열린 내년도 예산심의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이정현 의원의 ‘쪽지예산’이 얼마나 통과될 것인가였다. 재·보궐선거 당시 공약으로 ‘예산폭탄’을 예고한 이정현 의원은 광양만권의 기능성 화학소재 클러스터 구축에 25억원, 순천 해룡산업단지의 친환경연료 응용기술기반 구축사업에 110억원, 광양만권 하이퍼플라스틱 소재 연구기반 구축사업에 20억원, 순천 선비문화체험관 9억원 등의 예산을 요청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신임 지도부 초청 오찬회동에서 발언하는 이정현 대표를 보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신임 지도부 초청 오찬회동에서 발언하는 이정현 대표를 보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예산서 읽을 줄 아는 국회의원이 없다”
국회의원이 예산안을 읽을 줄 모르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예산안을 자신의 권력과 연동해 악용하는 것도 문제다. 예산안에 대해서는 또 다른 문제도 지적돼 왔다. 예산편성권을 행정부가 독점하면서 국회의 심의권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특히 기재부에서 국회가 요구하는 예산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않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국회의 예산 심의 권한이 더욱 축소되고 있다. 그렇다면 예산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대표가 지적한 국회의원 무능 문제와 더불어 실세 의원들의 권한남용 문제, 구조적인 문제도 함께 거론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대표는 국회의원 자질 문제 앞에서 멈춰섰다.

“모든 기득권을 철저히 때려부수겠다.” “기득권에만 집착하고 국민과 민생은 안중에도 없다.” 당대표 취임 이후 이정현 대표는 연일 국회를 비판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반정치, 국회 혐오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과도 겹친다. 반정치, 국회 혐오는 박 대통령이 국정을 이끄는 주요 동력이었다. 이진복 민주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박근혜 정치를 넘어서>라는 연구보고서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를 “‘박근혜 정치’는 정치불신으로 반사이익을 얻는 반(反)정치”라고 평했다. 유권자들의 정치혐오 심리에 기반해, 한국 사회의 갈등을 시끄러운 소수의 ‘그들만의 싸움’으로 전환시키는 정치라는 분석이다. 이는 철저히 여론에 기반한 것이다. 이진복 연구위원은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이 “감이나 이념에 의존하는 여론돌파형 리더십이 아니라 치밀한 여론조사에 근거한 여론관리형 리더십”이라고 말했다. 국가미래연구원이 2016년 7월 28일~8월 9일에 걸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시대정신의 구현을 가로막고 있는 대상이 누구냐는 질문에 54.8%가 ‘정치인’이라고 응답했다. 다음으로 대통령을 꼽은 응답자는 15.7%였다. 그러나 지지성향에 따라 답변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진보 지지층에서는 39.0%, 보수 지지층에서는 7.9%였다. 반정치, 국회 혐오는 유권자들의 뿌리 깊은 정서다.

새누리당 전당대회 결과는 지난 4·13 총선 결과와 정반대였다.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패배했고, 이는 청와대와 친박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전당대회 결과로 드러난 새누리당 당내 지분구조는 이러한 여론과 엇박자를 내고 있다. 이 어긋남으로 대선을 치른다면 필패가 아닐까. 이진복 연구위원은 새누리당 전당대회 결과를 19대 총선에서 패배하고 18대 대선에서 연이어 패배했던 2012년 민주당의 상황에 빗대어 설명했다. “지난 19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하고 이에 책임을 져 한명숙 당시 대표가 물러났지만, 이후에도 친노가 계속 당권을 잡았다. 새누리당의 지금 상황도 당시와 비슷하다. 친박의 입지는 다시 진박으로 점점 좁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정현 대표가 당권을 잡은 것은 박근혜 정권에서는 정치적으로 패배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특히 이번 대선은 새누리당이 10년 집권하고 치러지는 선거다. 새누리당 핵심 관계자는 다음 대선이 여당에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번 대선에서는 유권자의 심리상 야당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바꿔보자’라는 심리가 작동할 수밖에 없는 선거다.” 그런 만큼 역대 선거 공식에 비추어봤을 때, 차기 대권주자는 현 정권과 차별성을 보여줘야 한다. 이회창 후보가 김영삼 대통령과 선을 긋고, 박근혜 후보가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이명박 대통령과 차별화를 내세웠던 것처럼 말이다.

레임덕 막는 동시에 새로운 차별화 전략
그러나 정치권의 한 전략가는 이번 전당대회 결과 박근혜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에게 없었던 온건한 레임덕을 맞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레임덕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국회도 여소야대인 만큼 영향을 안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전당대회로 급격한 레임덕은 막았다. 내가 볼 땐 역대 대통령 중에 최초가 아닐까 싶다.” 향후 대선에서 불리할 수 있는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카드는 ‘반정치’다. 이정현 대표가 국회를 향해 내세우는 반정치, 국회 혐오는 대통령의 레임덕을 막는 동시에 새로운 차별화 전략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상일 아젠다센터 대표의 말이다. “이정현 대표가 그동안 정치를 해온 과정들을 보면 본인이 마음먹은 일에 대해 한두 가지는 아주 집요하고 강력하게 추진하는 성격이 있다.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을 비롯해 지금까지 정치개혁을 이야기한 정치인이 많았다. 그러나 어떤 정치개혁을 했는지 유권자들이 기억할 만한 게 없었다. 이정현 대표가 구두선에 끝내지 않고 포커스를 맞춰서 하다보면 그간 없었던 가시적인 변화가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새누리당도 변화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 개혁은 기존에 차기 대권주자들이 현 정권과 노선 차별화를 하는 것만큼 충분히 의미 있는 개혁이 될 수 있다.”

이정현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걸 누군가 속속들이 비디오로 찍어 보여준다면 국민이 돌 들고 달려들 거다. 지금 상태로는 내가 국회의원 했다는 사실을 태어나게 될 손주들한테 절대 알리지 말라고 할 것 같다. 이제라도 바꿔보자. 내가 무지하게 욕먹고 무지하게 힘들겠지만 그걸 주도할 거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부터 끊임없이 ‘반정치’의 정치로 국면을 전환해 왔다. 박 대통령의 반정치는 이정현 대표를 통해 임기말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이정현 대표는 국회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세월호 보도 개입 등 현 정권 실정의 장본인이었는데 과연 ‘민생’을 바꿀 만한 변화로 이어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현 대표의 ‘반정치’가 유권자들에게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는 것은 국회의 자업자득일지도 모른다. 이상일 대표의 말이다. “국회 소파를 의자로 바꾸고 ‘당대표는 손가락이 없냐’며 수행 없이 전화하는 것을 가벼운 이벤트 정치로 폄하시키기엔 지금 국회의원들의 특권의식과 권위의식이 상당히 깊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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