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 정해사에서 영국군 노고를 달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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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를 평정한다’는 의미가 담긴 정해사, 일찍이 중국의 강성기에 세워졌던 이곳, 400여년 뒤 중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시발점이 된 난징조약 회담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1842년 8월 29일, 영국 군함 콘월리스(Cornwalis)호에서 난징조약이 체결된다. 청나라와 영국 측은 정해사(靜海寺)와 콘월리스호에서 보름이 넘도록 회담을 가졌다. 아편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강철군함을 내세운 영국의 요구가 거의 그대로 관철되었다. 청나라는 더 많은 항구를 개항하고 영국이 원하는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홍콩을 할양한 것도 바로 이때다. 난징조약 조인 이후, 청나라 흠차대신 기영(耆英)과 이리포(伊里布)는 영국군의 노고를 달래기 위한 잔치를 정해사에서 열었다. 영국의 군함에도 술과 음식이 전해졌다. 중국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라는 난징조약, 정작 당사자는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양 오랑캐를 어르고 달래서 성가신 상황을 얼른 끝내려 했을 따름이다.

1997년, 난징 시민들의 모금으로 정해사 내에 청동종이 안치되었다. 이름하여 ‘경세종’! 종의 앞면에는 ‘경세종(警世鐘)’이라는 글자가 주조되어 있다. 뒷면에는 <전국책(戰國策)>의 글귀가 주조되어 있다. ‘전사불망(前事不忘) 후사지사(後事之師)’. “지난일을 잊지 않고 훗일의 본보기로 삼는다”는 의미다. 종의 높이는 1.842m, 난징조약이 체결된 1842년을 상징한다. 종의 꼭대기 7.1㎝ 높이의 화구(火球)는 홍콩 반환 일자인 7월 1일을 상징한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날이었던 1997년 6월 30일, 경세종 타종 의식이 거행되었다. 해마다 난징조약 체결일인 8월 29일이 되면 경세종 타종행사가 열린다. 뼈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아이러니하게도 애초에 정해사는 중국이 세계 최고의 해상강국을 구가하던 당시의 주인공 정화(鄭和, 1371~1433)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영락제의 명으로 파견된 정화의 함대는 동남아시아·인도·아프리카를 누비며 명나라의 위세를 떨쳤다. 현재 정해사에는 ‘정화 기념관’과 ‘난징조약 사료 진열관’이 동시에 존재한다. ‘사해를 평정한다’는 의미가 담긴 정해사, 일찍이 중국의 강성기에 세워졌던 이곳, 400여년 뒤 중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시발점이 된 난징조약 회담이 이루어졌던 이곳, 바로 이곳에 지금은 홍콩 반환을 기념하여 만든 경세종이 자리하고 있다.

위안소 기념관 앞의 위안부 동상

위안소 기념관 앞의 위안부 동상

홍콩 할양과 배상금 지불한 난징조약
하나의 장소이되 여러 의미가 겹쳐진 겹겹의 공간, 난징에는 유난히도 이런 곳이 많다. 대보은사(大報恩寺)도 그런 곳이다. 2008년, 대보은사 유적지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중 ‘진링장간사탑신장사리석함기(金陵長干寺塔身藏舍利石函記)’라고 새겨진 1.5m 높이의 돌함이 발견된다. 돌함의 명문에 따르면, 대중상부(大中祥符) 4년(1011)에 가정(可政) 스님이 송 진종의 윤허를 받아 장간사(대보은사의 전신) 9층탑을 재건하면서 그 아래 지궁에다 부처의 정골(頂骨)사리를 모셨다. 명문의 내용대로라면 돌함 안에는 철함, 철함 안에는 아육왕(아쇼카왕) 탑, 아육왕 탑 안에는 은곽, 은곽 안에는 금관, 그리고 금관 안에 바로 부처의 정골사리가 있을 터였다. 과연 그랬다!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2008.8.6)에 철함이 개봉된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2010년 6월 12일, 은곽과 금관이 개봉되고 부처의 정골사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모시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곳이 바로 우수산(牛首山)의 불정궁(佛頂宮)이다. 부처의 정골사리가 불정궁에 안치되던 날(2015.10.27), 세계 각지의 불교신자가 이곳에 운집했다. 부처의 정골사리 덕분에 난징은 불교문화의 성지로 부각될 듯하다.

대보은사 유적지는 일찍이 당 현장의 정골사리가 발굴된 곳이기도 하다. 1942년 11월, 난징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군이 신사(神社)를 만들려고 기초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돌함을 발견한다. 돌함의 명문에 따르면, 그 안에 있는 것은 현장의 정골사리! 일본군은 교수들을 잡아다가 그것을 고증하게 한다. 비밀리에 진행되었지만 결국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다. 여론이 들끓자, 일본군은 현장의 정골사리를 왕징웨이 정부에 넘긴다. 이후 현장의 정골사리는 난징·베이징·일본에 나뉘어 모셔진다. 그 중 난징에 남겨진 정골사리는 중앙문물보관위원회와 구화산(九華山)의 현장탑에 나뉘어 보관된다. 현재 난징 영곡사(靈谷寺)에 모셔진 현장의 정골사리는 바로 중앙문물보관위원회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창안(시안)에 장사 지내진 현장의 정골사리가 어떻게 난징까지 오게 된 것일까? 현장의 정골사리가 들어 있던 돌함의 명문에 따르면, 당나라 말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현종의 사리탑이 파괴되었는데, 송나라 가정 스님이 창안에 들렀다가 현종의 정골사리를 가지고 난징으로 돌아와서 장간사에 안치한 것(1027)이다.

요하네스 니호프가 그린 대보은사 9층 유리탑

요하네스 니호프가 그린 대보은사 9층 유리탑

장간사가 있던 자리에 대보은사를 지은 이는 명나라 영락제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해 대보은사를 지었다. 19년(1412~1431)에 걸쳐 10만명이 동원되었을 정도로 큰 규모였다. 특히 9층 유리탑은 난징을 방문했던 유럽 여행자들에 의해 ‘중세시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예술성이 뛰어났다. 대보은사 유리탑에 대해 “큰 규모였다” “뛰어났다”라고 ‘과거형’으로 서술한 이유는 그것이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1856년에 벌어진 태평천국의 내분으로 인해 그토록 아름다운 탑이 파괴된 것이다. 우리로서는 박물관에 전시된 탑의 부분들만 볼 수 있을 뿐, 146개의 등잔이 80m에 달하는 유리탑과 어우러져 뿜어내던 아우라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일찍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파견한 사절단을 따라서 난징에 왔던 요하네스 니호프(Johannes Nieuhof, 1618~1672)는 그의 여행기에 중국의 여러 건축물과 더불어 대보은사 유리탑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의 여행기가 출간되자 당시 유럽인은 대보은사 유리탑에 매료되었다. 니호프는 이 유리탑을 자기탑(Porcelain Tower)으로 소개했다. 17세기 유럽을 풍미한 중국풍의 중심에 도자기가 있었던 걸 감안하면, 유리탑이 자기탑으로 오역되었기에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으로만 남은 대보은사 9층 유리탑
대보은사가 파괴된 지 150여년이 지난 2015년 12월, 대보은사유적지공원이 개방되었다. 2010년부터 추진된 대보은사 복원 사업의 결과다. 이 복원 사업을 위해 완다(萬達) 그룹의 왕젠린(王健林) 회장이 10억 위안(한화로 약 1700억원)을 기부해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불교신자도 아닌 그가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부를 한 이유는 중국의 전통문화 성지를 선양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일찍이 유럽이 선망했던 유리탑은 이제 인공지능 LED 조명 시스템이 적용된 탑으로 복원되었다. 대보은사의 복원은 21세기 ‘중화의 부활’을 상징한다.

어떤 역사는 영광의 기억을 소환하고, 또 어떤 역사는 뼈아픈 기억을 소환한다. 난징뿐 아니라 중국의 모든 역사, 나아가 인류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 보다 참혹한 경우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끝으로 난징을 떠나려 한다.

난징대학살, 1937년 12월 13일부터 6주 동안 무려 30만명이 학살된 아시아의 홀로코스트! 산 채로 묻기, 사지 절단, 불태우기, 동사시키기, 사나운 개의 먹이로 던져주기, 염산에 담그기…. 대체 난징에서 무슨 일이 왜 어떻게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 번역본 제목은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1997)의 일독을 권해드린다.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낱낱이 고발한 최초의 영문 논픽션인 이 책의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Iris Chang)이다. 그녀는 자신의 책이 ‘두 가지’ 잔학행위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는 일본이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은 난징대학살 자체다. 다른 하나는 일본이 이 대학살의 기억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우려 하는 행위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조지 산타야나)는 경고를 책을 쓰는 내내 마음 깊이 새겼다는 아이리스 장, 그녀는 서른여섯이던 2004년에 자살하고 말았다. 출간 이후 일본 극우세력으로부터 지속적인 협박을 받으며 공포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정직하게 과거와 대면하기를 거부하는 일본이야말로 그 죽음의 궁극적 원인이리라. 아이리스 장이 난징대학살의 진상을 세상에 알리고자 한 것은 ‘기억의 의무’ 때문일 것이다. 그 의무를 잊는다면, 대학살에 관한 온당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을 뿐더러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기에.

난징대학살 기념관

난징대학살 기념관

난징대학살 기념관과 위안소 기념관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바로 ‘기억의 의무’를 상기시켜주는 공간이다. 이곳이 개관한 날은 1985년 8월 15일, 항일전쟁 승리 40주년이 되는 때였다. 기념관 설립의 직접적 계기가 된 건 1982년에 벌어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다. 중국 ‘침략’을 ‘진입’으로 기술하는 등 역사의 왜곡이 중국인의 분노를 자아냈고, 그 결과 기념관 설립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정문 좌측에는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侵華日軍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의 정식 명칭으로, 덩샤오핑의 글씨다. 기념관 입구에는 12.13m 높이의 십자가 모양 표지비가 세워져 있다. 난징이 함락된 12월 13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표지비에 새겨진 ‘1937.12.13~1938.1’이라는 숫자는 대학살이 자행된 기간을 나타낸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장, 희생자의 유골 전시실, 대학살 관련 자료 전시실이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관통하는 콘셉트는 ‘삶과 죽음’ ‘고통과 한’이다. 광장 구역에서는 죽음을 상징하는 자갈, 생명을 상징하는 풀과 나무, 양자의 선명한 대비 속에서 고난에 빠진 희생자들의 조형물이 그 고통과 한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유골 전시실에는 법의학·고고학·역사학 전문가들이 난징대학살로 희생당한 이들의 것이라고 검증한 유골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이야말로 일본이 대학살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다. 기념관이 세워진 강동문(江東門) 일대는 대학살이 자행된 대표적인 지역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사료 전시실에서는 일본이 상하이를 함락한 때부터 일본이 패망한 이후 난징전범재판이 열리기까지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30만, 난징대학살 기념관 곳곳에서는 ‘30만’이라는 희생자 수를 환기시키고 있다. 일본이 난징을 침략했을 당시 난징 시민의 절반은 이미 피난을 떠난 상태였다. 남은 50만명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였다. 바로 이들을 상대로 일본군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잔혹한 방법으로 살인과 강간을 저질렀던 것이다. 12월 13일은 난징대학살로 희생된 30만명의 넋을 기리는 국가추모일이다. 이날을 국가 차원에서 공식으로 추모하기 시작한 2014년, 중국 정부는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위안부’ 관련 자료와 함께! 2015년 10월, 난징대학살 자료는 등재되었으나 위안부 자료는 등재되지 못했다. 올해 중국·한국·일본·필리핀·인도네시아·동티모르·네덜란드·영국·오스트레일리아·미국 10개국의 민간단체가 연합해 위안부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한 상태다. 난징대학살마저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일본은 이번에도 역시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위안부 제도가 강제성을 띤 국가적 동원이었음은 너무나 명백하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에서 동쪽으로 6㎞ 되는 곳에 위안소 기념관(利濟巷慰安所舊址陳列館)이 있다. 동운(東雲)위안소와 고향루(故鄕樓)위안소가 있던 곳이다. 평안남도 출신 박영심이 일본군 성노예로 지냈던 곳이 동운위안소다. 2003년, 박 할머니는 난징을 찾아 여기가 바로 자신이 3년 동안 갇혀 지낸 곳이라고 증언했다. 윈난 쿤밍의 미군 관할 포로수용소에서 촬영된 사진 속 위안부 4명 중 임산부가 바로 박영심이다. 위안소 기념관 앞의 위안부 동상 셋 중에서 가운데 임신한 이가 바로 박영심이다. 기념관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한 ‘눈물방울’ 조형은 수많은 박영심의 피맺힌 원한의 눈물일 터.

박영심은 2006년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인생을 나락으로 몰아넣은 일본 당국의 사과조차 받지 못한 채. 2015년 12월 1일, 위안소 기념관이 개관하던 이날 서울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은 더욱 처연해 보였다. 몇 주 뒤인 12월 28일, 일본 정부는 10억 엔을 출현키로 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에 동의했다. 일본은 “더 이상 사과는 없다”고 한다. 언제 그들이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있기나 했던가. 올해 6월, 독일 헤센주(州) 정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운영에 관여했던 이들의 재판 관련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아 참, 내년도 정부 예산에서 위안부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사업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다고 한다. “민간단체에서 추진하는 일”이라는 게 여가부의 입장이란다. 역사를 ‘왜’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난징이 던지는 질문을 되새기며 이제 이곳을 떠난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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