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독립운동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찾아서’…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

부수고 짓고 세우고…. 중국 충칭시 곳곳은 공사 중이다. 빠르게 내달리는 인구 3300만명의 거대도시에서 옛 흔적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취를 감춘다. 한국 근현대사의 애끊는 사연들이 묻힌 화상산 묘지도 그 중 하나다. 흙더미를 밀어내고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선 그 곳에서 옛 묘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사 중이라 옛 화상산 부지를 들어가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먼 발치에서만이라도 바라보세요. 저기에 산비탈이 있었는데, 그곳에 충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한국 사람들이 많이 묻혔습니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가 먼 곳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사라진 흔적에 답사단은 망연자실
34명의 20대 청년들의 눈길이 한 교수의 손끝을 따라가 보지만, 그곳이 어디쯤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충칭에 독립운동을 하러 온 한국인들이 죽으면 묻을 데가 없어 화상산 산비탈이나 바위 옆에 묻었습니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도 화상산에 묻혔습니다. 1991년에 화상산에 처음 갔었는데, 쓰레기장으로 방치가 돼 있었습니다. 한·중수교가 됐을 때라도 정부가 여기에 묻힌 한국인들의 유해를 찾았으면 되는데 찾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잃었을 때, 정부가 국민들을 지키지 못해 독립운동가들은 타국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있는데도 유해를 찾지 못해 죄송스러운 마음이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부끄럽다는 생각입니다.” 곽태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은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의 아들 김정육씨의 사연을 전했다. “2009년에 김정육 선생이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님의 유해를 찾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어머님의 묘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주인 없는 묘를 근처 공동묘지로 이장했다는 말만 듣고 당시 함께 갔던 100여명의 학생 답사단이 묘소를 찾아나섰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김정육 선생은 어머님의 유골 대신 화상산의 흙 한 덩이를 담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묻혔던 화상산 묘지 인근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묻혔던 화상산 묘지 인근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는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7월 15일부터 21일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동경로를 따라 답사를 떠났다. 광저우에서 창사, 류저우, 구이린, 구이양, 치장, 충칭으로 이어지는 여정이다. 그러나 흔적을 쫓는 답사단은 곳곳에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의 흔적은 사라지거나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김성철씨(26·아주대 공공정책대학원)는 “시각적으로 독립운동 유적지 등 터를 보며 생생하게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유적이 별로 없어 아쉬웠다”고 말했다. 홍석천씨(25·원광대 사학과)는 “역사의식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 정부가 답답하다. 식민의 경험이 있는 만큼 우리나라에서 독립운동의 역사는 중요하다. 헌법 전문에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만큼 비중 있게 다뤄야 하는데도 독립운동 유적지를 보존하는 일에 정부는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답사단은 사라진 흔적들을 당시에 대한 끊임없는 상상으로 채워나갔다. 이재민씨(28·경북대 교육대학원)는 “역사학에서는 이를 맥락적 감정이입이라고 하는데, 답사 기간 동안 당시 그들이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을지 끊임없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광저우에서 포산으로 이주했던 임시정부가 일본군의 진격을 피해 포산에서 다시 류저우로 향하는 여정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이동이었다. 임시정부가 포산으로 근거지를 옮긴 것은 1938년 9월. 임시정부는 이곳에 한 달가량 머물렀다. 그러나 오늘날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포산시의 고층빌딩 뒤로 몇십 년 전에 지어진 듯한 낡은 2층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 한시준 교수는 좁은 골목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임시정부 요인들이 살았던 집의 위치를 가늠했다. “증언에 따르면 28번지라고도 하고 32번지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쯤 어디에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이 살았던 집이 있을 겁니다.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증언에 따르면 이 가옥의 2층 뒤쪽 창으로 밧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치면 밧줄을 이용해 탈출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와 거주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산의 한 골목.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와 거주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산의 한 골목.

“우리 세대 이어 다음 세대도 자각하게”
포산으로 거주지를 옮길 때만 해도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곳에 오랜 기간 거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또다시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일본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을 해왔기 때문이다. 모든 교통수단은 통제된 상황에서 포산을 떠난 그들이 류저우로 이동할 때 이용한 것은 엔진이 달린 목선이었다. 한시준 교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100명이 넘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이 목선을 타고 한 달 보름이 걸려 겨우 류저우에 도착했습니다. 일본군의 공습은 계속됐습니다. 이미 선불로 돈을 다 받아놓은 중국인 뱃사공은 그 여정이 무서웠는지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게다가 류저우는 상류였기 때문에 밧줄을 잡고 상류로 역행해 가는 여정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당시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환경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류저우로 갔을지 여러분들이 당시를 떠올리며 생각을 해봤으면 합니다.”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의 상황을 끊임없이 떠올리면서 답사단은 당시 임시정부의 여정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지은씨(23·단국대 대학원 사학과)는 “3년 전에 처음 중국에 왔을 때 날씨도 덥고 너무 힘들었다. 그때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를 갔는데, 그때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느꼈다. 답사를 온 나는 너무 힘들어 집에 가고 싶은데,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고향으로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고향에 얼마나 가고 싶었을까, 그렇게 힘들었을 텐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번 답사에서도 그 생각을 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계속 생각해 본다”고 말했다.

충칭시 화상산 묘지가 있던 부근에서 한시준 교수가 설명을 하고 있다. 묘지가 있던 터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충칭시 화상산 묘지가 있던 부근에서 한시준 교수가 설명을 하고 있다. 묘지가 있던 터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그런 만큼 사라져가는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이번 답사는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투쟁이기도 하다. 손하늘씨(23·서울대 정치외교학과)는 “당시의 역사가 떠나가는 버스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희미해져 가겠지만, 개인적으로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을 뚜렷이 하는 것이다. 그들의 자취, 흔적을 따라가면서 되새기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립운동사를 현재 자신의 삶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우리 자신을 여기 있게끔 해준 역사다. 신체기관처럼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뿌리이자 우리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우리 세대, 그리고 다음 세대가 이를 자각하게 해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잊혀져가는 독립운동가들을 호명하는 것도 기억투쟁의 하나다. 이번 여정에서 창사에 위치한 유자명 기념관을 찾았다. 유자명 선생은 의열단·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등에서 활동했으며, 중국에서는 종묘를 개발한 농업학자로 더 유명하다. 유자명 기념관에서 유자명 선생의 아들 유전휘씨와 이번 답사에 동행한 독립운동가 김의한 선생의 손녀 김진현씨가 만났다. 유자명 선생은 끝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생을 마쳤으며, 김의한 선생은 1950년 납북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965년 북한에서 생을 마쳤다. 김진현씨는 “유전휘씨의 말에 따르면, 아버님 유자명 선생이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했지만 못 돌아왔다고 한다. 해방 직후에는 임시정부와 연락이 두절돼 돌아오지 못했고, 1950년에 대만에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한·중관계가 좋지 않아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이렇게 해외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다 생을 마치신 독립운동가들을 보면 정부가 독립운동가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것에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충칭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충칭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한국 정부보다 중국 정부 관심으로 보존
임시정부의 흔적은 한국 정부보다 중국 정부의 관심으로 보존돼 있었다. 임시정부의 마지막 거주지었던 충칭에는 임시정부 청사가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1940년 9월 충칭으로 옮겨온 임시정부는 석판가, 양류가, 오사야항, 연화지 등 4개의 청사를 사용했다. 해방 이후 마지막 청사인 연화지 38호는 여관, 학교, 주택 등으로 사용됐다. 철거 위기에 처해 있던 충칭 임시정부 청사는 1994년 6월 독립기념관과 충칭시 대외인민우호협회의 복원협정 체결로 1995년 복원을 완료할 수 있었다. 원형이 복원된 청사에는 1호부터 5호까지 건물이 있는데, 1호 건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소개하는 전시실이 들어 있고, 2호부터 5호 건물은 임시정부 요원 및 각 정부기구 사무실이 있다. 충칭 임시정부 청사는 중국 국가2A급 관광지, 충칭시 시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돼 있으며 연 2만여명의 한국인이 찾아온다. 향후 중국정부는 충칭에 위치한 광복군총사령부와 오사야항 청사를 복원해 이 부근을 한국거리로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한시준 교수는 “오사야항 청사에서 연화지 청사까지 약 500m 사이의 낡은 주택들을 모두 철거하고 거기에 한국거리를 만든다고 중국 정부가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거리를 조성하면서 오사야항 청사와 광복군총사령부 건물을 복원한다고 합니다.” 충칭 외에도 류저우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있으며, 김구 선생이 저격당했던 남목청 또한 당시 모습과 가깝게 복원돼 있다. 기강현 박물관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료실이 따로 설치돼 있다. 김윤지씨(25)는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기록을 보존한 사료관을 만들어준 것이 고맙다. 임용을 앞둔 초등학교 교사인데 이런 자료들을 미리 보아두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류저우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일투쟁활동기념관.

류저우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일투쟁활동기념관.

백범 김구가 저격당했던 남목청이 원형과 가깝게 복원돼 있다.

백범 김구가 저격당했던 남목청이 원형과 가깝게 복원돼 있다.

그러나 중국에는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정작 한국에는 없다. 참여정부 시절 한 차례 논의가 있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논의는 끊긴 상태다. 지금은 잡초만이 무성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거주한 충칭 토교한인촌 터에서 한시준 교수는 “우리 정부에서 이곳에 표지석 하나 만들지 않았다. 중국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을 만들었는데, 정작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우리는 임시정부기념관이 없다”고 말했다. 김진현씨의 말이다. “아직까지도 조명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너무 많다. 전체를 묶어서 자료를 집대성하고 또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해야 한다. 지금은 후손이 돈이 있으면 기념사업회를 통해 조명이 되고 후손이 돈이 없으면 묻혀버린다. 독일 같은 국가는 전범을 남미까지 가서 찾아오지 않나. 우리는 첫단추를 잘못 뀄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꿈꾼 나라를 후손들이 제대로 만들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글·사진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