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장이 세운 성벽 ‘13개 성문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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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성벽의 13개 성문은 끝이 없는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마치 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그러고 보면 난징의 13개 성문은 하늘의 별을 본떠 만든 것이다.

심각한 가뭄이 들었다. 이어진 메뚜기 피해와 돌림병. 반년 만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형까지 모두 잃은 이 가련한 소년, 관을 마련할 돈조차 없어 낡은 옷으로 유해를 수습해 이웃집 땅에다 안장했다.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기만 하다. 갈 곳은 절밖에 없었다. 얼마 뒤 절에서도 식량이 동났다. 소년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탁발승 노릇을 하며 지냈다. 그렇게 몇 년을 떠돌다가 다시 절로 돌아온 게 1348년. 스무 해가 지난 1368년, 그는 난징에서 제위에 올라 명나라 건국을 선포한다.

4중 구조로 건설된 세계 최대의 성벽
그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 바로 주원장(1328~1398)이다. 주중팔은 홍건군(紅巾軍)의 우두머리 곽자흥(郭子興)의 휘하로 들어갔을 때 주원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朱)는 주살의 주(誅)를 의미하고, 원(元)은 원나라를 의미하며, 옥으로 만든 홀(笏)인 장(璋)은 인재를 의미한다. 주원장은 그 이름처럼 ‘원나라를 멸망시킬 인재’였다. 그는 원나라 군대를 거듭 격파했다. 곽자흥은 자신의 양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1355년에 곽자흥이 병사하자 그 뒤를 이은 주원장은 강남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다. 한족의 부흥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원나라와 대적하는 지도자로 부상한 주원장, 그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인재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말에 귀기울였다. 주원장이 난징을 근거지로 삼은 것은 책사 풍국용(馮國用)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다. 주승(朱升)이라는 책사는 “성벽을 높이 쌓고, 식량을 많이 저장하고, 왕위에는 천천히 오르십시오”라고 했다. 주원장은 이 말을 그대로 실천한다. 라이벌이었던 또 다른 반란군의 지도자 진우량이 한왕(漢王)을 자칭하고 장사성이 오왕(吳王)을 자칭할 때도, 주원장은 왕위에 오르는 데 급급해 하지 않았다. 그는 소명왕(小明王) 한림아를 계속 받들면서 자신의 실력을 키웠다. 1366년, 홍건군의 기반인 백련교의 지도자 한림아는 난징으로 가던 길에 배가 뒤집혀 강물에 빠져 죽고 만다. 아마도 그의 죽음은 주원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듬해 주원장은 오왕을 자칭했으며, 마지막 라이벌인 장사성도 죽였다. 그리고 1368년, 주원장은 황제가 된다. 국호는 대명(大明), 소명왕 한림아를 계승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일찍이 백련교를 기반으로 일어났던 홍건군은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강생하고 명왕(明王)이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선전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대명을 건국한 주원장이 예언의 명왕이었던 셈이다.

“성벽을 높이 쌓으라”는 주승의 권고는 난징에서 착실히 이행되었다. 난징의 명나라 성벽은 궁성·황성·경성·외곽성의 4중 구조로 건설되었다. 외곽성까지 모두 완공된 건 1393년으로, 처음 궁성을 건설하기 시작한 때(1366)로부터 무려 28년이 걸렸다. 명나라 성벽의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될까? “두 사람이 각각 말을 타고서 성벽의 반대 방향으로 하루 종일 가야만 만날 수 있다.” 16세기 중엽에 난징에 세 번이나 왔던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마테오 리치 중국 찰기(札記)>에 나오는 말이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명나라 성벽은 명실상부 세계 최대의 규모였다. 외곽성이 60㎞, 경성이 35㎞에 달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건 경성 성벽(약 25㎞)이다.

신책문(화평문)

신책문(화평문)

경성 성벽의 13개 성문을 동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동쪽 성문은 조양문이다. 남쪽 3개의 성문은 정양문·통제문·취보문이다. 서쪽 5개의 성문은 삼산문·석성문·청량문·정회문·의봉문이다. 북쪽 4개의 문은 종부문·금천문·신책문·태평문이다. 13개의 성문 중 상당수가 사라졌고, 일부는 이름이 바뀌었으며, 또 일부는 철거되었다가 다시 세워졌다. 한편 청나라, 민국시대, 중화인민공화국에 걸쳐서 새로운 성문이 많이 생겨나기도 했다.

부자들에 대한 주원장의 경계와 의심
난징의 성문은 끝이 없는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마치 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그러고 보면 난징의 13개 성문은 하늘의 별을 본떠 만든 것이다. 난징을 둘러싼 성벽의 북서쪽 귀퉁이(의봉문)와 동남쪽 귀퉁이(통제문)에 각각 점을 찍은 뒤 두 점을 선으로 연결해보자. 취보문·삼산문·석성문·청량문·정회문·의봉문은 ‘남두육성’에 해당한다. 그리고 통제문·정양문·조양문·태평문·신책문·금천문·종부문은 ‘북두칠성’에 해당한다. 난징의 성벽을 만든 주원장의 효릉(孝陵)은 북두칠성 영역에 자리한다. 게다가 황릉의 신도는 모두 직선 형태인데, 효릉의 신도는 북두칠성 형태로 굽어 있다. 예로부터 남두육성은 삶을 관장하고 북두칠성은 죽음을 관장하는 별자리로 믿어졌다. 난징의 13개 성문에는 자신이 세운 나라의 수도에 우주를 구현하고자 했던 주원장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또한 북두칠성 형태의 신도는 그가 우주의 중심 북두칠성에 묻힘으로써 영원을 기약하고자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런데 주원장은 엄청난 축성 자금을 어떻게 조달한 것일까? <명사>에 의하면, 강남의 부자 심만삼(沈萬三)이 난징 성의 3분의 1을 쌓는 비용을 댔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군대의 노고를 위로하는 자금까지 내놓겠노라고 했다. 일개 필부가 천자의 군대를 위로하겠다니! 주원장은 분노하며 그를 죽이려 했다. 이때 마(馬)황후가 이렇게 말하며 주원장을 말린다. “법률이란 불법을 저지른 자를 죽이기 위함이지, 불길한 자를 죽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나라에 대적할 정도로 부유한 자는 불길하고, 불길한 자는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니 폐하께서 그를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주원장은 심만삼을 죽이는 대신 윈난(雲南)으로 유배를 보냈다.

1937년 12월 13일, 중화문으로 돌격하는 일본군

1937년 12월 13일, 중화문으로 돌격하는 일본군

명나라 초에 강남 일대의 부자는 죄다 주원장의 고향인 펑양(鳳陽)으로 이주당하기도 했다. 이는 한나라 고조가 부자를 죄다 관중(關中)으로 이주시킨 사례를 따른 것으로, 주원장은 자신의 고향을 수도로 삼고자 14만 호에 달하는 강남 백성을 펑양으로 이주시켰다. 결국 펑양으로의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하들의 반대도 있었거니와, 그곳은 자신뿐 아니라 개국공신들의 고향인지라 권력의 누수가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대한 경계와 의심을 떨칠 수 없는 게 일인자의 숙명이긴 하지만 주원장은 그 정도가 너무도 심했다. 그런 그가 심만삼과 같은 이를 그냥 두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게다가 심만삼은 일찍이 주원장의 라이벌 장사성을 도운 전력까지 있다. 장사성을 도운 부자가 어디 심만삼뿐이랴. 장사성이 세력을 발휘할 때 누구든 그를 도울 수밖에 없었던 게, 주원장이 황제가 된 상황에서는 원죄가 되어버린 것일 따름이다. 주원장은 이 부자들을 죄다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경계와 의심을 해소했다. 그리고 부자에 대한 분풀이까지 해낸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13개의 성문 중에서 ‘취보문(聚寶門)’에는 심만삼과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진다. 취보문을 세울 때 계속해서 지반이 무너져서 점을 봤더니, 성문 아래에 취보분(聚寶盆)을 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취보분은 재물이 계속해서 나오는 일종의 화수분이다. 주원장은 심만삼이 가지고 있던 취보분을 가져다 성문 아래에 묻게 한다. 그랬더니 더 이상 지반이 무너지지 않았고 성문을 세울 수 있었단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설이지만, 취보분의 소유자로 말해질 정도로 심만삼이 부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부를 주원장이 앗아갔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취보문은 ‘천하제일의 옹성(甕城)’이라 불릴 정도로 완벽한 옹성을 갖추고 있는데, 1931년 국민정부에 의해 중화문으로 개칭되었다. 성문에 새겨진 ‘중화문(中華門)’은 장제스의 글씨다.

주원장의 지나친 경계와 의심이 도리어 그의 의도와 어긋난 결과를 가져온 경우도 있다. 황태자 주표가 한창 나이에 죽자 주표의 장자 주윤문을 후계자로 지명한 뒤 단행한 대규모 숙청이 대표적인 예다. 주윤문이 숙청의 이유를 묻자 주원장은 그에게 가시가 가득한 나뭇가지를 쥐어보라고 한다. 머뭇거리는 주윤문에게 주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 가시 돋친 나뭇가지를 쥐지 못하니, 내가 너를 위해 가시를 죄다 없애주려는 것이다.” 주원장은 이렇듯 손자를 위해 가시를 없애주고자 했으나, 능력 있는 이들이 모두 제거됨으로써 도리어 손자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주원장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1399)에 넷째아들 연왕(燕王) 주체가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킨다. 1402년, 주체의 군대가 난징에 이르자 주혜와 이경륭은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난징은 함락되고 건문제(주윤문)의 행방은 미궁에 빠진 채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한다. 주체의 군대가 들어왔던 성문이 바로 ‘금천문(金川門)’이다. 일찍이 주원장이 잔인한 숙청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혹시 그들 중 목숨 걸고 금천문을 지켰을 사람이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책임자의 이름이 찍힌 난징 성벽의 벽돌

책임자의 이름이 찍힌 난징 성벽의 벽돌

성벽에 쓰인 벽돌의 책임실명제
13개의 성문 중에서 사연 많기로는 신책문(神策門)과 태평문(太平門)을 능가할 게 없을 것이다. 먼저 신책문의 사연부터 알아보자. 남명의 정성공이 반청복명(反淸復明)을 기치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난징을 공격했을 때 난징을 지키고 있던 청나라 군대는 1만여명에 불과했다. 청나라의 양강 총독은 신책문을 굳게 닫고 지연작전을 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성문 밖으로 나가 싸워서 큰 승리를 거둔다. 순치제는 이를 기념해서 신책문을 ‘득승문(得勝門)’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난징이 태평천국의 수도였을 때, 청나라 군대가 내내 공격의 목표로 삼았던 곳도 바로 신책문이다. 결국 신책문도 태평천국도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고 말았다. 신책문의 ‘화평문(和平門)’이라는 글씨는, 민국시기에 화평문으로 개칭되면서 새겨진 것이다. 당시 화평문 안에는 아시아 석유회사(Asiatic Petroleum Company)의 유류창고가 들어섰다. 이후 일본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도 이곳에 유류창고를 두었다. 화평문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내내 유류창고의 기능을 하면서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었다. 화평문이 군에서 인민정부로 넘어오고 시민에게 개방된 것은 2001년, 비로소 평화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된 것이다.

태평문이야말로 그 이름과의 불일치가 가장 심한 성문이다.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의 최후 보루였던 태평문과 주변 성벽이 20여 장(丈)이나 무너져 내렸다. 태평천국 진압에 나선 상군(湘軍)이 성벽 아래 매설한 600여 포대의 화약이 폭발한 것이다. 조열문(趙烈文)의 <능정거사(能靜居士) 일기>에서는 난징이 함락된 이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성이 함락된 날 전군이 성을 약탈했다.” “사흘 동안 10여만명을 죽였고 진회하에는 시체가 가득했다.” “마흔 이하로는 한 명도 살아남은 이가 없고 노인은 부상당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칼에 십여 번 혹은 수십 번을 찔렸으며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으로 멀리 퍼졌다.”

그로부터 70여 년 뒤, 태평문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1937년 11월 상하이를 함락한 일본군은 난징을 향했다. 12월 8일, 장제스는 비행기로 난징을 떠났다. 난징 사수를 강력히 주장했던 탕성즈(唐生智) 역시 퇴각 명령을 받고서 12월 12일에 배를 타고 난징에서 빠져나갔다. 이튿날, 태평문 부근에서 무려 1300여명이 학살된다. 일본군은 항복한 중국군과 시민을 이곳에 모아 놓고 주위에 철조망을 둘러쳤다. 이들의 발아래는 일본군이 매설해 둔 지뢰가 있었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고 철조망 안에 갇힌 이들은 굉음과 함께 폭사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일본군은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70년이 지난 2007년 12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었던 태평문 근방에는 이날을 기억하고자 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날의 학살에서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을 증언한 이는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던 일본 병사다. 인터뷰 당시(1999) 그는 이미 여든 중반을 넘어선 노인이었다.

난징 성벽의 벽돌은 ‘책임’의 막중함을 묻는다. 성벽을 쌓는 데 쓰인 벽돌에는, 관리부터 인부에 이르기까지 해당 벽돌의 제조와 관련된 이들의 이름이 선명히 찍혀 있다. 검사에 불합격하면 관련자는 처벌을 받았다. 사형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엄격한 ‘품질보증제’ 덕분에 난징의 성벽이 지금까지도 건재한 것일 터. 성벽의 벽돌조차 책임자를 찾아 문책할 수 있었건만, 뼈아픈 역사의 과오에 대한 책임자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했다는 소식은 왜 들리지 않는가.

1366년을 기점으로, 올해는 난징 성벽이 세워진 지 65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서 올해 9월부터 성벽 위에서 다양한 행사가 펼쳐질 예정이라고 한다. 게다가 10월 즈음에는 타이청(臺城)에 있던 난징성벽박물관이 확장 이전을 마치고 정식으로 개방한다. 새 박물관의 전시공간이 1만㎡에 달한다니,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하다. 새롭게 탄생할 난징성벽박물관은 취보문(중화문) 동북쪽에 있던 ‘심만삼 기념관’을 기반으로 세워지는 것이란다. 정말 취보문 아래 어딘가에 취보분이 묻혀 있는 게 아닐까.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난징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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